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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나 강해 5 입장이 바뀌면 
본문 요나 2:8~10(구약1287) 
날짜 2020-12-13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나서 강해 5

성경 : 요나 2:8~10(구약 1287)

제목 : 입장이 바뀌면

 

 

한 번은 휴가를 계곡에 자리한 펜션을 빌려서 집안 식구들과 함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 수영장이 딸린 펜션이었는데, 첫날은 잘 놀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자 우리가 있는 펜션에 풍선처럼 불린 몸에 오색찬란한 그림으로 수놓은 조직원 아홉 명이 단체로 휴가를 왔습니다. 그들은 펜션 수영장을 점거하고는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노는데 욕이 안 들어가면 말이 안 되더군요. 다른 휴가객들이 불편해하는 눈치들이었지만 부딪히기 싫으니 조용히 참고들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물놀이를 하던 조직원들이 단체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한데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제가 ‘찍어드릴까요?’라고 했더니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쩌렁쩌렁하던 소리는 오간 데 없고 갑자기 애기목소리를 하고선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용무늬로 수놓은 그 덩치 속에는 여전히 열세 살 초등학생의 순박함이 숨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속은 여린데, 약하게 보이면 안 되는 세상을 살다 보니 자꾸 겉을 험악하고 무섭게 꾸미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허위의식(虛僞意識)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조폭만 허위의식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들의 기세에 눌려 불편을 느끼면서 참고 있던 다른 비조직원(?) 사람들에게도 또 다른 측면의 허위의식이 있지요. ‘저들은 사회의 암적 존재, 우리는 선량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어쩌면 또 다른 허위의식일 겁니다.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는 겉모습 이면에는 여전히 초등학생 같은 순박한 모습이 숨어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조폭을 옹호할 생각은 아닙니다. 너무 선을 선명하게 긋고는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항상 선긋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고, 세리나 저들은 하나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허위의식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허위의식은 지위가 낮은 사람보다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적은 사람보다는 배운 것이 많은 사람에게, 똑똑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똑똑한 사람에게 더 나타나고, 시골사람보다는 도시사람들에게,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신앙이 좋은 사람에게 더 많이 나타납니다. 진리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바로 이 허위의식을 깨닫고 허위의식의 겉옷을 벗어 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 나아갈 길입니다.

 

세상과 철저히 차단된 공간인 물고기 뱃속에 갇힌 요나는 그곳에서 산의 뿌리,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집니다. 낮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지요. 하나님을 향해 한껏 불만하면서 기도를 거부하던 요나가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고통 속에 신음하게 되자 기도의 문이 열려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요나는 변화되는 듯 보였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의 기도 마지막 부분을 보면 왠지 밑바닥 의식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나의 왜곡된 현실인식 : 허위의식의 병폐

 

 

8~9절을 한 번 볼까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철저히 낮아지고 회개하던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을 들먹일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요나는 굳이 다른 사람을 언급하면서 자기의 우월함을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주께 서원을 갚겠나이다라고 말이죠. 그들은 배은망덕하지만 나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신약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세리와 함께 기도하러 올라 갔던 바리새인입니다. 나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다고 기도했었지요. 미숙함에 빠지면 자꾸 비교를 하게 됩니다. 감사도 그저 감사하면 되는데 저 사람들은 저런데 나는 이렇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인 것이지요. 만약 내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저 사람들이 들으면 저 사람들도 공감을 할까요? 기분 나쁘겠지요. 누구는 저런데 나는 어때서 감사합니다보다는 그냥 감사하고 그저 감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점은 저도 지금까지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자꾸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기도를 들어 보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라고 하는데, 불과 얼마 전 만났던 뱃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습니까? 아니지요. 팩트체크를 한 번 해 볼까요? 1장 16절을 보면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 바다가 곧 잔잔해지자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곧바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신실하게 반응하였던 겁니다. 반면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내팽개쳤고 죽게 된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지금 저들은 베푸신 은혜를 버렸지만 나는 주님께 서원을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허위의식이 이런 겁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는 상관없습니다.

