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요나 강해 4 삼일 지나 해가 뜬다 
본문 요나 1:17~2:7(구약1287) 
날짜 2020-12-06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나서 강해 4

성경 : 요나 1:17~2:7(구약 1287)

제목 : 삼일 지나서 해가 뜬다

 

 

지난 주간 올 겨울 들어 날씨가 가장 추웠습니다. 왜 추웠느냐? 사람들은 수능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수능시험 때는 어김 없이 춥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시험은 날씨도 돕지 못하는가 봅니다. 예외인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학창시절 가장 힘든 것이 아마 시험일 겁니다. 어른이 되면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줄 알고 어서 졸업해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웬걸요? 졸업하면 그때부터 인생이라는 진짜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험 기간이 되면 모두가 압박감에 시달리는데, 그 압박감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은 달리 있겠습니까,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는 것 밖에요.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면 시간이 모자란다 느낄 정도로 빨리 지나갑니다. 그러나 걱정은 하면서서 시험공부를 하지 않으면 압박감은 압박감대로 느끼고 시간은 시간대로 가지 않고해서 고통이 배가 됩니다. 간혹 모든 걸 초월한 신선의 경지에 이른 아이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시간은 일정한 빠르기로 가는 것 같지만 실은 일정한 빠르기가 없습니다. 즐거울 때는 빨리 가고, 괴로울 때는 느리게 갑니다. 뭔가에 몰입하면 빨리 가고, 피해 가려고 하면 느리게 갑니다. 시간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또 마음가짐에 따라 흐름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고기 뱃속, 근심이 곧 은혜임을 배우는 장소

 

 

요나에게 평생 가장 어둡고 긴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죽어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던 요나는 차라리 자기를 바다에 던져달라고 하였지요. 뱃사람들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버텼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정상 참작을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후 요나를 폭풍 이는 바다에 던집니다. 바다에 빠진 요나는 허우적거리며 연신 물을 마셔면서 정신이 혼미해 갔을 것입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커다란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버렸습니다. 1장 1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어렸을 적 이 대목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도대체 고래였을까? 아니면 지금은 멸종한 특별한 물고기였을까? 과학적인 의문도 들었습니다. 위액이 분비되는 뱃속에서 어떻게 죽지 않고 삼일을 살았을까? 호기심은 생기지만 성경은 성경이 의도하는 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요나서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 한마디도 적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이 큰 물고기가 여호와께서 준비해두셨다고만 합니다. 요나는 죽고 싶었는데 죽을 수도 없도록 물고기를 준비해 두셨던 것이지요. 참 이런 것을 보면 아이러니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그 일을 뒷전으로 하고 죽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기 싫어 죽겠는데 그 일을 하라고 살리신단 말이지요. 이런 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실감나게 느끼는 지점은 내가 바라는 대로 다 될 때가 아니라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나님을 역설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요나는 죽으려고 바다에 나를 던지라 해서 폭풍 이는 바다에 빠졌는데 생각지도 못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을 평안한 안식처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물고기 뱃속은 모든 것과 단절된 밀폐된 공간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2절에서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스올은 끝이 없는 구덩이로서 지옥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인데, 지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물고기 뱃속이 고통스러웠다는 말입니다. 물고기라는 단어도 물고기 뱃속이 고통의 장소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히브리어로 ‘따가’인데, 근심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물고기는 ‘따가’, 근심은 ‘따그’입니다. 두 단어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물고기 이러면 물고기로도 들리고 근심으로도 들립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는 말은 곧 근심에 사로잡혔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고, 큰 물고기가 삼켰다는 말은 곧 큰 근심에 완전히 붙들렸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이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물고기 뱃속이 마냥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은혜의 장소이기도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2절을 볼까요?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고통을 통해서 요나가 드디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요나는 기도를 거부하고 잠을 잤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끝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자 기도를 합니다. 기도해야 된다, 기도해야 내 영혼이 산다, 들을 때는 ‘그래 맞아, 기도해야지!’라고 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지요. 또 하려고 생각해도 쉽게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심거리 생겨보세요. 밥 먹기도 싫을 정도로 걱정거리 생겨보세요. 기도가 나오거든요. 탄식이 나오고 도와달라고 하고 그러거든요.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고통의 때가 지나고 나서 그때처럼 기도하려고 해도 그때처럼은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이 고통의 장소이지만 거기가 은혜의 장소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근심’으로도 들리고 ‘물고기’로도 들리는 단어를 통해 성경이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근심이 곧 은혜야! 근심이 있어야 네가 살아!”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입니까? 기쁨이 은혜라고 해야되는데 성경은 근심이 은혜요 고난이 은혜라고 합니다. 그걸 깨달으라고 합니다.

