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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본문 마태복음 27:62~28:6(신약 51) 
날짜 2021-04-04 
설교자 전용표 목사 

2021 부활절

성경 : 마태복음 27:62~28:6(신약 51)

제목 :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께서는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유월절만찬을 나누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잡히셨습니다.

밤이 새도록 대제사장과 빌라도, 헤롯에게로 옮겨다니면서 모진 고문을 받고, 조롱을 당하신 후 이미 초죽음 상태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금요일 오전 9시 경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여섯 시간 동안 극도의 고통에 드셨다가 오후 3시 경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성스럽게 염을 한 뒤 바위를 뚫어 만든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에다 안장을 하였고 입구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돌로 막았습니다.

 

 

 

헛되이 지키는 자들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일등 공신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또 다시 빌라도에게 몰려가 예수의 시신을 안치해놓은 무덤에 경비병들을 두어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하는 말을 들어볼까요? 63, 64절을 읽습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3, 64)

 

 예수께서 죽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이들이 알고는 혹시 제자들이 몰래

예수님 시신을 빼돌리고는 살아났다고 거짓말을 퍼트려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으니 삼일 동안 경비병을 세워서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에게도 경비병이 있으니 그 병력을 이용해서 무덤을 지키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성전을 지키는 성전경비병들이 있었는데 그 병력을 쓰라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로마 군인들이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들 부하인 성전경비병으로 지키는 편이 더 믿을만 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성전경비병들이 예수님 무덤을 삼엄하게 지키게 됩니다.

 이들이 간과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서 예수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겁쟁이들입니다. 예수님 시신을 빼돌린 다음 세상을 상대로 종교사기를 칠 정도의 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을 간과했습니다. 이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당연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다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조작할 것이 두려워 그것을 철저히

틀어막고자 애를 썼는데,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경비병을 동원해서 겹겹이 지켜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즉 안식후 첫날, 예수님이 죽고 삼일 째 되는 날,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 무덤에 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두려워 떨면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아무리 지키고 지켜도 부활의 새벽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다

 

 부활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으로 사람이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아무리 철저하게 죽고 망하고 산산히 흩어져도 다시 살아나고 다시 회복되고 다시 모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 24절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구약의 여러 사건들 중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가 망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철저히 망했습니다. 깡그리 무너지고 불타고 죽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도 바벨론 제국 내 여러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두 세대가 바뀌고도 남는 7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기약하신 70년이 차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포로민들의 후예는 자기네 민족의 땅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고,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여러 세대가 흘렀음에도 안정적인 터전을 버리고 조상들의 땅에 가서 나라를 재건하겠다고 나선 자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있으면 흩어졌던 마른 뼈들이 모이고 붙어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되자 대제사장들이 세워두었던 자기네 경비병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최악의 상황은 최고의 역사를 위한 배경설정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악인이 승리하고 진실이 묻히고 의인이 억울하게 패하다가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역전되어서 저 깊이 가라앉았던 진실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하늘을 찌르던 악인의 권세는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며 억울하게 짓밟혔던 자가 승리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어두움이 더 짙어져야 새벽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야 고요한 시간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부활의 소망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부활이 있다

 

 아무리 틀어 막고 지키고 해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가 곧 생명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예수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로마서 8장 1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생명이 있으면 언젠가는 살아납니다. 봄이 되면 완전히 얼어있던 땅이 녹으면서 거기서 싹이 올라옵니다. 앙상하던 가지에 움이 돋고 싹이 틉니다.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어요. 생명이 있으면 아무리 오랜 시간 속에 묻혀 있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2009년 경남 함안에 있는 산성을 발굴하다가 돌처럼 석화된 씨앗 10개가 나왔습니다. 연대를

측정해 보니 700년 전 고려시대의 연꽃씨앗이었습니다. 과연 700년 된 연꽃 씨앗이 싹을 틔울까, 심어봤습니다.

심었더니 놀랍게도 돌처럼 석화된 씨앗이 싹을 틔우고 그림 같은 연꽃이 폈습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 곧 생명의 영이고 살리시는 영이십니다. 이 분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한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다보니 교회를 걱정하는 소리들이 많습니다. 교인 숫자가 줍니다.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교회들이 많다고 합니다. 주일학교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주일학교가 예전처럼 다시 재건될 수 있을까?

만의 하나 예전처럼 회복되지 못한다면 교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이런 걱정들입니다. 저도 이런 걱정들로

어떤 때는 머리가 찌끈 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해 지기도 합니다. 왜냐? 길이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뭡니까?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겁니다.

