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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 22 임금이 친구 삼고 싶은 사람
2021.07.08 11:29
제목 | 임금이 친구 삼고 싶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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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잠언 22:1~11(구약 935) |
날짜 | 2021-06-27 |
설교자 | 전용표 목사 |
주님과 동행 22
성경 : 잠언 22:1~11(구약 935)
제목 : 임금이 친구 삼고 싶은 사람
조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과 정조는 좋은 인재를 두루 등용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명문세가들이 판을 치던 시절 집안 배경이 없더라도 유능하면 자리를 잡아 활약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정조도 규장각이라는 오늘날 학문연구소와 같은 것을 만들어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썼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이 규장각 출신의 인재였습니다. 좋은 왕들은 인재를 가까이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오늘은 솔로몬의 잠언 모음집인 잠언 10~22장 16절 중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는 날입니다. 참 길고도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잠언은 혼자서 읽을 때는 재미나지만 단락을 정하고 문맥을 파악해서 설교를 하는 데는 어렵습니다. 오늘로 잠언은 마무리하고 다른 본문으로 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중 마지막 11절이 임금이 친구로 삼는 사람에 관한 말씀입니다. 11절을 한 번 봅시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11)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임금은 일차적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이 땅의 왕을 의미하지만 좀 더 의미를 확대한다면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하나님이 친구 삼아주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재물보다 이름을 택하는 사람이라야
먼저 1절을 읽겠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한쪽에는 10억이 든 통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칠곡을 빛낸 사람들’이라고 영남일보에 한달동안 나에 대해서 특집연재가 실리는 일이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돈 10억을 택하는 사람이 더 많으리라 봅니다. 저도 몇천만 원 정도면 고민 없이 신문에 실리는 편을 택하겠지만 10억이라면 돈을 택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명예보다는 돈이지요. 어느 정도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명예를 챙깁니다. 그래서 돈은 안 되더라도 명예가 따르는 자리를 맡는다든지 기부나 봉사를 한다든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통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그렇게 좋게는 보지 않는데 여기서는 명예를 택하라고 하니 좀 의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명예는 그런 명예가 아닙니다. 원문에는 그냥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재물을 선택하기보다는 네 이름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뉘앙스의 말씀입니다. ‘야, 사람들에게 욕먹을 정도로 돈 밝히지 말아라, 돈 몇 푼 손에 더 쥐는 것보다는 네 이름이 욕먹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알았냐?’ 느낌이 좀 옵니까? 뒤에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도 앞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라는 같은 의미입니다. 표현만 달리 했을 뿐입니다. 은총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사랑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어서 사랑으로 번역을 하면 좀 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사람들에게 욕들어 가며 은금을 밝히는 것보다 좀 덜 가지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는 편이 더 낫다.’ 이것도 느낌이 좀 오지요?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중국 반도체 회사나 배 만드는 회사로 갔던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수년 전 중국이 우리나라 반도체와 조선업을 따라잡으려고 많은 돈을 주고 우리나라 전문가, 기술자들을 빼내 갔던 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핵심 기술을 빼내서 중국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회사들이 이 사람들 단물만 빼먹고는 이제 토사구팽 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국내기업에 들어가고 싶어도 받아주겠습니까? 돈은 조금 벌었을지 몰라도 그 사람들은 평생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욕먹어 가며 돈 좇아가는 것은 마귀에게 영혼을 파는 것과 같은 일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려면 돈 몇 푼 손에 더 쥐려고 욕먹는 일은 적어도 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인색하면 욕먹습니다. 챙겨줄 때 확실히 챙겨주고, 깎아줄 때는 확실히 깎아주고, 선심 쓸 때는 상대가 감동할 정도로 쓰십시오. ‘저 사람 예수 믿는다면서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아!’이 말은 ‘저 사람 예수 믿는다면서 거짓말을 해도 너무 잘 해!’나 ‘저 사람 교회 다닌다면서 너무 음란해!’와 동급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한 방울의 피까지 아낌없이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동네에서나 회사에서나 인심 사납다는 말은 결코 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하셨습니다(행 20:35). 되도록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생활입니다. 4절 보십시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면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명예도 주시고 풍성한 생명도 주십니다. 여러분의 이름에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가 붙어다닙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욕먹도록 살면 주님 이름도 덩달아 욕먹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명예를 지킨 것을 가지고 서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날에 우리가 지켜낸 그리스도인의 명예를 가슴에 달고 떳떳히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균형이 있어야
2절을 읽겠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2)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섞여 살아갑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제일 못사는 측에 속하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못사는 나라인데도 부자들은 엄청나게 잘 살더군요. 으리으리한 저택과 엄청난 농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로가 전부 울퉁불퉁 엉망인데 페라리 같은 스포츠카를 타고 다닙니다. 어디 달려볼 도로라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섞여 살아갑니다. 생각 같아서는 좀 골고루 나눠서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불가능이지요. 당장 형제끼리도 성공했다고 해서 형제들에게 몇 억씩 나눠주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각자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느 시대이건 어느 나라이건 가난한 사람과 부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섞여 삽니다.
