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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나강해2 하나님의 알람 시계 
본문 요나 1:4~10(구약713) 
날짜 2020-11-22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나 강해 2

성경 : 요나 1:4~10(구약 1287)

제목 : 하나님의 알람 시계

 

요즘 젊은 세대들은 대체로 잠을 늦게 잡니다. 학생들이나 청년들은 11시 12시면 일찍 자는 편이고, 1시면 보통이고 새벽 3, 4시면 좀 늦게 자는 편입니다. 그렇게 생활하다가 직장에 들어가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지요. 알람을 맞춰놓고 자도 너무 늦게 자니까 못듣고 놓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인지 특별한 알람시계들이 등장을 했습니다. 어떤 알람시계는 딱 시간이 되면 시계에서 프로펠러 달린 것이 튀어나와서 방안을 날아다니는데 그걸 잡아야 알람소리가 멈춥니다. 어떤 알람시계는 권총으로 표적판에 정확히 맞춰야 알람이 꺼집니다. 어떤 알람은 아령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아령을 서른 번 들어야 꺼집니다. 안 일어날 수 없겠지요. 재미난 아이디어 제품들입니다.

관성의 법칙이 물리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살이에도 있어서 누가 멈춰주지 않으면 생각 없이 계속 갈 때가 있습니다. 좋은 방향이면 모르겠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누군가가 정신 차리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고집이 있어서 옆에서 웬만큼 말해서는 듣지 않습니다. 말하는 쪽도 한 두 번 말해서 듣지 않으면 얼굴 붉히기 싫어서 놔두지요. 문제 터지면 그때서는 또 ‘왜 그때 좀 더 말리지 않았어?’라고 탓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듣지 않았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들을 때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해서 못 알아들으면 또 저렇게 말씀하시고, 어쨌든 알아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요나는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경고를 외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서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혹시 그들이 경고를 듣고 회개라도 하는 날이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이 틀림없는데, 그게 싫었던 겁니다. ‘저런 나쁜 놈들은 그냥 쓸어버리시지, 뭐하러 기회를 주신단 말인가?’ 하나님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큰바람을 바다에 내리시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폭풍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는 이도 있는데 징계라기보다는 요나를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빗댄다면 요나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알람소리라고나 할까요? 우리 인생에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풍랑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만 필요해서 주시는 겁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다 되면 좋을 것 같지만 그보다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술술 풀려서 그저 즐거운 일만 있고 하면 썩는 줄 모르고 썩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인생의 환각제라고 한다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어려운 일이 찾아오고 하는 것이 인생의 각성제입니다.

 

 

참신앙을 잃은 요나

 

 

큰폭풍에 배가 깨어질 지경이 되자 사공을 비롯한 배 안에 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섬기는 신을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5절을 봅시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5)

 

다들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좀 고상한 측면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먹고 사는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놓고 난 다음에 무슨 청교도신앙이니 개혁주의신앙이니 하는 것이 있는 것이지,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들이고 배부른 샌님들 이야기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 일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 먹고살려고 애를 쓰고 땀 흘리면서 일하는 것이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지금 큰 풍랑이 배를 덮쳐서 배가 깨지기 직전입니다. 다들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들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소리를 듣고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드러누웠습니다.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이런 사람더러 하는 말이 있지요. “니가 인간이가?”

호주에 산불이 크게 났었습니다. 소방관들이 산불을 끄는데, 불을 피해 도망쳐 나온 코알라가 소방관 다리를 붙들고 물을 달라고 애원합니다. 불구덩이에서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소방관들이 자기들 비상 물통을 꺼내 코알라에게 물을 주니까 코알라가 벌컥벌컥 받아마십니다. 짐승도 살려 달라고 하면 어찌 외면합니까? 내 마실 물도 없다면서 코알라를 다시 불타는 산림 속으로 쫓아 보냅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무엇이 있어야 사람이냐?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코알라에게 물 줬다고 칭찬 들으려고 물 주는 것 아닙니다. 코알라에게 물 안 주면 비난 받을까 봐 물 주는 것도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런 조건과는 상관없이 그저 불쌍해서 우러나오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생겨먹은 모양새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성품이 곧 하나님 형상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사람들이 저토록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지자라는 자가 나 몰라라 하면서 배 밑바닥에 가서 벌러덩 누워 잠을 잡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도 대단하거니와 공포에 질려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고서도 살아계신 참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이 이럴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측은지심도 없을 뿐 아니라 가만 보면 지혜도 없어요. 자 보십시오. 요나가 사공들이 죽든 말든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배 밑바닥에 내려가 잠을 잤는데, 진짜 사공들 생명과 자기 생명이 상관없습니까? 사공이 죽으면 자기도 죽습니다. 연결되어 있어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자기 조국 이스라엘이 상관이 없습니까? 상관있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잔인한 짓을 하지 않게 되고 공평과 정의를 지켜 살게 되면 그 덕을 이스라엘이 봅니다. 그걸 생각지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성공이 아닙니다. 참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참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인데, 이는 곧 잃어버린 측은지심과 지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편협해지면 오히려 반대로 갑니다. 딱 선을 갈라서 선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미워하고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뭐가 옳고 그름이 뻔한데도 자꾸 당파적으로 판단을 하다 보니까 비상식적으로 가 버립니다.

