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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본문 다니엘 5:1~12(구약 1239) 
날짜 2021-08-15 
설교자 전용표 목사 

다니엘서 강해 6

성경 : 다니엘 5:1~12(구약 1239)

제목 :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얼마 전 기사를 보니까 범고래가 상어를 사냥해서 간만 빼먹고 버린다고 하더군요. 그걸 보고 범고래가 참 잔인하다 생각했습니다만 생각해보니 인간도 그러고 있더군요. 인간도 상어를 잡아서 요리의 재료인 지느러미만 칼로 자르고 지느러미가 잘려 헤엄을 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상어는 산 채로 바다에 버리지요. 범고래는 그래도 상어의 간을 빼먹어서 상어가 죽기라도 하지 사람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상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립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이 조금 더 잔인합니다. 원하는 것을 취하고 나면 다른 것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 이것이 인간의 잔인한 속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속성은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주님은 당신의 살을 내어주시면서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먹고 싶은 부분만 먹고 나머지는 버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 내가 좋아하는 맛만 취하고 말입니다. 다 받아먹어야 건강해지는데 영적인 편식이 심합니다. 이에 대해 오래전 이용도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사람의 예수,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희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하라!” 1930년에 하신 설교인데 지금 들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자기 중심적 신앙을 통렬히 꾸짖는 듯합니다. 바울은 말세에는 사람들의 자기 사랑이 극심해 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는데(딤후 3:2)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극심한 자기사랑병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주님이 주신 살을 편식없이 먹는 영적식욕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벨론에 벨사살이란 왕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이라고 나오는데 실은 느부갓네살의 친아들은 아닙니다.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사이에는 1~4년 정도 짧게 통치한 왕들이 네 명(에윌 므로닥, 네리글리살, 라바쉬 마르둑, 나보니두스)이 더 있습니다. 여기서 부친이라는 말은 친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라 윗대, 선대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나 당시 그 근방 지역에서는 꼭 친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더라도 부친,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중간에 몇 대를 건너뛰어도 부친,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부 기독교인 중에는 지구와 인류의 역사가 6천 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째서 6천 년이냐? 천지창조로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족보를 다 더해보니까 4천 년이고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2천 년이니까 합이 6천 년이라는 계산에서입니다. 이것은 17세기 아일랜드의 대주교 앗셔(1581~1656)라는 사람이 성경 족보를 다 더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주전 4004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을 세대주의자들이 받아들여서 퍼트린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성경의 기록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성경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도 누가 누구를 낳고라고 표현하지만 할아버지와 손자, 심지어 여러 대를 건너뛰어도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경 족보는 모든 대를 빠짐 없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생략된 대가 많고 기록하지 않고 건너뛴 세대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걸 마치 인류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한 것처럼 생각해서 그것을 더해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연대가 주전 4004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유치원 수준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과학과도 너무 맞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인류역사가 6천 년이다라는 식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신에 가깝다고 조롱을 받고 욕을 들어먹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벨사살은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천 명 앞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금은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거기에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그리고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기고만장(氣高萬丈)라는 말이 있지요. 기세가 만장 높이만큼 높이 뻗어있다는 뜻인데 한 장이 삼 미터이니까 만 장은 삼만 미터입니다.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감히 하나님 섬기는데 쓰던 그릇에다 술을 부어 마시다니요.

 그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벽에다 글씨를 쓰는데 벨사살 왕은 그것을 보고는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면서 사색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글씨인지 알고자 술객과 술사 점쟁이를 불러 물어보았으나 아는 이가 없어 번민이 깊어만 가는데 왕비가 와서 다니엘을 추천하였습니다. 당시 다니엘은 나이가 족히 80이 넘었을 것이고 잊혀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다시 소환되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다니엘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벨사살이 다니엘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써가며 칭찬을 한 뒤 글씨를 해석해 주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고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합니다. 자주색 옷은 왕이 입는 곤룡포로 자주색 옷을 입힌다는 것은 왕이 누리는 권세를 누리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일언지하 거절합니다. 믿음의 지조가 있는 사람은 좋은 것이라고 가리지 않고 넙죽넙죽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서는 거절할 줄 아는 것이지요.

