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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신가 1 : 말씀이자 이치가 되시는 분
2022.03.29 18:28
제목 | 말씀이자 이치가 되시는 분 |
---|---|
본문 | 요한복음 1:1(신약 142) |
날짜 | 2022-03-27 |
설교자 | 전용표 목사 |
예수는 누구신가 1
성경 : 요한복음 1:1(신약 142)
제목 : 말씀과 이치가 되시는 분
1853년에 태어나서 1890년 서른일곱 이른 나이에 죽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살았을 때는 그의 그림이 기존에 방식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동생 테오가 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면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그림을 비로소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로 재평가하였습니다.
태음희성(太音希聲)이란 말이 있습니다. 너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큰 소리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속도인 초속 30km, 마하 90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속도에서 나는 굉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너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너무 큰 것보 보이지 않는 법이고 너무 위대한 것도 당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당대 사람들 뿐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은 진리를 들을 귀가 없고 진리를 볼 눈이 어둡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서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라고 말입니다.
오늘부터 부활절까지는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이치의 결정체 예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요한복음 1장 1절은 창세기 1장 1절과 버금가는 대선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자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곧 예수님을 말하는데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중요합니다. ‘말씀’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로고스(Logos)인데 로고스라는 말의 뿌리 뜻은 ‘이치, 원리, 도, 진리’입니다. 1887년 처음 한글성경이 번역되어 나왔을 때는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하지 않고 ‘도’라고 번역해서 ‘태초에 도가 있으되 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니 도가 곧 하나님이라’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에도 마가복음 2장 2절과 사도행전 8장 21절 고린도전서 1장 18절, 히브리서 6장 1절 등에서는 로고스를 ‘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함께’가 프로스(pros)인데 이 프로스라는 단어는 원뜻이 ‘향하여’입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이치, 도, 진리가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맞아떨어진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남이 없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로고스를 이치나 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 우주삼라만상에 부여하신 이치와 도가 있었다는 겁니다. 가령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대표적인 창조의 이치이지요.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도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입니다. 대개 나무 따로 인간 따로 떨어트려 생각하지만 나무와 인간이 따로가 아닙니다. 나무가 사라지면 산소가 사라져 인간이 살 수 없게 되기에 나무와 인간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것도 창조의 이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이치와 도, 원리, 이런 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알 수 없을 때 누구를 보면 알게 되느냐? 예수님을 보면 알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길을 모르겠다? 예수님을 보면 길을 알게 된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요 14:6), 이 말씀을 예수 믿어야 하나님 계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는데, 더 깊은 의미는 우리 인간이 믿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이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그 예수를 믿고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 곧 하나님 뜻에 맞게 사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예수를 넘어서 살아야 할 예수까지 담고 있는 말씀인 것이지요.
예전에 서점가에서 <최고 경영자 예수>, <예수의 리더십>같은 책들이 인기리에 팔렸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성공의 길이 보인다는 식의 책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어떤 원리, 이치, 비결이나 길을 찾기는 찾는데, 어떤 길을 찾느냐? 돈 되는 길, 성공하는 길을 찾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책을 보면서 ‘예수님은 성공의 원리를 보여주신 분이 아닌데, 참 희한한 관점으로 예수님을 본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 덕에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르는 것도 일종의 예수 믿는 것을 성공의 원리, 성공의 이치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는 내가 참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 없이 참 인간 되는 길 없고, 예수 없이 하나님 뜻에 맞게 사는 길 없으며, 예수 없이 사람이 육적 생명을 넘어 영적 생명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2. 죽어야 사는 이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조의 이치의 결정체라고 하였는데, 그럼 어떤 이치를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이 보이신 최고의 이치는 죽어야 사는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밀에 빗대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밀이 싹을 틔우면서 온 몸이 터지는 아픔을 겪고 또 새로 난 싹에게 자기 몸을 영양분으로 공급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산화하면 그 밀이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몸을 찢고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음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원리도 영적인 원리도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요 3:6), 거듭나기 위해서도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길이 없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내 욕심대로, 내 주장대로, 내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육이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 뜻을 기뻐하고 하나님 뜻에 맞게 살려는 영이 예수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1) 자기 자신에 대해 죽어야
