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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37 더 이상 용꿈을 꾸지 말라 
본문 요한복음17:11~17(신약176) 
날짜 2020-08-23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37

성경 : 요한복음 17:11~17(신약 176)

제목 : 더 이상 용꿈을 꾸지 말라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오늘날 사법고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경쟁이 심하고 합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소과시험과 대과시험으로 나뉘어지는데 생원을 뽑고 진사를 뽑는 소과시험만 해도 20만명 이상이 응시해서 1400명만 합격하는 경쟁률이 140대 1을 뚫어내야하는 바늘구멍 시험이었습니다. 대과시험은 20만명 중에서 딱 33명만 합격하는 경쟁률이 무려 6,000대 1이나 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용꿈을 꿔야 과거시험에 붙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고 실제 용꿈을 꿔서 과거에 붙었다는 기록도 다수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꿈을 최고로 여겨왔습니다. 용꿈이 하늘의 선택을 받아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권력과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용꿈은 모두를 위한 꿈이 아니라 나 혼자만을 위한 꿈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좀 특별하다싶은 꿈을 꾸면 용꿈의 주인공이 되는 희망을 품고 로또를 사러 갑니다.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혹시 용꿈을 꾸는 사람들의 목적과 비슷하지는 않을까요?

예수님이 드리신 마지막 기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드린 두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기도처럼 보이나 실은 같은 기도입니다. 다가오는 핍박과 유혹 앞에서 제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흩어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도록 하나되게 해 달라는 것이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진리로 무장하여 거룩히 구별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되게 하소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하신 첫 번째 기도인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11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1)

 

주님이 떠나가시고 거센 핍박이 일어나면 제자들은 목자 잃은 양떼처럼 갈팡질팡 하고 뿔뿔히 흩어지게 될 것이 뻔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누가복음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같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보시고 제자들이 하나된 힘으로 이겨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됨이 뭔가를 알아야겠습니다. 나라도 일치단결, 대동단결 같은 구호를 내세워 하나됨을 강조하지만 교회처럼 하나됨을 강조하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됨을 강조하는지 큰교회들은 봉사자들에게 똑같은 유니폼을 입히기도 하고 부교역자들도 양복색깔 와이셔츠 색깔 넥타이 색깔까지 통일시키기도 합니다. 무슨 판매회사 같은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그것이 획일주의인지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하나됨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되기 어려운 곳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처럼 하나됨을 강조하는 곳도 드물지만 또 교회처럼 하나되기 어려운 곳도 없을 겁니다. 갈등이 없는 교회가 드물고, 분열을 겪지 않은 교회는 천연기념물보다 드뭅니다. 그러다보니 고린도전서 1장 10절을 인용해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란 표어도 등장해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해서 반대 의견이나 다른 의견을 내면 정죄하는 분위기로 흐른단 말이지요.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을 해야지 왜 다른 생각하느냐, 왜 다른 말 하느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의견도 가질 수 있지요 사람인데. 어떻게 똑같을 수 있습니까?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하나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견해를 말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때려잡는 분위기가 실은 하나됨을 해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자유롭게 공존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성숙한 하나됨이지요. 정말 하나되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깊이 있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됨이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정말 하나되려면 좀 큰 수레가 되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이라는 말을 씁니다. 소승은 작을 소(小)자 탈 승(乘)자 해서 몇몇 사람이 자기네끼라만 수레를 타고 간다는 것이고, 대승은 큰 대(大)자를 써서 되도록 많이 타고 가는 수레란 뜻입니다. 교회가 정말 누구나 타고 갈 수 있는 방주였고 수레였는가 고민을 하던 중에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행여 이혼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형편이 어려워지거나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거나 하면 교회에 발걸음이 뜸해지다가 결국 교회에서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제가 거쳐온 교회가 대부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교회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위 모범적이라 할만한 사람들과 모범적인 신앙인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조폭과 비슷한 삶을 살던 세리나 도둑 창녀도 있었습니다. 온유한 사람도 있었지만 과격한 투쟁을 하던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격파탄자, 인생실패자, 이런 사람들이 득실 거렸습니다. 예수님 이야기에는 외양간, 말구유, 갈릴리, 나사렛, 가난하고 병든 이들, 세리와 친구 같은 주변부를 상징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좀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정도 어느 정도 변변해야 하고, 직장도 변변해야 하고, 자식들도 변변해야 교회 다니기 편한 곳, 헌금할 돈이라도 있어야 마음편히 다닐 수 있는 곳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패를 하거나 형편이 어려워지거나 하면 계속 다니기가 어려운 뭔가 그러한 분위기가 교회에 있다는 것이지요. 큰 수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한 번 고민하고 반성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실패를 해도 그만두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지 않고 계속 남아서 다닐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다니고 싶은 교회, 좀 괜찮은 사람뿐 아니라 덜 괜찮은 사람들도 마음편히 올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이 고민을 깊이 해야 합니다. 이 고민을 하고 숙제를 풀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정말 하나된 교회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켜 주소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두 번째로 하신 기도는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기도였습니다. 15, 17절을 봅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5, 17)