제가 처음 우리교회 왔을 때 나눴던 말씀 중에 교회는 토양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관 옥상을 청소하면서 보니까 어디서 날아왔는지 흙모래가 조금 쌓인 것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도 풀씨가 날아와 싹을 틔웠더군요. 토양만 있으면 어디서든 풀씨가 날아와 뿌리를 내리는 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진리를 좇아 바르게 가면 목마름과 배고픔을 만난 영혼은 어디서든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관건이고 길입니다. 물론 교인 숫자가 줄면, 재정이 줄면, 주일학교가 줄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도 하면서 대책도 생각하고 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걱정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입니다. 몇 명 모이는가를 자랑하고, 재정이 어떻게 되는가를 자랑하는 외형이나 겉모습에 치중하던 체질에서 벗어나 우리 교회는 정말 예수와 함께 죄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살고자하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빽빽하게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곳에

앉아있다보면 내가 평소에 말씀대로 살았는가와는 상관없이 신앙인이 된 것 같고 믿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합니다. 그것이 군중심리에 의존하는 신앙입니다. 이제 그 군중심리에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나 혼자 있을 때 나는 정말 충분히 그리스도인 다운가, 치열하고 야비하고 거짓된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나는 까마귀가 되는가 백로가 되는가, 이런 것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고민들이고 이런 고민을 더 많이 해야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다워지는 성도들이 하나 둘 더 늘어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여기 반계교회에 빛이 있다, 여기에 길이 있다, 이리로 오라고 하였을 때, 세상 사람들이 그래, 너희가 진짜 예수 닮은 교회인 것

같다, 너희가 하는 말이라면 믿어볼 용의가 있다라고 하면서 거절치 않고 달려오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뭐든지

냉각기가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기계도 오래 돌리면 전원을 끄고 열을 내리는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도 바쁘게만 달려왔다면 잠시 쉬면서 한숨돌릴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코로나가 우리 인류에게 냉각기이고, 지구에도 냉각기이고, 특히 교회에는 더없이 필요한 냉각기입니다. 대나무는 땅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몇 년 간 영양분을 잔뜩 모아두었다가 때가 되면 싹을 틔워서 자리기 시작하는데 하루에 30센티미터에서 심지어 1미터씩 자라는 경우도 있어서 순식간에 10미터 이상까지 자랍니다. 냉각기가 찾아왔을 때, 본질을 붙들고 생명력을 강하게 하면, 냉각기가 끝났을 때 자라는 희열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교회가 추구해야할 부활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교회다워지는 고민과 노력을 기울이면 다시 부활합니다.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나라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 자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일이 없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기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자들에 의해 돌에 맞습니다.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성한 곳이 없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해진 바울을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가져가서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이튿날 더베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거기서 바울이 일어났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가 아나스타스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할 때 쓰인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예수님처럼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같은 이도 수없이 고난을 겪고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런데 다시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의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어느 교회 입구에 박스가 하나 놓여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만 해주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이 있는 사람 사연을 적어서 넣어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도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글 옆에 사진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청년의 사진입니다. 청년은 대뇌 경색이 와서 혼자 힘으로는 움직이는 것도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어려운 중증 환자였습니다. 충분히 비관적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청년은 하나님이 자기에게도 사명을 주셨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자

힘으로 움직이는 것도 남들과 대화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래도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가족에게 부탁해서 기도함을 만들어 남들을 위한 기도의 삶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생에는 내 실수로 넘어지든, 실수와 상관없이 넘어지든 넘어지는 일이 찾아옵니다만 견디면 일어설 날이

찾아옵니다. 어두움도 찾아오고 바람도 붑니다만 어느 찬송가의 고백처럼 어두움을 주시는 이유는 빛을 주시기

위함이고 바람을 주시는 이유는 잔잔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맺는 말

 

 아무리 틀어막고 해도 주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의 능력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무리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갖다 대면서 “봐라 부활하신 주님을 5백 명이 동시에 본 적이 있고, 바울 당대에 그 중에 절반이 살아있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해도 교회로부터 등을 많이 돌린 우리 시대 사람들은 아마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냉소하는 세상을 향해 “봐라, 다른 것은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를 봐라. 내 인생을 봐라. 내 인생이 고난많은 인생임을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넘어졌느냐? 내가 망가진 인생이 되었느냐?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를 붙드셨기 때문이다!

다른 것 보지 말고 와서 내 인생을 보라!”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버텨낸 여러분의 인생을

부활의 증거로 내밀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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