역설의 진리를 깨닫고 사는 사람은 큰 물결이 나를 두르고 깊은 바닷속 물고기 뱃속에 갇혀 모든 것이 차단되고 단절되고 홀로 외톨이 된 듯 하고 버려진 듯한 상황이 되었을 때, ‘아, 이제 내가 은혜의 장소로 들어왔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 이제 시작되었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삼일, 채워야 지나가는 시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있었습니다. 삼일을 채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삼이라는 숫자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 중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숫자들이 있습니다. 가령 7은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이고, 12는 가득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연단과 준비를 의미하는 수입니다. 모세는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받은 다음 사역을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다음 가나안에 들어갔으며, 예수님도 40일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이라는 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갈 때 삼일 길을 갔습니다. 자식을 불살라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기가 죽지 않고는 안 되지요. 삼일은 자식 바치기 전에 아브라함 자신이 먼저 죽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히는 모든 욕심과 심지어 본능까지 죽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무덤에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여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시간입니다. 삼일은 죽음의 시간, 곧 내가 죽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삼일이 그저 지나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는 가만히 있어도 지나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허락하시는 삼일이란 시간은 가만히 있는다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야 지나갑니다. 뭘 채워야 하는가? 3, 6절을 봅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3)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6)

 

요나는 3절에서 주님이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다고 하고 6절에서 자기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깊음 속’에서 ‘속’은 ‘바닥’이라는 말이고 ‘산의 뿌리’에서 ‘뿌리’는 산의 ‘밑바닥’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나를 바닥에 내던지셨고, 요나는 거기서 더 낮아져 산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요나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겠지요. “아니 주님, 제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바다에 빠지기까지 했으면 됐지, 여기서 뭘 더 낮아지라는 겁니까? 어디까지 제가 더 망가지고 초라해야 됩니까?” 그런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더 낮아지는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 인생길에 삼일이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시간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더 낮아지지 못하기 때문이고 더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양보 했으면 됐지 여기서 뭘 더 하라는 거야?”, “내가 이만큼 죽어지내면 됐지, 여기서 어떻게 더 죽어?” 그래서 삼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감정대로 말하거나 행동했다가 얼마나 일이 더 힘들어지곤 했습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제가 하늘 영광보좌까지 버리고 인간이 되기까지 했으면 됐지, 여기서 또 십자가까지 져야한단 말입니까? 제가 십자가 진들 저들이 금방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바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이 그것이라면 예, 이것까지 마시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기분이 좀 상하는 말을 들어도 감정의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삼 일은 채운 뒤 말을 하고, 큰일을 겪었으면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삼 년은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더 낮아짐으로 채우면 삼일이 끝이 납니다. 딱지가 깨끗하게 떨어지듯 삼일이 깨끗하게 매듭지어집니다. 울만큼 울어야 눈물이 끝이 납니다. 깨달을 만큼 깨달아야 연단이 끝이 납니다. 낮아질 만큼 낮아지면 삼일이 끝이 납니다.

 

 

삼일이 끝난 다음 시간

 

 

삼일이 끝이 나면 이제 하나님이 올리시기 시작하십니다. 6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산의 뿌리(밑바닥)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6)

 

여기서 ‘건지셨나이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올라’인데, 우리말로도 ‘올리다’는 뜻입니다. 재미있지요. 히브리어와 우리 말이 공교롭게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신 뒤 우리가 더 낮아질 수 있는가를 보십니다. 자, 보십시오. 공을 떨어뜨려서 이 높이까지 튀어 오르게 하려면 어느 정도에서 떨어뜨려야 할까요? 적어도 이 정도에서는 떨어뜨려야겠지요. 공이 낮아진 거리에 비례해서 높이 튀어 오릅니다. 요나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낮아진 것이지요. 그러나 내 잘못과는 상관없이 연단을 위해 주님이 우리를 바닥에 던지실 때도 있습니다. 모든 계획이 다 틀어져 엉망이 되어 화가 납니다. 날개 잘린 새처럼 땅바닥에서 퍼덕이는 신세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능함으로 아픕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나 면도칼에 벤 것 같이 쓰립니다. 그럴 때 과연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주님, 제가 원래 잘 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낮은 자리가 원래 제 자리였습니다.’

