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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38 환승역에선 정신을 차리자 
본문 요한복음 18:1~11(신약178) 
날짜 2020-08-3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38

성경 : 요한복음 18:1~11(신약 178)

제목 : 환승역에서는 정신을 차려라

 

청년 시절 부산 촌놈이 서울에 일이 있어 갔다가 지하철에서 길을 잃고 10여 분을 헤맨 일이 있습니다. 길을 잃었던 역은 2호선 사당역인데 지하철을 갈아타는 환승역이었습니다. 서울에 사람 많은 줄은 알았지만 땅 속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환승역이라는 것도 생소한 데다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군중들 흐름에 휩쓸리다보니 그만 길을 잃고 헤맸던 것입니다. 환승역에서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직장을 옮겨야 할 때도 있고 어울리는 사람을 바꿔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좀 더 좋아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좀 더 좋아지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는 데는 신경을 쓰며 사는데 정작 좀 더 좋아지는 더 중요한 방법과 더 쉬운 방법에 대해서는 대체로 사람들이 무관심합니다. 바로 마음의 습관을 바꾸는 일입니다. 몸에 밴 습관을 바꾸는 일도 어려운데 마음에 밴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의 습관이 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인생을 불행의 악순환으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한다면 갈아 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먼저 마음에도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 대해 반응하는 내게 길들여진 마음의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려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이후 제자들과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 곧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가룟유다가 데리고 온 로마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속한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응하는 가룟유다와 베드로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이 주제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병적 집착이 주는 실망과 미움의 습관에서 갈아타라

 

 

 

가룟유다는 제 발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스승인 예수를 넘겨주기로 하고 로마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나타납니다. 3절입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3)

 

가룟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그가 어째서 3년간 동고동락한 스승을 배반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기록처럼(요12:6) 돈을 좋아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나중에 돈도 버리고 자살한 것을 보면 돈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한 누가의 기록(눅22:3)은 결과론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가룟유다가 주님을 판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이야기가 있어 들려드립니다.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히스클리프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란 여자를 좋아하는데,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소한 오해로 인해 관계가 멀어 집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배신감을 느끼고는 지금까지 좋아했던 감정이 증오로 바뀝니다. 그리고 캐서린의 인생을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캐서린의 딸의 인생까지 파괴해 갑니다. 무려 18년간 캐서린의 인생을 철저히 짓밟고 파괴한 히스클리프 어느날 과거 캐서린을 향해 가졌던 사랑의 감정을 문뜩 느끼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이 지난 18년 동안 저지른 일들로 인해 미쳐버리게 되지요.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께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가룟유다가 아니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바라는 것이 있는, 아니 강한 집착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스승 예수는 자기가 바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급기야 저 간악한 권력자들과 맞서지 않고 그들 손에 죽기를 각오하는 모습을 보면서 집착은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은 곧 증오가 되어 자신의 기대를 외면한 스승을 파괴하는 폭력 모드로 돌변하였던 것입니다.

헤어진 애인을 찾아가 폭력을 가하거나 어떻게 했다는 뉴스들이 가끔 있지요. 그 사람은 실은 애인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했던 것이지요. 애인을 통해 그 자기애라는 것이 채워지지 않고 실망으로 돌아오니까 파괴 모드로 돌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할 때에도 그 사랑이 정말 조건없는 사랑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실은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집착 말입니다. 그것이 자식을 향한 사랑이 아닌 집착일 경우 아들에게 애인이 생기거나 며느리가 생기면 아들에게서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희한하지요. 아들이 배신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들을 빼앗아간 아들의 애인이나 며느리도 좋을 리가 없겠지요. 사람이 사람이든 무엇이든 집착하여 사랑하게 되면 실망이 증오가 되고 증오가 폭력으로 돌변하는 시한폭탄을 갖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진짜 배신을 경험하기도 합니다만 친구 나 주변 누군가에게서 배신감 느낀다, 실망했다고 느끼는 대부분은 실은 원인이 내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배신하거나 실망케 한 것이 아니라 가룟유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병적인 집착이 결국 스스로 배신감과 실망감, 증오를 만들어 내고 키웠던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흐름을 자꾸 들여다보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실망하고 실망이 미움되고 하는 이 마음의 습관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속에 다 가룟유다가 있습니다. 가룟유다로부터 내리십시오. 예수의 마음을 갈아타십시오.