 

 

 

1. 타산지석의 지혜를 가지라

 

 

 벨사살의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도 다니엘은 역시나 거침없이 말을 하는데 먼저는 벨사살 왕의 오만방자함을 지적합니다. 18~23절까지인데 22~23절만 읽습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2~23)

 

 벨사살 왕의 교만을 향한 다니엘의 지적은 통렬합니다. 앞에 18~21절을 보면 선대 왕인 느부갓네살이 교만하게 굴다가 쫓겨나서 짐승처럼 살았던 일을 이야기를 쭉 하고 난 뒤 선대 왕이 그러한 일을 겪은 것을 다 알면서도 어째서 마음을 낮추지 않고 하늘 끝까지 교만을 떨고 있느냐고 지저한 것이지요.

 왕이라고 다 같은 왕이 아닙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에서는 전설적인 왕입니다. 그런 왕도 교만하다가 쫓겨나서 짐승처럼 사는 것을 보았다면 후대 왕들은 더욱 조심하는 것이 맞지만 벨사살은 감히 하나님 성전의 그릇들을 가져다가 보란 듯이 술을 따라 마시면서 자기 권세를 과시했단 말이지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잠 16:18)이 되는 이유가 교만은 만족이 없고 그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치욕을 당하고 나서야, 위태로운 일을 겪고 나서야 멈춥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기도 하지만 교만의 반대는 만족할 줄 아는 것이고 그칠 줄 아는 것입니다.

 선대 왕이 교만 떨다가 큰 곤욕을 치루는 것을 보고도 똑같이 따라 한다고 꾸짖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줬더니만 이걸 먹는데 서툴러서 손에도 묻히고 얼굴에도 묻히고 엉망이 됐습니다. 서로가 쳐다보면서 깔깔 웃습니다. 자기 얼굴은 괜찮은 줄 알고 쟤는 얼굴에 묻혀서 엉망이라고 웃습니다. 지혜가 생기면 저 아이의 엉망인 얼굴을 보면서 혹시 나도 얼굴이 엉망이지 않을까 하고 거울을 보며 내 얼굴을 살피겠지요. 이런 것을 ‘저 산의 거친 돌을 숫돌 삼아 내 산에 돌을 갈아 옥을 만든다’는 뜻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실수하거나 잘못을 하면 그것을 지적하고 험담하기 바쁘지 혹시 나에게는 저런 것이 없는가 하고 자기를 살피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저 사람 것은 잘못이지만 내 것은 실수라고 합니다. 저 사람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나는 이해받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합리화시키면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害)가 됩니다. 고쳐야 넘어지지 않는데 그런 식으로 넘어가니까 결국 나중에 크게 넘어질 일이 찾아오고야 만단 말이지요.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이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을 비난하라는 뜻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항상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타산지석의 지혜가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금은보다 하나님 영광을

 

 

 다니엘의 질책을 보십시오. ‘어째서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까?’ 벨사살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금덩어리를 쌓아놓고 은덩어리를 쌓아놓아도 그것이 보기를 합니까, 듣기를 합니까? 멍텅구리에 불과한데도 금은을 좋아하고 금은이 달린 문제는 사생결단하듯 하면서 정작 내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무관심하고 등한시할 때가 많습니다. 돈이 걸리고 내 체면이 걸린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닌 것처럼 넘어간단 말입니다.

