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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나강해6 옹졸한 선지자와 불편한 진실 
본문 요나 3:1~10(구약 1288) 
날짜 2020-12-2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나서 강해 6

성경 : 요나 3:1~10(구약 1288)

제목 : 옹졸한 선지자와 불편한 진실

 

옛날 진시황제가 어머니인 태후를 옹(壅)이라고 하는 지방에 유배를 보냈습니다. 옹이라는 말은 사방으로 둘러싸여 갇혀있다는 말인데, 옹지방이 꼭 그러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유배보내는 것이 천륜에 어긋난다며 신하들이 그 부당함을 아뢰자 진시황제는 반대하는 사람 스물일곱 명을 끓는 가마솥에 집어넣어 삶아죽였습니다. 이때 생겨난 말이 옹졸(壅拙)이라는 말입니다. 옹(壅)이라는 말은 생각이 갇혀있어 답다한 것이고 졸(拙)이라는 말은 생각지 자라지 못해 못난 것입니다. 옹졸은 꽉 막혀 말이 통하지 않고 그릇이 좁고 졸렬하다는 말입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안목이 있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굉장히 유용한 물건이 되지만 안목이 좁고 옹졸한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그 물건의 이용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만 물건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옹졸하면 넓지 못하고 넓지 못하면 담지 못합니다. 넉넉하고 너그러우면 넓어서 많이 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의 좁은 마음을 넓혀서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데 그렇게 무엇이든 넉넉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신 다음 사용하십니다.

 

 

 

요나의 옹졸함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 냈고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요나가 이번에는 거절을 못하지요. 니느웨로 갑니다. 니느웨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답게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도착해서 성을 다니면서 외치는데 겨우 하루만 외칩니다. 4절을 봅시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4)

 

사흘을 다녀야 다 다닐 수 있는 큰 성읍인데 하루만 다니면서 외칩니다. 그 난리를 치렀으니 하는 수 없이 하기는 하는데 마지 못해 하는 거지요. 그래서 최소한으로 합니다. 하기는 하는데 진짜 최소한도로 하는 것을 태업(怠業)이라 하지요.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사십은 준비의 시간, 연단의 시간,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나가 외친 말 자체는 사십 일이라는 마지막 기회가 아직 남아 있을 때에 회개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이 말을 좋은 의미로 외친 것 같지는 않고 사십 일 후딱 지나서 니느웨가 폭삭 무너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쳤다고 보입니다. 4장에 가서 회개한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요나가 거세게 항의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밖에는 달리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요나가 이 말도 하기 싫어서 ‘사’하고 열 걸음 가서 ‘십’이라 하고 또 열 걸음 가서 ‘일’ 그러고, 또 열 걸음 가서 ‘이’라고 외쳤다고 재미난 풀이를 하시더군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위하는 일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지요. 요나도 사람인데 자기가 싫어하는 민족이고 나라인데 그들을 위하는 일에 즐거울 리는 없지요.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요나는 선지자 아닙니까? 좋든 싫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일단 성실히 해야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태업을 합니다. 옹졸합니다. 선지자 정도 되면 배포가 좀 크고 해야 되는데 밴댕이 속 같습니다.

넉넉하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간에,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든 간에 내가 할 바는 해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큰 회사의 인사과 책임자였는데, 중요한 지점에 지사장 자리가 비어서 한 사람을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추천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추천한 사람은 집사님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추천을 받아서 지사장으로 가게 된 사람이 정말 의아했습니다. 자기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왜 나를 추천했을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할겸 자기를 추천한 이유도 물어볼 겸 고가의 선물을 마련해서 집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이 선물을 거절하면서 이러는 겁니다. “내가 당신을 추천한 것은 이런 고가의 선물이나 무엇을 바래서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당신이 제일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인 것이고 이것은 회사를 위한 공적인 일입니다. 아무리 당신이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해도 공적인 일에 그런 사적인 감정을 결부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그 자리를 가장 잘 해 낼 수 있는 사람을 고민하다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서 추천한 것뿐입니다. 가서 잘 하십시오.”

얼마나 멋진 그리스도인입니까? 참 신앙인은 이런 것입니다. 배포가 큰 겁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 속을 밴댕이 속으로 만드실 리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넓어져야 제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겁니다. 하해와 같이 넓으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처럼 넓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불편한 진실을 대할 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불성실한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는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5, 6절을 봅시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5,6)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었습니다. 베옷은 상복이자 회개를 상징하는 옷입니다. 가족이 죽어 초상을 치르는데 자기 좋아하는 것 다 먹고 좋아하는 것 다 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중단하고 슬퍼해야지요. 상복을 입었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중단하고 슬퍼하면서 뉘우치는 것이지요. 왕도 화려한 옷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고 합니다. 회개하는 시늉만 그럴싸하게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돌이키는 회개로까지 나아갔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7,8)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악한 길은 비윤리적인 길로서 방탕하게 살고 음란하게 살고 속이고 남을 이용해 먹고 사는 나쁜 길을 말하고 강포는 그것보다는 좀 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죄를 말하는데, 불공평이나 착취나 억압 같은 죄를 의미합니다. 가령 하청업체 단가후려치기 같은 것으로 하청업체를 착취하는 것이나, 힘들게 일한 것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을 준다거나, 싸구려 재료를 쓰면서 소비자를 속이고 비싸게 팔아 정도 이상의 이득을 남기는 것, 그리고 주식시장에서 주가를 조작해서 수많은 사람들 돈을 순식간에 빨아먹는 행위 같은 좀 큰 범위에서의 죄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개인이 죄짓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하는데 이런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죄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둔감한 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죄가 더 심각하고 큰 죄입니다. 개인적인 죄는 자기를 망치고 기껏해야 주변 사람 몇 사람 괴롭히고 말지만 주가조작 같은 구조적이고 사회적 차원의 죄는 수많은 사람과 가정을 파괴하거든요. 그런데 니느웨는 이런 죄까지 금하고 청산하며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왕과 높은 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공평과 정의를 세워나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요나나 이스라엘에게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당시 하나님이 아모스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보내셔서 회개하라, 공평과 정의를 회복하라고 그토록 외쳤는데도 하나님 백성이라 자처하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그 말을 들었습니까? 콧방귀 끼면서 비웃었습니다. 비웃기만 했습니까? 그렇게 외치는 선지자들을 협박하고 위해를 가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지옥의 불쏘시개라며 정죄하던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고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를 썼단 말이지요. 마치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라고 으스대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던 반면에 그들이 지옥의 자식이라고 정죄하던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던 것과 비슷합니다.

