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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 
본문 잠언 1:1~33(구약 911) 
날짜 2021-02-14 
설교자 전용표 목사 

주님과 동행 5

성경 : 잠언 1:1~33(구약 911)

제목 : 세상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라는 책은 지난 600년 동안 전세계 정치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이인 동시에 한쪽에서는 ‘악마의 책’이라는 비판을 받은 책입니다. 그 책의 핵심은 ‘통치자는 사악해야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입니다. 조금 더 보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정의는 사치에 불과한 것으로

통치자는 절대 정의로워서는 안 되고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을 꺼리면 안 된다. 잔인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상대를 가차 없이 제거해서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무슨 이런 나쁜 가르침이 있나 싶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 여러분은 부하직원들에게 좋은 리더라는 평을

듣고 싶습니까, 못된 리더라는 평을 듣고 싶습니까? 아마 대부분 좋은 리더라는 평을 듣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부하직원에게 잘 대해줬더니만 내가 부탁한 일보다는 평소에 자기를 괴롭히고 못되게 구는 상사가 시킨 일을

더 신경 써서 먼저 합니다. 별로 기분이 안 좋아요. ‘내가 너무 잘 해 줬나? 계속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하나, 좀

힘들게도 하고 나를 어렵게 느끼도록 만들어야 하나?’ 고민이 생기지요. 당장 보기에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지혜는 악한 지혜 같지만 현실에서는 더 많이 통합니다. 어떤 것이 세상의 지혜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지혜일까요? 현실로 들어오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설령 안다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선택하는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30장 아굴의 잠언부터 살펴보면서 잠언이 지닌 맛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1장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잠언 잠언 하는데, 잠언이라는 말의 뜻을 먼저 알고 봐야겠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마샬’이라고 하는데, 속담, 격언이라는 뜻입니다. 속담이나 격언은 머리 좋은 한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경험이 응축된 말입니다. 짧습니다. 짧은데 뭔가 번뜩이는 깨우침이 들어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친다는 말이지요. 사고 쳐 놓고 도리어 화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뜨끔하겠지요. 뜨끔하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음부터는 안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뜨끔하지 않으면 또 하겠지요.

이처럼 속담이나 격언은 콕 찌르는 맛이 있습니다. 잠언 성경에도 날카로운 쇠꼬챙이 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10, 11) 얼마나 촌철살인 같은 말씀입니까? 그래서 히브리어 마샬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그냥 속담, 격언이라고 옮기지 않고 잠언(箴言)이라고 옮긴 것은 정말 기가 찬 번역입니다. 잠(箴)자가 바늘, 찌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잠언은 찌르는 말이란 뜻입니다. 좀 뜨끔하고, 정신 차리라고 말이지요. 사람이 언제 바뀝니까?

충격파가 있어야 바뀝니다. 그래서 찔리는 게 있고 뜨끔한 게 있어야 제대로 읽었다 할 수 있습니다.

1장의 짜임새를 보면 1~6절까지는 잠언이 읽는 사람에게 주는 유익이고, 7~9절은 지혜를 얻는 길이고, 10~19절은 악한 자가 달콤하게 꼬시는데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이고, 20~33절은 지혜가 그토록 부르지만 결국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데, 그때 뒤늦게 지혜를 불러보지만 지혜가 외면한다는 내용입니다.

 

 

 

잠언을 읽는 목적

 

 

 

1~6절까지는 잠언이 주는 유익입니다. 3~6절까지 읽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3~6)

 

잠언은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고 하시는데 지혜는 지식과 다르지요. 지식은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하면 생깁니다. 요즘은 다음이나 네이버 검색만 잘해도 지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요? 박사학위 가진 사람이 초등학교 문턱도 못 가본 시골 할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뒤통수 얻어맞은 것 같은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래요.