느헤미야를 보면 고국의 수도 예루살렘 성이 불탄 채로 방치되어 있고 남아 있는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일 동안 슬피 울면서 먹지도 않고 비통하게 기도하였습니다(느 1:4). 연대를 계산해보면 느헤미야는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 온 사람에게서 태어난 포로민 2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태어나지도 자라나지도 않은 곳이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주민들 소식을 듣고 비통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의 위상이 무너져 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진 이 시대상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내 일처럼 여기고 있습니까? 이것을 내 잘못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습관적으로 누군가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요? 이제는 좀 달라져야겠습니다. 또 어느 기독교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더라는 뉴스를 들을 때 무관심이나 그 사람을 향한 정죄로 일관하지 말고 마치 내가 죄를 지은 것처럼, 내가 욕을 듣는 것처럼 반응을 해야겠습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이라도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고 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진지라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영광을 더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3.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여기까지 말한 다음 다니엘은 비로소 벽에 쓰인 글씨를 해석합니다. 25~28절을 봅니다.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25~28)

 

 메네는 숫자를 센다는 말입니다. “자, 저기 사과 쌓아놓은 것 보이지요. 저걸 상자에 20개씩 세서 담으세요, 저거 다 담으면 오늘 일 끝입니다.” 그 말을 듣고 20개씩 세서 열심히 담습니다. 그런데 한 열 박스 담으니까 더 담을 것이 없습니다. “더 없습니까?”라고 했더니 “올해는 흉작이어서 그것밖에 수확한 것이 없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하나님이 세 보시니까 벨사살의 인생이라는 것이 셀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메네가 그 뜻입니다. 벌써 다 세신 바 되었다!

 데겔은 저울에 달다는 뜻입니다. 한쪽에는 무게를 달 물건을 올리고 한쪽에는 저울추를 올려서 무게를 알아내지요. 하나님께서 저울 한쪽에 벨사살을 올려놓고 다른 쪽에 저울추를 올리시니까 저울추가 너무 무거워서 쑥 기웁니다. 조금 그것보다 조금 가벼운 저울추를 올렸습니다. 그래도 저울추 쪽으로 기울어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가벼운 저울추를 올렸습니다.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제일 작은 저울추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겁니다. 저울추 쪽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고 했더니 그래도 벨사살쪽으로 조금도 기울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나간다, 안 나간다? 안 나갑니다는 겁니다.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데겔이 그 뜻입니다. 저울에 달아보니 미달도 한참 미달이더라!

 우바르신에서 우는 ‘그리고’내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바르신는 ‘찌어버리다, 쪼개다, 나누다’라는 뜻입니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쌓아놓은 목재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씁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쓸모가 없는 나무이겠지요? 그 나무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저기 ‘땜빵용’으로 쪼개 쓰든지 아니면 토막을 내서 추운 날씨에 땔감으로 쓰든지 하겠지요. 바르신이 그 뜻입니다. 쓸모가 없으니 쪼개버린다! 여기서는 벨사살의 왕위와 나아가 바벨론 나라를 하나님이 거두어서 다른 사람과 다른 나라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어디 하나님이 벨사살의 인생만 세시고 달아보시겠습니까? 모든 인생을 세시고 달아보십니다. ‘내가 너에게 얼마의 시간을 주었는데 너는 너를 위해서 쓴 시간은 용량초과이고 남을 위해서 쓴 시간은 미달이고, 나를 위해 쓴 시간은 한참 미달이더구나!’, ‘내가 너에게 얼마의 재능과 에너지를 주었는데 너는 너를 위해서 쓴 것은 달아보니까 이 또한 용량 초과이고 남을 위해서 쓴 것은 미달이고 나를 위해서 쓴 것은 한참 미달이더구나! 내가 너의 주님이었던 것이 맞느냐?’, ‘내가 너 평생에 얼마의 물질을 주었는데 너를 위해서 쓴 것은 용량초과에 초과이고 남을 위해서 쓴 것은 미달이고 나를 위해 쓴 것도 미달이더구나! 너는 평생 나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마는 나는 너에게 진정 무엇이었더냐?’이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맺는 말

 

 

 주님은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라도 주신다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나 달아 보실 때에 주님 저울에 남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더해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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