자기가 불성실하게 전한 말씀을 듣고 저토록 철저히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보고 요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했을까요? ‘우리 민족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쳐도 듣는 둥 마는 둥, 아니 되려 그 딴 소리 집어치우라고 화를 내며 선지자들을 협박하고 죽이려 드는데, 이 이방인들은 저렇게 철저히 회개를 하는구나! 도대체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 맞기는 한 것인가?’ 이렇게 가야 양심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데 요나는 그러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 이유가 뭘까요? 뿌리깊은 선민사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다고 하는 이 선민사상이 진실한 회개를 방해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뭐!’, ‘어떻게 살든 간에 천국 가는데 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제대로 된 선민사상이 아닙니다. 올바른 선민사상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이런 수준으로 살아서야 누가 나를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 하겠는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만 그렇다고 내가 진리가 된 것도 아니고 내가 진리를 다 아는 것도, 진리대로 다 살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발견했으니 이제부터 진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시작한 것일 뿐입니다. 주변을 보면 예수를 모르는데 그 행동거지나 말하는 것이나 마음쓰는 것이 예수를 아는 사람보다 더 예수를 닮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 가서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말하면 그것이 쉽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네 눈에 들보를 먼저 빼고 나서 남의 눈에 티끌을 보라고 하셨습니다(마7:3~5). 내 눈에 들보를 먼저 보고 그것을 먼저 빼고 난 다음에 ‘야, 네 눈에 티끌 있다, 그거 빼라, 회개해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대에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자신을 반성하고 뉘우칠 줄 알았고 진실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역시나 공평한 기회균등의 하나님

 

 

 

역시나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니느웨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겁니다. 10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0)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으신 분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도 그들의 죄가 쌓이면 심판하시고 아무리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면 긍휼을 베푸십니다. 기회를 골고루 주시는 분입니다.

제가 케이크를 처음 먹어 본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연년생인 형의 생일날이었는데, 컴컴한 저녁에 누가 밖에서 형의 이름을 불러 나가보니 교회담임선생님이 케이크를 박스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생일 축하한다면서 케이크를 주고 가시는데, TV에서만 보던 케이크를 그날 처음 먹어봤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는 다들 맞벌이에다 철야연장 근무, 이교대 삼교대 하면서 먹고 살기 바빴던 때라 요즘처럼 아이들 생일 챙기고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생일 날 되어도 미역국도 못 챙겨먹는 집이 많았고 기껏해야 어머니가 출근하시면서 백원짜리 한 두푼 주고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하시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런 시절에 자기 자식도 아닌 남의 자식 생일에 케이크를 사오신 겁니다. 그 선생님이 청도골짜기 출신인데 상업고등학교를 나와서 부산에 있는 은행에 취직을 해서 부산에 내려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살아가고 계셨던 분입니다. 지금은 장로님이시지요. 이 분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첫째가 제 바로 위의 형과 동갑내기 친구입니다. 장로님도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아들 생일이면 케이크 정도 사줄 형편은 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맡고 있는 반아이들을 보니 다들 사는 형편이 어렵고 생일이 되어도 케이크라를 맛본 적도 없고 맛 볼 일도 없는 겁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 거지요. 내 아이 소중하면 하나님 맡겨주신 저 아이들도 소중하다는 생각인데, 이것이 꼭 하나님 마음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라고 은혜 베푸실 때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이방인도 회개하면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 백성도 회개치 않으면 징계를 하시고요.

보십시오.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할 정도로 가득 차니까 심판하시려고 하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진심으로 돌이키는 행위를 보이니까 심판을 보류하시고 용서하시고 살 길을 열어주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기준을 채우면 되는 겁니다. 고난도 주님의 기준을 채우면 고난이 축복이 되고요, 연단의 시간도 주님의 정하신 시간을 채우면 연단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임계점을 넘으면 됩니다. 물이 99도가 되어도 팔팔 끓지 않다가 100도가 되는 순간 끓습니다. 영상 1도가 되어도 물이 얼지 않다가 0도가 되면 업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에는 신앙의 진골성골집안이 따로 없습니다. 이제 갓믿은 사람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피라미드 다단계는 밑에 사람은 아무리 해도 더 이상 올라서기가 쉽지 않은 불평등 시스템입니다만 하나님섭리는 저 밑바닥에 있던 요셉이 고속승진을 할 수 있는 공평한 시스템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시간을 채우고 하나님의 기준을 채우면 은혜를 베푸십니다.

 

 

 

맺는 말

 

 

 

하나님을 믿지만 때로 내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옹졸한 요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요나도 결국 맥을 못추고 뿌리 뽑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사람이 여유가 생기고 넓어집니다. 요나를 뿌리뽑은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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