그런데 대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게을러서 가난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도 있겠지만 열심히 살았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부분 서민들은 평생 일만 하다 죽을 정도로 열심히 삽니다. 그래도 항상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날 때부터 부자로 태어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노력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더더군다나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노력하니까 되는데 왜 너는 안 되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니까요.
반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동경하면서도 증오합니다. 부자가 부럽지요. 그러면서도 이유 없이 부자를 증오하거나 정죄의 눈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저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겠어? 뭔가가 있었겠지!’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땀 흘려서 된 부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라고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도 들어가면 집안 문제, 자식 문제, 건강 문제 있을 건 다 있습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일 뿐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가진 왜곡되고 어리석은 마음 중에 편견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뭔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나도 힘들게 만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게 편견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려면 자꾸 뭔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다 알지도 못하면서 내 입장에서 다 평가하고 판단해서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딱 정리를 해 버립니다. 그것이 편견으로 굳어지지요. 참 피곤한 일이고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일입니다. 가급적이면 섣불리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섞여 사는데 둘 다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십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데 그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만드셨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곧 그를 만드신 이를 업신여기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를 이유 없이 증오하고 미워하는데 그 부자를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편견은 곧 누구를 미워하는 일이냐 하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겠습니까? 평생 다른 사람들을 향해 판단과 편견을 일삼은 사람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제가 주님을 평생 믿고 살았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너는 평생 나를 미워하며 살더구나’라고 답하실 겁니다. 섣불리 판단하고 평가하는 습관을 이제는 좀 내려놓고 사십시오. 그러면 평정심(平靜心)이 찾아옵니다. 작은 세수대야에 돌맹이 집어던지면 세수대야 안에 폭탄이 터지지요. 그러나 큰 호수에 돌맹이 집어던져 봤자 퐁당하고 맙니다. 평탄한 인생길은 달리 있지 않고 평정한 마음으로 사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잠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혜입니다.
3. 마음이 청결해야
11절을 읽겠습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11)
조카를 좇아내고 죽인 세조 같은 이는 한명회 같은 간신배를 가까이 했고 세종 같은 이는 나중에 죽음으로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던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같은 이들을 가까이 했습니다. 욕심이 많고 권력욕이 많았던 군주들은 주로 야비한 모략가를 친구로 삼았지만 어진 군주들은 사욕을 부리지 않고 뜻이 바른 사람을 가까이하였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임금은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 입술에 덕이 있는 자를 친구로 삼는 임금이니까 악한 군주가 아닌 어진 군주입니다. 어진 군주가 친구 삼는 사람은 마음이 정결을 사모하고 입술에 덕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마음이 정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거짓됨이 없고 두 마음 품은 것이 없으며, 미움, 증오, 음욕, 탐욕 이런 것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니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떻겠습니까? 거칠거나 날카롭지 않습니다. 거짓되거나 야하지 않습니다. 탐욕이 없습니다. 험담이나 중상모략이 없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나옵니다. 따뜻하고 사랑이 있고 격려하고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니 어진 임금이 그런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요. 어진 임금만 좋아하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다 좋아하겠지요. 하나님도 좋아하십니다. 말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람이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고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고 하셨습니다(마 12:35). 그 사람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내 입에서 자꾸 누굴 험담하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지금 내 마음이 정결하지 않은 겁니다. 미움이 있는 겁니다. 야한 말이 자꾸 나온다? 마음에 음욕이 있는 겁니다. 돈 이야기만 한다? 마음이 돈 욕심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말을 잘하려는 노력이나 말을 관리하려는 노력 이전에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사랑받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이자 하나님의 벗이 되는 길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하셨고(삼상 16:7)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 5:8).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찾고 쓰십니다. 사람이 능력이 부족해도 능력은 주님께 있으니 그것으로 됩니다만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주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종교개혁의 횃불로 타올랐던 루터는 원래 가톨릭 수도원의 수사였습니다. 얼마나 죄에 대해 고민하고 민감한지 그 추운 겨울 수도원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금식하면서 괴로워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실로 달려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고해성사를 하고 나와서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뛰어가서 고해성사를 또 합니다. 오죽하면 담당 사제가 “제발 나가서 제대로 된 죄를 짓거들랑 오고, 이런 시시콜콜한 것을 죄라고 가져오지 말라!”고 돌려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루터는 죄에 대해 강박적으로 민감했고 마음의 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타락을 참을 수가 없었고 그런 루터를 하나님은 유럽을 천년의 깊은 잠을 깨우는 위대한 인물로 사용하셨습니다.
맺는 말
그저 교회 다니는 것으로 됐겠거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친구하자고 찾아오실 정도의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이름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온갖 편견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무엇보다 마음을 정결하게 닦아서 주님이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으로 주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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