대구동부교회 김서택목사님 서울대 공대를 나오고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수제였습니다만 졸업 후 7년을 백수로 지내게 되는 희한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보통 같으면 원망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김목사님은 낮아진 자리에서 묵묵히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저 좋은 학벌 가지고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한 소리씩 하지 않았겠습니까? 원래 뛰어난 분이지만 그 인고의 시간이 어쩌면 목사님을 더 깊이 있고 뛰어난 설교자로 만들어 놓았지 않나 싶습니다.

나의 계획이 틀어지고 내 뜻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낮추시면 높이십니다. 많이 낮아지면 많이 높이십니다.

 

 

맺는 말

 

 

4절을 보면 요나가 쫓겨난 자리에서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하고 7절에서는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고 기도드렸더니 그 기도가 주의 성전에 미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4)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라고 했는데, 조금 피곤한 정도가 아닙니다. 원어의 뜻으로는 수의를 입고 관속에 누워있다는 정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거짐 죽은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가 주님의 성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내 계획이 실패한 시간, 내 존재감이 사라진 시간, 고난의 시간은 우리의 심령을 깨워 주님을 향하게 하고 그 쓰라림으로 드리는 기도는 주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만들어진 사람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278 요한복음강해35 부엽공법으로 세워진 사람 요한복음 15:20~33(신약175)  2020-08-09  전용표 목사 
277 요한복음강해 33 아플수록 열매는 실하다 요한복음 15:1~8(신약173)  2020-07-26  전용표 목사 
276 요한복음강해30 사랑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13:31~36(신약171)  2020-07-05  전용표 목사 
275 요한복음강해 29 미운 발 고운 발 요한복음 13:1~20(신약 169)  2020-06-28  전용표 목사 
274 요한복음강해28 주머니 속 송곳 [2] 요한복음 12:37~43(신약168)  2020-06-21  전용표 목사 
273 요한복음강해 27 어찌 하셨는가 요한복음 12:27~36(신약168)  2020-06-14  전용표 목사 
272 요한복음강해 26 내가 미울 때 요한복음 12:20~26(신약168)  2020-06-07  전용표 목사 
271 요한복음강해24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2:1~11(신약167)  2020-05-24  전용표 목사 
270 요한복음강해25 나의 길 May Way 요한복음 12:12~19(신약167)  2020-05-31  전용표 목사 
269 요한복음강해20 빛바라기 세 갈래 길 요한복음 11장 1~10절(신약 164)  2020-03-29  전용표 목사 
268 요한복음강해 22 / 부활절설교 더 깊은 상처가 더 큰 영광으로 요한복음 11:39~44(신약166)  2020-04-26  전용표 목사 
267 요한복음강해 21 이 사람을 보라 요한복음 11:17~37(신약 165)  2020-04-05  전용표 목사 
266 요한복음강해 19 세 가지 보석 요한복음 10:1~10(신약 162)  2020-03-22  전용표 목사 
265 요나강해8 고난을 통해 배우는 자비 요나 4장 7~11절(구약 1289)  2021-01-10  전용표 목사 
264 요나강해7 내로남불과 박넝쿨 [2] 요나 4장 1~6절(구약 1288)  2020-12-27  전용표 목사 
263 요나강해6 옹졸한 선지자와 불편한 진실 요나 3:1~10(구약 1288)  2020-12-20  전용표 목사 
262 요나 강해 5 입장이 바뀌면 요나 2:8~10(구약1287)  2020-12-13  전용표 목사 
261 요나강해2 하나님의 알람 시계 요나 1:4~10(구약713)  2020-11-22  전용표 목사 
260 요나 강해1 사망에 이르는 바른 길 요나 1:1~3(구약1287)  2020-11-01  전용표 목사 
» 요나 강해 4 삼일 지나 해가 뜬다 요나 1:17~2:7(구약1287)  2020-12-06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