 

 

 

화를 화로 받는 습관에서 갈아타라

 

 

 

가룟유다가 데려온 로마군인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 횃불과 무기를 들고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칼을 빼서 휘둘렀습니다. 그 칼에 맞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의 귀가 잘리지요. 10절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0)

 

예수님이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자신이 예수이심을 밝히시면서 나를 잡으러 왔으면 나만 잡아가고 이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상대는 중무장한 로마군인들이고 숫자도 많은데 거길 향해 칼을 휘둘렀으니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용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더러 ‘적어도 너만큼은 나를 위해 용감하게 나서주니 내 억울함이 조금은 풀리는구나, 고맙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지요. 다른 성경에 보면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마26:52)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베드로는 너무 많습니다. 나한테 못됐게 하는 사람 어떻게든 갚아주지요. 부산 사람들은 ‘날 힘들게 한 사람은 끝까지 갈바준다’라고 표현합니다. ‘갈바준다’는 말은 갉아준다는 말의 사투리 같은데 갚아준다, 짓밟아준다는 정도의 느낌으로 부산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 나를 힘들게 한 사람 ‘갈바주려는’ 마음이 다들 있지요.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면 더 바보 취급하고 그러면 더 힘들어지니까 자구책으로 독해지는 겁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기만 하지 말고 뱀처럼 지혜로움도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체포되는 당사자이신 예수님은 너무나 덤덤하고 평온하기까지 하십니다. 베드로와 상당히 대조가 되지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두 번씩이나 물어보시고, 두 번씩이나 ‘내가 그다’라고 잡으러 온 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지요. 구약의 아합은 적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옷을 갈아입고 변장까지 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자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까지 하십니다(11).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해서도 그들을 몰고 온 배신자 가룟유다 앞에서도 어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있을까요?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주면 화분의 화초가 꽃을 피웁니다. 그때 물과 햇빛이 화초가 꽃이 피게 된 조건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화초가 꽃을 피운 것은 그 화초가 꽃 피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화분에다 돌을 심어놓고 거기에 열심히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준다고 꽃이 피지는 않습니다. 똑같은 조건이지만 돌은 그 자체에 꽃을 피우는 성질이 없습니다. 물과 햇볕은 꽃을 피울 수 있는 조건은 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꽃 자신에게 있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둥근 컵에 담으면 물이 부드러워 보이고 뾰족한 컵에 담으면 날카로워 보입니다. 상황은 분명히 고통스럽고 아프고 힘들고, 또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그것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받느냐에 따라 억울한 일이 될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두려운 일이 될수도 있지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생활이 생지옥이 될 수도 있고 잔잔한 호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픔을 아픔으로 받고 화를 화로 받으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생지옥이 되고 생활도 엉망이 됩니다.

어떤 분이 다니는 회사에 사장이 싸가지 없기로 소문난 사장이었습니다. 정말 몰상식한 막돼먹은 사람이어서 주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없고 종 부리듯 대합니다. 한 번도 칭찬하거나 따뜻하게 챙겨주지 않고 무조건 트집 잡고 뭐라 합니다. 회사는 항상 긴장감이 돕니다. 아무리 성격좋은 사람도 그 사장과 만나면 얼마 있지 않아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고 스트레스를 가득 받아 하루 종일 씩씩거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군가하고는 그날 부딪힙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일이 사흘이 멀다고 일어나니 회사 분위기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 친구가 거래처 회사에 다니는데, 물건을 납품하러 왔습니다. 역시나 사장은 싸가지 없게 대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장의 몰상식한 태도에 그 친구는 얼굴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겁니다.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농담을 해가면서 사장을 응대하는데 사장이 오히려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나중에 일 마치고 친구를 불러내서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우리 사장 태도 때문에 기분 나쁘지 않더냐?’ 친구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감정이 남에게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한다. 그 사장 때문에 내가 기분 나빠하면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그 화가 나갈 것이고, 그러면 가족들도 불행해지고 할텐데 뭣 때문에 그 사장 때문에 기분 나빠할거냐?’

내가 화를 화로 받으면 그것이 내 가족에게나 다른 누군가에게로 반드시 가게 되지요. 연쇄반응이 일어나서 생활이 금방 엉망이 되고, 또 그것을 추스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면 삶이 지옥처럼 흘러갑니다. 그것을 차단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니 참 지혜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것이 누구나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삼 년간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면서 훈련받은 베드로도 환경 앞에서 무너졌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깥 환경에 무너지지 않으신단 말이지요. 근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억울해하거나 분해하거나 하시는 게 없습니다. 완전 자유 그 자체입니다. 참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렇지 뭐!’라고 해버리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예수님이 됩니다.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힘은 어디서 왔을까? 역시 기도에서 답을 찾게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을 다해 드리신 그 기도가 평정한 마음을 주는 겁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면 거뜬히 잔을 비울 수 있는 평정한 마음의 힘! 생각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나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출퇴근길 환승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빕니다. 사람들이 쓸려 다니다시피 합니다. 힘이 없으면 군중들 흐름에 휩쓸려 차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힘이 있어야 내가 갈아탈 차를 타고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듯이 성령의 힘을 힘입어야 마음을 지켜내고 생활을 가야할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오늘은 주님이 잡히시던 사건 속에 등장한 가룟유다, 베드로, 주님의 모습을 통해 바깥 환경으로부터 오는 갖가지 전자파와 같은 영향들을 끊어내고 내 마음을 주님의 평안으로 지켜내는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병적집착을 사랑과 애정으로 착각하면서 실망과 미움으로 습관 들여진 마음으로부터 갈아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두려움으로 반응하고 억울함으로 반응하고 분노로 반응하면서 스스로 삶을 지옥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습관으로부터 갈아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하신 그 평안이 이번 한 주간도 우리 심령을 견고히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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