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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 4 위풍당당

2021.02.08 12:20

김성욱전도사 조회 수:96

제목 주님과 동행 4 위풍당당 
본문 잠언 30:29~31(구약 946) 
날짜 2021-02-07 
설교자 전용표 목사 

주님과 동행 4

성경 : 잠언 30:29~31(구약 946)

제목 : 위풍당당

 

 2019년에 기생충이라는 우리나라 영화가 전세계 영화계를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올 해 또 한편의 영화가 미국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미나리>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는 1980년대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민 간 정이삭이라는 영화감독이 자기 가족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부부는

정신없이 일하느라 어린 아이들을 돌볼 수 없게 되자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오시라 해서 아이들을 맡기게 되는데, 어린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할머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 친구들 할머니는 세련되고 멋진데다가 아이들에게 해 주시는 음식도 세련되었는데 한국에서 온 자기 할머니는 몸에서 이상한 냄새도 나고 해 주시는 음식도

이상한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뭐 이런 내용인데, 197~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어렵게 터전을 일구었던 한국인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가 어째서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일까요? 미국 백인들은 백인우월주의가 강해서 아시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보지 않는 풍토가 있는데 말입니다. 무슨 유명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도 아니고 미국 백인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무시하는 아시아인의 소박한 가정 이야기일 뿐인데 말이지요. 이에 대해 어떤 작가는 미국인들이 미나리라는 영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애환 많은 인생살이 가족이야기는 넘사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 어디에도 없는 한편의 작품이다. 그러니 미국에서 기죽어 사는 모든 아시아인들이여 자기자신에 대해

자신을 가져라. 자신을 귀하게 여겨라! 미국 백인의 입장에서 자기를 보지 말아라!”

영화에 나오는 손자 손녀들은 어린 나이지만 벌써 미국백인들이 기준이 된 눈으로 보니까 자기 할머니가 이상해 보이고 못나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진짜 이상하고 못난 것은 아니지요. 자식들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값진 삶이지요. 어린 손자 손녀들이 철이 들어서 자기 할머니의 헌신을 깨닫고 귀하게 여기게 될 때에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거듭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생각도

가치관도 거듭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울처럼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사는 것

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영화에 나오는 어린 아이들처럼 세상을 기준으로 해서 자꾸 나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때로는 초라하게 느끼기도 하게 됩니다.

또 우리를 보면서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당당함을 찾아야할 때입니다. 어디에서 우리의 당당함을 찾고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다면서 사자, 사냥개, 숫염소, 그리고 을 예로 듭니다.

 


 

사자 : 나를 귀히 여길 때 당당할 수 있다

 

 먼저 사자입니다. 사자는 자기가 세다는 것을 압니다. 동물 세계에서 상위포식자들은 자기가 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산을 접하고 있다보니 가끔 꽃뱀도 나오고 살모사도 나옵니다. 꽃뱀과 마주치면 나도 놀라는데

뱀이 더 놀랍니다. 화들짝 놀라서 줄행랑을 칩니다. 그런데 살모사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딱 똬리를 틀고는

‘니가 뭔데?’ 뭐 이런 식입니다. 자기가 센 줄 아는 것이지요. 웬만해서 겁먹지 않습니다. 사자가 그렇지요.

특히 수사자는 굉장히 위엄이 있습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벌써 압도적입니다. 걷는 모습이 당당함 자체입니다.

이처럼 당당함이라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데서 생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다 사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사자 정도는 돼야 위풍당당하지, 고양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뭘 위풍당당 해?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꼭 사자 정도 돼야 위풍당당히 걸을 자격이 있고 고양이로 태어나면 위풍당당하게 걸으면 안 됩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있다면 거짓된 세상 가치관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먹게 되면 이 말씀이 우리를 고치십니다.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자유하게 하십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싫고 마음에 들지 않던 나의 과거도 사랑하게 되고, 마음에 들지 않던 나의 약한 모습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귀하게 여겨집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진짜로 말씀을 알면 알수록 예전에는 마음이 자유하지 못했던 것들에서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고 가지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뀝니다. “돈이 없는 것을 왜 그렇게 부끄럽다고 느껴며 살았을까? 그저 사는데 좀 불편할 뿐,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내가 무슨 사기를 치며 산 것도 아니고, 그저 정직하게 땀흘려 일하고 살았왔을 뿐인데, 그럼 됐지!”, “공부 많이 못한 것? 그게 왜

부끄러움이 돼야 해? 형편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는데 뭘! 그래도 이렇게 먹고 살고 있잖아! 공부 많이 못했어도

주님이 먹고 살도록 다른 재능을 주시고 이렇게 사랑해 주시잖아! 그럼 됐지 뭐!”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이지만 더 넓게는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거짓된 가치관,

잘못된 부끄러움, 이런 것들로부터도 자유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더 가져야 내가 귀한 존재가 되는 것 아닙니다. 이미 나로서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존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못난 이 부분을 고쳐야 내가 귀한 존재가 되는 것 아닙니다.

약점이 있고 부족함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이미 귀한 존재입니다.

애환이 많은 내 인생살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한편의 드라마요 영화요 작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내 모습입니다.