그런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은 이런 지혜를 주시는데, 그 지혜라는 것이 무엇을 겸비하고 있는 지혜냐면 공의, 정의,

정직을 겸비한 지혜입니다. 공의라고 번역한 ‘미슈파트’는 바르게 재판한다는 뜻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을 정의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정의가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흔히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합니다만 어떤 목사님은 그러시대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거다!’ 얼마나 새겨들어야할 말입니까? 잠언이 말씀하는 지혜가 바로 그런 지혜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겸비한 지혜입니다. 정의는 ‘체데카’인데, 좀 남는 사람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과 소득의 격차가 너무 크면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빈곤감에 소망을 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격차를 가급적 줄이는 것이지요. 그것이 체데카입니다. 우리 말로 공평으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니까 잠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혜는 더 많이 가지는 지혜가 아니라 더 많이 나누는 지혜를 주신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정직을 겸비한 지혜입니다. 정직은 ‘메샤르’라는 말인데 울퉁불퉁한 것을 두들겨서 평평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굽지 않고 똑 바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공만 하면 과정은 다 용서가 되느냐?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과정을 물으십니다. 그래서 잠언을 제대로 읽으면 사람이 꾀가 많아지거나 약싹빨라 지는 것이

아니라 우직해집니다. 뚝배기같아 집니다.

이렇게 해서 잠언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신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속에 단단한 것이 없는 사람, 분명한 주관과 기준이 없어서 이 사람이 이 말 하면 넘어가고 저 사람이 저 말 하면 넘어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잠언 말씀은 그런 사람에게 기준을 마련해서 내면을 견고하게 해 줍니다. 젊은이도 충동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전체를 보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게 해 줍니다.

 

 

 

미련의 초대

 

 

 

10~19절까지는 악한 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0~14절을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게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0~15)

 

악한 자가 유혹하는 것이 뭡니까? 약한 사람을 쳐서 그들의 것을 빼앗자는 겁니다. 육식동물이 사냥감의 숨통을

끊고 가죽과 살을 찢는데 사용하는 이빨이 송곳니입니다. 사람은 이제 그런 먹이활동을 하지도 않는데 송곳니가

있습니다. 과거 원시생활을 하던 흔적이기도 한 이 송곳니가 상징하는 바는 원초적 공격성입니다.

그래서 송곳니를 한자로는 견치(犬齒)라고 합니다. 물어 뜯는 공격성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있는 원초적인 공격성이 주로 누구를 향해 발동됩니까? 기본적으로 나보다 약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약한 사람의 대명사가 셋 있습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이들은 투명인간 취급받는 사람들입니다

(청파교회 김기석목사의 표현).

사람들은 돈이나 지위나 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함부로 대합니다. 겁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구약성경의 핵심이자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모세오경에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해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라,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고 합니다. 그것이 모세오경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약한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는

원리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원초적 공격성은 그런 사람들을 섬기기보다는 함부로 대하는, 사실 그것이 공격입니다만, 함부로 대합니다. 부시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자존심은 쉽게 무시해도 되는 것을 여깁니다. ‘야, 네가 양보해!’그들의 기회를 쉽게 빼앗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힘의 차이를 제빨리 간파해서 태도를 취하고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돈의 힘이든, 자리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힘을 가진 사람이 ‘야, 내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런단 말이지요.

나아가서 ‘야, 내가 너 밀어줄게! 뒤는 내가 받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열심히 한번 해 봐!’라고 해요.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 세상 겁날 것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약자를 못살게 구는 악인이라면

어떻습니까? 쉽게 거절하거나 관계를 끊을 수 있나요? 완전히 관계를 끊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거리를 두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그 사람 통해 떨어지는 갖가지 콩고물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기란 어렵단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선과 악이 명확한데, 현실에 들어오면 온통 회색지대가 됩니다. 해석하기 나름인 세상이

펼쳐집니다. 10~15절을 보면 악한 자가 유혹할 때 주로 쓰는 말이‘우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이거 내 꺼야!’라고 하는 것보다 ‘이거 우리 꺼야!’ 라고 나를 포함시켜 주면 얼마나 고맙고 좋습니까?