 

제가 없더라도 이들을 제발 지켜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풀어 쓰자면 이런 기도입니다. ‘아버지 제가 드리는 기도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계속 찾아오고 또 유혹과 핍박이 있는 세상에서 저들을 쏙 빼내서 그런 어려움이 없는 곳으로 옮겨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대로 두시되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답시고 세상과 담쌓고 오로지 불철주야 교회에만 붙어 살면서 교회 사람들만 만나거나 주님 일만 한답시고 전도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 일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그러다가 신앙으로 인해 핍박도 받고 유혹도 받아가면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지만 악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달리 말하면 섞여 살되 표가 나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만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입각해서 보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 신앙생활이고 거기에는 세상살이도 포함됩니다. 예배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생활, 가정생활, 친구관계, 인간관계, 물질관계, 모두가 신앙생활입니다.

세상에서 살되 악에 빠지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비결은 진리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장 교회 다울 때는 돈많은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을 때입니다. 교회가 가장 교회 다울 때는 성공한 사람을 많이 배출할 때가 아닙니다. 실패한 사람이 아무 거리낌없이 찾아올 수 있을 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언제 가장 아름다우냐? 진리를 몸에 익혀 살아갈 때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바란다하면서 세상의 것으로 칠갑을 하려 들고 또 세상 것을 좀 더 가진 것을 자랑하며 산다면 그보다 추한 모습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 말뿐인 진리여서는 곤란합니다. 예수가 진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으니까 우리가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냐라는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원합니다. 주님도 열매 있는 삶을 명하셨습니다. 삶으로 너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된 자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교회는 점점 더 세상으로부터 외면받고 더나아가서는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번 사태로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신천지와 똑같다, 아니 더한 곳이라고 말을 합니다. 지식을 죽어도 교회에 보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세상은 이런 분위기가 일반적인 세상입니다.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도 더 생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요? 믿음 저버리면 벌받는다, 저주받는다, 협박을 할까요? 예전에는 그렇게 말하는 목회자들도 많았고 또 그 시절에는 통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진리라야 합니다. 진리위에 서는 길밖에 없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의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맞는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실천적으로 살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직하는 겁니다. 더 큰 복을 받기 위해서나 아니면 교회 데려올 목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조건없이 남을 도와주는 삶을 사는 겁니다. 청년시절 쌀 부대를 가지고 도와주러 갔더니 교회에서 쌀 한 포 주고는 날마다 찾아와서 교회 가지고 압력을 준다면서 차라리 안 받고 말지라며 거절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성당에서 주는 것은 받더군요. 그리고 성당 다니지 않던 사람인데 지금은 성당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주님처럼 이제는 교회도 조건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 속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도를 전하는 ‘전도(傳道)’가 아니겠습니까? 내 땅값, 내 집값만 많이 오르면 된다는 식, 내 자식만 좋은 직장 다니고 돈 많이 벌고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기복신앙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평생 박봉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주변에 많고, 십년 이십 년 모아도 집한 채 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어찌되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내 집값만 오르면 되고 내땅값만 오르면 된다는 식은 너무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과연 그런 그리스도인을 보고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의 기도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의 형편에 공감할 수 있는 기도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좀 더 공평하게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큰 수레가 되는 신앙으로 가는 것이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입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기사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자기 친척 중에 예수믿는데, 정말 이기적으로 자기밖에 모른다, 친구 중에, 직장 동료 중에, 저마다 자기가 만난 기독교인에 대한 불편했던 경험들을 언급해 가면서 비판을 봇물처럼 쏟아내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닌데, 기독교인들 욕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서 거래처 사장님 부부 이야기를 해놨습니다. 거래처 사장님 부부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인데, 자기들 납품한 물건에 조금 하자가 있어도 지금까지 한번도 물건 들고와서 험한 소리를 하거나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거래처는 난리가 난다는 거지요. 그리고 물건 납품하러 가면 항상 친절히 맞아주고 뭐라도 대접을 해준다는 겁니다. 십수년동안 한결같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다니는 표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거기 들락날락하면서 다 알지요. 거래처 사장님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싸잡아서 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진리를 가진 자의 모습이고 진리를 좇아살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이제는 말로 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정말 묵묵히 삶으로 행동으로 인격으로 섬김으로 조건없는 베품으로 우리가 가진 믿음을 입증해야할 시대입니다. 지금 정신차리지 않으면 앞으로는 전도될 사람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교회를 떠나갈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

 

 

더 이상 용꿈을 꾸지 마십시오. 예수 믿고 나 혼자 복받고 성공하고 출세하려는 용꿈을 이제 버립시다. 진리로 내가 조금이라도 예수를 더 닮고, 교회가 진리의 힘 외에 어떤 힘도 의지하지 않기를 결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진리의 등불로 세상을 밝히는 교회와 성도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이 꿈을 다시 꾸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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