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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나 강해 3 천륜이란 점에서 
본문 요나 1:11~16(구약1287) 
날짜 2020-12-27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나서 강해 3

성경 : 요나 1:11~16(구약 1287)

제목 : 천륜(天倫)에 있어서

 

제가 어렸을 적에 우락부락하고 고집이 세서 연년생인 형과 많이 싸웠습니다. 한 번은 제가 형을 때렸습니다. 제가 완력이 더 셌거든요. 어머니가 동생이 형을 때리면 못쓴다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삐져서 입이 툭 튀어나왔지요. 잘못했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죽어도 그 말 하기 싫은 겁니다. 그런데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어머니가 야단쳐서 기분 나쁘다고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때 어려서 잘 몰랐습니다. 삐져도 절대 밥때를 앞두고 삐지면 손해라는 사실을요. 부부싸움도 밥먹고 해야지 밥 먹기 전에 하면 밥도 못 얻어 먹습니다.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하시니까 더 오기가 생겨서 더 삐지는 겁니다. “밥상 치운다, 진짜 치운다!” 그래도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는 겁니다. 잘못해놓고도 말입니다. 그날은 어머니가 진짜로 밥상을 치우시더군요. 그날 쫄쫄 굶고 잠을 잤습니다. 배고프니까 잠도 잘 안 오고, 한참 누워 있다가 몰래 나가서 찬밥하고 다 식은 멀건 된장국 찾아서 먹고 겨우 잠을 잤던 기억이 납니다.

천륜(天倫)이란 말이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태도를 천륜이라 합니다. 넓혀 생각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태도입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천륜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용서가 됩니다만 나이가 들어서도 형을 때리고 부모를 거역하고 덤벼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을 일컬어 패륜아라고 합니다. 천륜을 저버린 자라는 뜻입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대개 이 천륜 안에 있습니다.

 

 

버티는 요나 : 천륜을 잃어버린 신앙

 

 

지난주에 뱃사람들이 풍랑이 누구로 인해 왔는가를 알아보려고 제비뽑기를 하였고 거기에 요나가 뽑혔다는 것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추궁에 요나가 자기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데 그분 얼굴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 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듣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고 꾸중합니다. 거기까지 살펴봤습니다. 자, 제비뽑기에서 정확하게 자기가 걸렸습니다. 거기다가 선지자가 되어서 이방인들에게 꾸중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면 요나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도망쳐도 소용없네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명색이 선지자란 자가 이방인들에게 이런 수치를 겪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저로 인해 저들이 고생하는 것은 도저히 미안해서 안 되겠으니 제발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십시오. 배가 항구에 닿는 대로 저는 곧장 돌아가는 배를 니느웨로 가겠습니다.’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1절을 보실까요?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1)

 

바다가 점점 흉용하였다는 말은 또 시간이 흘렀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나가 제비 뽑혀놓고도 하나님을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풍랑은 점점 심해졌다는 말이지요. 요나는 뭘 하는 걸까요? 버티는 겁니다. 초등학교 때 누가 돈을 잃었습니다. 선생님이 전부 걸상(의자) 들고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돈 훔쳐 간 사람 나오라고 그러세요. 안 나오더군요. 교무실에 가서 기다릴 테니 조용히 교무실로 자수하러 오라고 하시면서 나가셨습니다. 다들 힘들어서 죽으려고 그래요. 꾀 많은 아이들은 선생님 나가시자 팔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욕을 하면서 훔쳐간 사람 자수하라고 그러기도 하고 그렇게 곤욕스러운 시간이 지나가는데, 마음속에서는 돈 훔쳐간 아이에 대한 원망과 꼭 이런 방법을 써야 하는지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 처사에 화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범인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 그날은 다른 반 다 집에 가고도 한 시간 넘게 벌섰던 기억이 납니다. 요나가 딱 그 짝입니다. 끝까지 버티는 겁니다. 왜 버틸까요?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버티는 겁니다. 이 풍랑이 자기 때문에 왔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렇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4장에 가서 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하나님을 꾸짖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을 고생하는 걸 보면 미안해서라도 잘못했다고 고집을 꺾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버팁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대한 불만을 토해내더군요. 교회 근처에 사는 사람인데, 일요일만 되면 교회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주차를 해놓아서 찻길이고 골목이고 간에 엉망이 된다는 겁니다. 교회 사람들 차에는 번호판에는‘예배중’이라고 덮개를 씌워놓아서 주차단속 카메라도 피하더랍니다. 한 번은 자기가 급한 일이 있어 차를 타고 나가야 되는데 진입로고 뭐고 전부 다 막아놔서 나가질 못했다는 겁니다. 길을 막은 차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안 받아요. 문자를 넣었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나가야 되니 차 좀 빼달라고. 그랬더니 답이 오는데, ‘지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중이니 기다리세요, 방해하지 말고!’ 결국 예배 다 마칠 때까지 씩씩 거리면서 기다렸습니다. 한바탕 했답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이 여럿 몰려와서 그 사람을 거드는데, 한 사람이 내뱉는 말에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이런 식으로 방해하다가는 벌 받는다!” 과연 이런 것이 바른 신앙인지, 어떻게 하다가 판단력이 이렇게나 왜곡되었는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적한 곳에 있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만, 만약 우리 교회가 도심 복잡한 곳에 있고 주차장도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몸이 불편하거나 아이가 어린 가정 빼고는 집이 가까운 분은 걸어서 오시고 집이 먼 분은 대중교통 이용해서 오시라고 할 겁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생각 자체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하고 와서 예물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가 하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바르고 선이라고 하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지 모릅니다. 그러한 신앙이 남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의 불편과 남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이미 예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는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남은 힘들어하건 말건 버티는 겁니다. 신앙이 무서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버티는 이방인들 : 천륜을 외면하는 편협한 신앙