따뜻하고 든든함이 느껴지는 말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우리라는 말을 가장 잘 쓰는 곳이 바로 조직세계입니다. 거기서 생겨난 말이지만 그 마력을 알고 지금은 정치인들이 더 자주 쓰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지요. 우리가 남이가,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해결되고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울, 울타리에서 온 말입니다. 악한 사람이라도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 줄 때 뭔가 찜찜해도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안전할 것 같단 말이지요. 동조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동조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뭐라고 합니까?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15,19) 당장은 든든하고 떨어지는 콩고물도 여러 가지인 것 같지만

결국은 생명을 내놓게 되는 일이 생길 것이니 미련 없이 떠나라, 관계를 정리하라, 그럽니다. 여러분, 유혹은 유혹이라고 써 붙여 놓고 오지 않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한 꿀송이처럼 옵니다. 삼손이 드릴라가 주는 꿀 같은 달콤함을 탐하다가 결국 두 눈이 뽑히지 않습니까? 건강 상 단 것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도 단 것을 보면 살짝 흔들린단 말이지요. 살짝 흔들리는 것, 그것이 실은 위험한 겁니다. 악인들이 어떤 달콤한 말이나 제안을 하든지 거기에 살짝 흔들리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귀가 파고듭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넙죽 동의하고 오케이 했다가는 나중에는 단물 쓴물 다 토해낼 일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사람은 이로움이 보이면 이로움에 눈 멀지 말고 의로움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의를 추구하다가 이익을 놓치는 사람더러 미련하다고 하는데, 천만에요.

누가 진정 미련한 사람이냐 하면 이익을 탐하다가 이익도 의도,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옳음을 위해서 당장에 이익을 놓치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회해주시지만, 당장에 이익을 위해서 옳음을 버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적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삼고 어찌하겠다는 겁니까?

의가 없는 이익, 옳음이 없는 이익이 눈에 보일 때, 손에 잡힐 듯 할 때 그게 내 무덤이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혜의 초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갖가지 유혹이 판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더러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20~23절을 봅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0~23)

 

지혜가 어디에서 부릅니까?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 성문 어귀, 성중에서 부릅니다. 성전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곳에서 말씀하십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저마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 자랑하는 말을 들으면 부럽기도 하면서 나도 저렇게 해볼까 하는 유혹도

받는단 말이지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온갖 세상 지혜가 난무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런 곳에 덫도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부릅니다. ‘야, 누구야, 그 말에 넘어가면 안 된다! 저 사람이 말하는 방법은 옳지 못한

방법이다! 야, 저 사람 자랑한다고 기죽지 말아라. 내가 볼 때는 전부 쓰레기통에 들어갈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왁자지껄 떠들 때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잘 듣습니까? 잘 못 듣습니다.

잘 못 듣지요. 그리고 잘 안 듣지요. 그래서 20~21절을 보면 지혜가 조용조용 말합니까,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까?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소리를 높이며, 소리를 지르며,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지혜가

나를 때린다는 의미입니다. 서두에 잠언이란 말의 뜻이 찌르는 말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지요?

하나님의 지혜가 유혹으로 빠져드는 우리를 불러 세우실 때 부드럽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지혜가 부르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막 욕하고 비난합니다.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지혜가 부르는 소리입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 나를 향해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설득하고 호소를 합니다. 왜 그러나 싶은데 알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부르는 소리입니다. 구약의 참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부드럽게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망치를 들고 때려 부수듯 말했습니다. 신하의 아내를 취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한 파렴치한 부자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바로 파렴치한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거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불러 세우는 음성이었습니다.

어떤 저명한 목사님이 그러더군요. “나이도 있고 지위도 있고 하니까 아무도 나를 꾸짖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슬프다!” 꾸짖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모릅니다. 기분 나쁘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지나고 나면 감사한 일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굴까요? 매를 잘 맞는 사람입니다. 책망을 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책망을 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행위의 쓰디쓴 열매를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31).

오늘 말씀의 핵심이 7~9절입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고 8~9절에서는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막연한 관념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아비와 어미를 통해 꾸짖은 책망의 말을 들어내는 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아비와 어미는 꼭 육신의 아비 어미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길목에서  성문 어귀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중에 내 어리석음을 꾸짖고 질책해 주는 사람이 다 아비 어미입니다.

기분 나쁘더라도 극 질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소화를 잘 시켜내면 그것이 나중에 내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 되고 목에 번쩍번쩍 빛나는 금 사슬이 되는 것이지요.

 

 

 

맺는 말

 

 

 

인간은 끝까지 가기까지는 좀처럼 깨우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말이지요. 그래서 지혜를 열왕기상 3장 9절에서는

듣는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올 한 해 낭패에 이르고 나서야 듣지 마시고 낭패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들어내시는 인생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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