 

 

 

사냥개 : 원하는 것을 내려놓을 때 당당할 수 있다

 

 다음은 사냥개입니다. 사냥개는 사자와 같은 풍채와 위엄은 없습니다만 목표 의식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사냥개를 위풍당당하게 만들어줍니다. 제주도 한라산에 멧돼지가 번식해서 피해가 많다고 하는데 이 멧돼지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개가 한라산에 사는 늑대개라고 합니다. 포수들이 이 늑대개를 사냥개로 활용하는데, 얼마나 용맹한지 멧돼지에게 일격을 당해 피가 나고 통증이 극심한데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멧돼지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좇다가 꽃을 보고 꽃감상을 한다든지 다람쥐를 보고 순래잡기를 한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사냥개라고 해서 자기 좋아하는 것이 왜 없겠습니까만 사냥이 시작되면 사냥개는 다른 관심은 다 접고 오로지 목표물에 몰두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는 것이 너무 많고 또 얻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바르게 가기 어렵습니다. 바르게 가지 않으면 당당할 수 없지요. 얻고자 하는 마음이 많으면 사람에게 잘 보이려 들거나 사람을 이용하려 듭니다. 또 잘못된 방법도 쓰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나중에 이런 것들이 다 약점으로 잡혀서 이리저리 휘둘리게 됩니다. 좋아하는 마음도 너무 강하면 그것도 바르게 가기 힘듭니다. 가령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잘못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응하게 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잘못을 해도 팔이 안으로 굽어 판단이 흐려지기도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일깨워서 바르게 보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그 잘못을 보는 눈을 갖게 하시고 아무리 먼 관계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면 내가 성령께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에 이끌리고 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얻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다? 틀림없습니다. 세상의 영에 이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주님은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바라는 것을 내려 놓으면 그때 답이 옵니다. 사냥개는 목표물을 위해서 자기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습니다.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인이 원하는대로 나아갑니다. 거기서 당당함이 옵니다.

 

 

 

숫염소 : 다시 맞설 수 있는 내면의 강함을 주신다

 

 다음은 숫염소입니다. 숫염소는 상대가 자기보다 덩치가 몇 배가 큰 황소더라도 들이받습니다. 들이받고 나가떨어지면 또 들이받습니다. 이걸 보고 성질이 못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그걸 배우라는 뜻이지요. 호되게 당했던 직장 상사에게 주눅이 들어서 결재를 맡기는 맡아야 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일이 더 꼬이게 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힘들었던 사람, 실패했던 일 앞에서 우리는 주눅 들어 무엇을 해야 하는데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이지요. 더 안타까운 것은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극복을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더 절망스러워 지고 더 무력해지고 비굴해질 때도 생깁니다. 칠전팔기 도전정신에 관한 자기계발서를 아무리 읽어도 읽을 때 뿐이지 나아지지 않습니다. 내 속에 없던 도전정신이 갑자기 생겨나고 그러지 않습니다. 못났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채근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부품이 망가졌으면 부품을 갈아 끼워야 해결이 되듯이 그럴 때는 우리를 지으신 분에게로 가서 에이에스를 받아야 합니다. 청소기 밧데리가 방전이 되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도 코드를 꼽는 순간 전기가 충전되면서 청소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상황을 해결하시기 전에 우리 마음을 강건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붙들어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다시 맞서고 다시 맞서는 용기, 그것이 숫염소의 당당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들 때 주님께서 다시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왕 : 일어서지 않는 보상

 

 마지막으로는 왕입니다. 왕은 그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왕이라는 자리가 벌써 위엄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왕은 어려서부터 경거망동하지 않고 위엄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몸에 익히기에 풍기는 것이 대단히 품격있고 위엄찹니다. 왕의 특징이 많지만 그중에 놓치기 쉬운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일어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왕은 누구 앞에서도 일어서지 않습니다. ‘중전마마 납시오, 영의정 납시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왕을 소개하면서‘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당할 수 없는’이란 말이 ‘알쿰’인데 ‘일어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함부로 일어서지 않을 때 당당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모르드개를 봅시다. 모르드개는 포로민의 후예였으니 출신성분이 변변치 않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대페르시아제국의 2인자 하만이 지나가는데, 다른 사람들을 벌떡 벌떡 일어나서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넙죽 넙죽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하만이 기분이 몹시 상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 하지요. 그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너 그러다가 큰일 난다, 일어나서 절하는 시늉이라도 해라고 그래도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면서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나는 유대인이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저 사람 지위가 높다해서 그 앞에 굽신 굽신 거리고 가진 돈이 많다고 굽신 굽신 거리고 그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하만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 악한 권력자였습니다. 모르드개는 그런 사람 앞에 잘 보이려 든다든지 한자리 얻으려 든다든지 뭐 그러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개 쳐다보듯 합니다. 얼마나 위풍당당한 모습입니까? 이것이 왕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맡은 일이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해야합니다만 사람에게 잘 보여서 뭘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답게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다보면 하나님 뜻이 있고 때가 되면 하나님은 순리대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썩어질 가치관에 물든 사람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가졌다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가진 것을 과시하고 유세를 합니다만 그것은 위엄도 아니고 위풍당당도 아니고 천박함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귀히 쓰실 사람은 가진 것이 늘어나고 자리가 올라갈수록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 입장을 충분히 헤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약한 사람, 나보다 낮은 사람 앞에서 더 겸손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위풍당당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악인 앞에서 위풍당당하십시오. 세상의 썩은 가치관에 물든 사람 앞에서 당당하십시오. 세상의 썩은 가치기준 앞에서 당당하십시오. 대신에 약한 사람 앞에서 겸손해 지십시오. 의롭게 사는 사람, 경건하게 사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약해지십시오. 그것이 당당함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맺는 말

 

 

돈이 신이 되어 지배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돈이 당당함의 조건인 줄 알고들 살아갑니다만,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이 발산하는 당당함에 앞에서는 모조품 다이아몬드의 싸구려 빛깔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위풍당당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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