 

 

겉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어떻게 해야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요나는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12절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2)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겁니다. 이 큰 폭풍이 나 때문에 왔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폭풍도 사라질 겁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 부분을 요나가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지고 자기가 책임지고 죽겠다고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더 연구해보니 그것이 아니더군요. 요나가 지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는 것은 죽어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니느웨에 가서 그놈들이 혹시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게 될 수도 있는 말씀을 전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지요. 지독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진다고 합니다. 13절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3)

 

그런데 배에 탄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차마 그렇게 못 합니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민족도 다르고, 또 제비 뽑았더니 저 사람 때문이고, 자기 입으로도 시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냥 바다에 던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원양어선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바다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쨌든 같이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참 묘한 대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 구하기 싫어서 이렇게 남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하나님께 버티고 있고, 이방인들은 요나 때문에 자기들이 죽게 된 마당에도 요나를 살려볼려고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고. 누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입니까?

이렇게 죽을힘을 다하는데도 안 되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요나의 말대로 요나를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들은 요나가 섬기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4절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4)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 사람을 바다에 던지는 일로 그 죄값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가 살겠다고 생사람 사람을 바다에 던지는 것이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인 줄 알지만 우리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봤다는 점만은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담고 있는 기도입니다. 이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벌주고 하실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할 만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할 만큼 하다가 주저앉을 때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도 안다’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인생을 정죄하시기보다는 차근히 대화하시면서 인생의 실타래를 풀어낼 길을 찾아주셨던 주님입니다. 이렇게 천륜을 어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노력한 이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마자 바다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고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받으신 것이지요.

이 사람들이 무슨 고상한 사상이나 철학이나 윤리가 있어서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인간이기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내 고생 안 하려고 남 고생시키고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살자고 남 죽이고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천륜이지요. 고생하는 것 보면 안쓰럽게 여기고, 나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면 미안하게 생각할 줄 알고, 죽게 된 것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많은 니느웨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죽기를 바랍니다. 자기 때문에 배 안에 사람들이 죽을 고생 하는 것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요나에게는 어째서 마땅히 있어야할 천륜이 없는 것일까요? 신앙 때문입니다. 왜곡된 신앙! 요나는 하나님은 선택된 민족만 사랑하셔야지 이방인들인 저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시면 안 된다는 신앙! 이방인은 지옥의 불쏘시개이고 그렇기에 이방인들이 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평가절하하는 편협한 선민사상에 붙들려 있다보니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미안하게 여기는 마음까지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천륜과 함께 가야할 신앙

 

 

신앙이 천륜과 함께 가야지 천륜과 반대로 가면 그건 이미 바른 신앙이 아닌 것이지요. 신천지 같은 곳에서는 부모도 속이고, 신천지교회에 못 나가게 하면 부모까지 고발하라고 교육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천륜을 저버린 가르침은 바른 신앙이 아니지요.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이 외면하고 가지요. 왜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부정해지지 않으려고 그랬습니다. 혹시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다가 그 사람 죽으면 시신에 접촉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부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방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지내고 오는 길인데 그 제사도 효력이 없어진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게 그들의 교리요 신앙이었습니다. 자기네 교리와 신앙에 충실코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런 교리와 신앙은 참된 교리와 신앙이라 할 수 없지요. 요한복음 9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길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던진 질문이 ‘저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였습니다. 누구 죄 때문인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불쌍하잖아요. 불쌍히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혹시 믿지 않는 사람을 지옥의 불쏘시개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이제 그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마을에도 보면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신앙생활 하는 사람 이상으로 천륜을 지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 어려운 시설에 정기적으로 물품을 사들고 찾아가고, 누가 어렵다면 없는 시간 쪼개어서 달려가 도움을 주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거울로 삼아 나 자신을 돌아보라고 붙여 주셨다는 생각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지 않더라도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너는 과연 저만큼 살고 있느냐?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맺는 말

 

 

우리가 살다 보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요. 그런데 큰 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미 다 주어져 있습니다. 천륜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천륜이라는 관점에서 길을 찾고 가면 결국 길이 열립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억울하게 도망자 신세가 되어 동굴 속에 살면서도 천륜을 어기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 망쳐놓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씩이나 찾아왔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자기도 도망치는 신세이면서 그일라 사람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모른 체하지 않고 가서 도와줍니다.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혼자 독차지 하지 않고 골고루 나누어주고, 힘이 없어 전쟁에 함께 나가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챙겨줍니다. 철저히 천륜을 지켜서 살아갑니다. 그럴 때에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것이 증명 되었고 하나님은 연단의 기간을 끝내고 다윗 앞에 대로를 열어주셨습니다. 길을 어려운 데서 찾지 마십시오. 어떤 것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천륜인가, 인간이 지켜야 할 본분인가를 생각하고 힘들어서 그것을 지켜 살려는 방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길 열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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