신앙은 내 밑바닥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시니까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바리새인의 완벽한 행위가 아닌 평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밑바닥 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밑바닥 마음을 보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삶으로

 

 

요나는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기도를 마칩니다. 그런데 3장에 가서 보면 요나는 서원한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도 불성실하게 이행합니다. 그리고 니느웨를 용서하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힘을 다해 역정을 내면서 하나님을 교정하려고까지 듭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구원은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니느웨를 구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참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떤 상황이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물론 대환영입니다. 하나님이 저 아프리카의 어려운 지역 사람들을 사랑해 주시는 것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돈 떼먹은 사람, 내 가슴팍에 대못을 박은 사람 사랑해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환영입니까? 아니지요. 못견디지요. 차라리 내가 모르는 사람 사랑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와 과거지사가 얽힌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왠지 거북스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 그 말에는 하나님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 그 말에는 하나님은 내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에게 사랑을 듬뿍 부어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허위의식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까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믿습니다.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선교의 책으로 알려진 요나서는 실은 삶을 갖추지 못한 채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비웃는 책입니다. 요나서에서 선민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인물인 요나는 이방인보다 덜 양심적이고, 생명을 덜 아끼고, 덜 상식적이고, 진실히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에도 뒤처집니다. 이방인은 자신들의 하나님 지식을 바꾸지만 요나는 자신의 하나님 지식을 바꾸기보다 하나님을 바꾸려 듭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비기독교인을 마귀 자식 정도로 취급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비기독교인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내실을 갖추고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의 선민의식을 과연 우리만큼이나 인정해 주실까요? 확신을 생명처럼 강조해온 한국기독교 안에서는 어쩌면 통하기 어려운 도전적 질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로역정을 지은 존 번연에 비견되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저술가인 C. S. 루이스는 <온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특별히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을 할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라고 기독교인들의 오만과 편견을 지적하였습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정말 삶으로 말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삶이 없이 말로만 해도 통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렇게 하면 욕이 아니라 돌을 맞을 수도 있는 시대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철저히 삶이라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어려운 형편에 미국 유학을 할 때 학비를 벌기 위해 말하자면 남의 집 머슴을 살았습니다. 미국 부유한 백인 집 집사로 집안 청소며 정원 관리며 허드렛일을 합니다. 상당한 부잣집이라 일꾼이 여러 명 있는 집인데, 다들 비슷합니다. 주인이 보는 데서는 일하지만 없는 곳에서는 놉니다. 한 번은 주인이 몰래 숨어서 일꾼들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시아 가난한 조선에서 온 청년이 누가 보지 않는 데도 열심히 정말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도산 안창호를 불러서 자네는 어째서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인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도산 안창호가 ‘저는 조선사람입니다, 조선사람은 정직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정직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감동을 받은 주인은 도산 안창호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었습니다.

오늘 10절을 보면 물고기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나를 육지에 토했다고 나옵니다.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이제 다시 기회를 줄테니 니느웨로 가서 내 명령대로 전하라, 네가 그토록 기도하고 서원을 갚겠다고 하는데, 어디 그렇게 하는지 보자, 이런 의미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풍자입니다. 이방인보다 못하게 행동하던 요나가 기도는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인 것처럼 하니까 하나님도 물고기도 역겨워서 토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전 학창시절 때 누가 자기 자랑을 막 늘어놓으면 친구들이 옆에 있다가 ‘욱~! 욱~!’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듣기가 역겹다는 것이지요. 10절이 딱 이런 분위기입니다.

우리 반계교회 성도들이 세상 나가서 살 때에 세상 사람들이 돌아서서 ‘욱! 욱!’하면 절대 안 되겠습니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반계교회 교인으로서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신독(愼獨)이라 합니다. 혼자 있을 때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신독이라 합니다. 허위의식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역겨운 것입니다. 신독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한국교회, 반계교회의 영광이 되리라 봅니다.

 

 

맺는 말

 

 

험난한 세상을 만나 기독교인으로 살아내려고 저 문을 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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