이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적용할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죽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적용하면 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죽어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방학 때 계획대로 못했다고 막 자책합니다. 방학 때 책을 몇 권 읽고 영어 공부를 하루에 몇 시간 하고, 잠은 몇 시에 자서 몇 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그대로 못했다는 겁니다. 그 청년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다 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 착각하는 겁니다. 그거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계획 세우는 것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계획을 세울 줄 안다고 그것을 행할 능력까지 있는 줄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이 자책하면서 스스로 불행 속에 가두는 이유는 자기가 그것을 행할 능력이 되는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적어도 부모님에게 이렇게 했어야 됐는데, 내가 그 일을 이렇게 처리했어야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자기반성은 해야겠지만 건전한 자기반성은 미래로 나가지 후회와 자책으로 가지 않습니다. 자기반성과 자책을 혼돈하는 겁니다. 완벽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주의는 자기가 절대로 완벽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한 완벽주의자는 평안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내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생각보다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딱, 인정하고 나면 거기서부터 후회가 아닌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라고 하셨는데 너무 부풀려서 과도하게 맹세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예라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에 대해 죽어야
다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죽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대제사장 무리가 이런저런 말로 예수님을 고발할 때 예수님이 입을 열어 반박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빌라도가 신기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마 26:62) 그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치는 자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제사장의 탈을 썼지만 속으로는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돈에 눈먼 사람들이고 겉으로는 하나님 영광을 말하나 실은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임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만 그 추한 자들이 뒤집어씌우는 말을 그토록 내뱉는데도 침묵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게 십자가 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한다는 것이 귀에 들어오면 잠이 안 오잖아요? 참기 힘들지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 단체로 관광을 다니다 보면 가이드가 꼭 물건 파는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들어보면 저거 먹으면 못 고칠 병이 없을 것 같고, 무병장수할 것처럼 말을 하고 지금 안 사면 안 될 것처럼 말을 합니다. 친구 목사님 중에는 가는 곳마다 다 사는 분이 있습니다. 카드로 긁고 없으면 빌려서라도 삽니다. 사놓고는 다 먹느냐? 다 먹지도 않습니다. 버리는 것이 반 이상입니다. 그런데 다음에 관광 가면 또 삽니다. 아무리 팔려고 해도 내가 안 사면 그만입니다. 같이 길 가던 사람이 과자를 먹는데 맛있는 과자는 자기 혼자 다 먹고 과자봉지 쓰레기를 자꾸 내 손에 쥐어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쓰레기인줄 알았으면 안 받으면 됩니다. 받아놓고 기분 나쁘다고 투덜대는 것은 내 잘못입니다. 그 사람이 내 욕을 하는 것까지는 그 사람의 인격 문제고 그 사람 잘못입니다만 그 말을 받아서 거기에 휘둘리고 또 맞서 싸우면서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내 어리석음입니다. 거기서 반응하는 내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예, 그게 신앙의 훈련이고 경건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많이 오해합니다. 은혜받아서 저절로 되기를 바라는데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알았으면 말씀대로 내 마음을 훈련하고 다스려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반드시 연습이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합니다.
의견이 갈릴 때도 그렇습니다. 거기서 좀 죽으세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방법대로 하자면 당신이 죽어야 하는데도 ‘그런 방법은 나는 따를 수 없다’라고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때 예수님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인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 의견대로 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줄 압니다. 양보하면 내가 바보 되는 줄 알고요.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나아가 모두가 사는 길이고요. 제 이야기라 조심스럽습니다만 노회에 가면 상비부서가 있고 그 중에 정치부 고시부는 사람들이 서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부서입니다. 제가 거기 들어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상비부 조직을 짜는 자리에 있기도 했지만 다 양보하고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서의 부장 자리를 맡을 기회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것도 그때마다 양보했습니다. 이번 노회에서 제가 부노회장이 될 순서였는데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그분더러 하시라고 또 양보했습니다. 그 자리가 서로 하겠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는 자리이고 지난 번 노회 지지난번 노회 때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기에 기쁜 마음으로 양보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번번이 다 양보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양보할 수 있느냐’며 인사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 칭찬하는 인사도 겉으로는 받았지만 마음으로는 받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자리에 마음이 없었고 그러기에 양보가 대단한 일이라고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내 의견이 거절되거나 나보다 저 사람이 먼저 자리를 하면 ‘내가 저보다 못한 게 뭔데, 내가 왜 져줘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이미 스스로 진 것입니다. 내 의견이 부결되었다고 내가 바보인 것도 아니고 저 사람이 나보다 먼저 자리를 한다든지 뭘 맡는다든지 한다 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전부 껍데기를 알맹이로 착각하는 마음입니다. 그 껍데기에 목숨 거는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그 못난 마음을 못 박아야 내가 진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당신의 뜻을 꺾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앞에 내 의견대로 되지 않았다고 기분 나쁜 모습으로 가서 기도하고 예배한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우스깡스러운 코미디입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것에 죽을 필요 없습니다. 거창한 일에 죽어야 할 일도 많지 않고요. 그저 작은 일에 죽으면 됩니다.
맺는 말
요한일서에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셨습니다.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 죽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입니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에 죽는 것이 예수의 도를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치를 좋아 내 인생을 생명의 기운으로 넘실거리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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