 

 

이방인을 통해 꾸짖으시는 하나님

 

 

다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시간에 배밑창에서 나몰라라 잠을 자는 요나를 선장이 발견합니다. 그리고 꾸짖습니다. 6절입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6)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있다니, 선장 눈에 요나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정상이 아니지요.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참 부끄러운 말입니다. 세상 사람이 선지자에게 ‘기도 좀 해라, 이 사람아!’라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예전에 사역했던 한 교회는 도심 가운데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빽빽한 주택가에 주차공간이 부족하다 보니까 밤마다 주차 때문에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싸우기도 하고 주차난이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지상 주차장과 지하 주차장까지 있었는데, 주중에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지역 사람들이 교회 마당에다 주차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럴 때면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송곳을 가지고 외부 차량 타이어를 찔러 펑크를 내는 겁니다. 주민들이 ‘교회 사람들 심보가 저렇게 고약해서 어떻하느냐?’며 싫은 소리를 합니다.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교회입니다. 그 좋은 주차공간 차라리 주민들에게 개방했으면 얼마나 인심도 얻고 좋습니까?

‘야, 이 사람아,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마음을 그렇게 써서 되겠나?’,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거짓말을 그렇게 잘 하고, 싸움도 그렇게 좋아하고 그래서 되겠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참 부끄러운 말들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서도 안 되겠지만 설령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 ‘그래, 내 교회 다니는데 니가 뭐 보태준 것 있나? 왜 시비고 시비가?’ 이러면 더 곤란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이런 말 듣는다는 것 자체를 심히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에 그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어나서, 구하라!’ 히브리어로는 ‘쿰, 카라’인데, 2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실 때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셨는데, 그때 사용하신 단어가 ‘쿰, 카라’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이방인 선장을 통해 한 번 더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믿음 좋은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발람을 보십시오. 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민22:28)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며 쏟아내는 쓴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믿지 않는 집안 사람들 중에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좋지 못한 소리를 할 때 기분이 상하지만 혹시 거기도 내가 집안에서 부족하게 행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로 다양한 방편으로 말씀하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하며 살았는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요나는 정신을 차리지 않습니다. 육신의 잠은 깼지만 영적인 잠은 깨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음 단계를 진행하십니다. 7절을 봅시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7)

 

풍랑이 이는 시기가 아닌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겨울에 기온이 영상 40도 올라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뱃사람들이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찾아왔나 제비 뽑아보자고 한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제비 뽑기를 통해 신의 뜻을 구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더니 정확하게 요나가 뽑혔습니다. 이런 대목을 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 하는 일은 다 무의미하고 헛되고, 믿는 사람이 하는 것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 경향이 있는데 그 생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 42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방 나라 왕인 고레스를 보고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고 부르시면서 고레스를 통해 포로로 잡혀 온 자들을 풀어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해 나가겠다고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좋은 일, 의미 있는 일, 중요한 일이 기왕이면 믿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꼭 그렇게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합당할 때는 그 사람을 쓰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방 사람들의 제비 뽑기를 사용하십니다.

이방인의 제비 뽑기를 통해서 요나를 정확하게 집어 내셨습니다. 주님은 놓치지 않는 분입니다. 도우실 자도 놓치지 않고 요나처럼 도망치는 자도 놓치지 않고 아합처럼 벌주실 자도 놓치지 않는 분입니다. 정확히 찾아내서 복 주실 자는 복 주시고 벌 주실 자는 벌주시고 돌이킬 자는 돌이키게 하십니다. 아무리 코로나 상황이라 해도 믿고 돌이켜야 할 사람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끄시리라 봅니다.

제비 뽑힌 요나에게 이방 사람들이 추궁합니다. 도대체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냐? 이쯤 되니까 요나가 이실직고하지요.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고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바로 그분을 섬기는데, 그분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는 놀라서 더욱 요나를 꾸짖습니다. 10절을 봅시다.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0)

 

‘아니, 이 사람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라면서 그런 분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이 어리석은 사람아? 그리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그런 분의 말씀을 어긴단 말이냐? 어떻게 그런 분을 이런 식으로 대한단 말이냐?’ 이런 뜻이지요. 당대 이스라엘에서 최고 가는 신앙을 가진 사람인 요나가 이방인들 앞에서 완전 바보 쪼다 된 겁니다. 당대 최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평범한 이방 사람들보다 못한 수준입니다. 사실 요나서는 선교의 책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고발서에 가까운 책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 가고 자기가 고백한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예배했다면 그 사람도 거룩해져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다면 하나님처럼 네 편 내 편 없이 두루 사랑하고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다면 정의의 칼날을 남에게만 갖다 대지 않고 자신에게 갖다 댈 줄 알아야 하고,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믿었다면 다른 사람이 내게 좋은 사람 되어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했는가?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겨 왔는가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질문으로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질문을 하면서 일주일을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맺는 말

 

 

알람이 하나 울려서 일어나지 못할 때는 두 개 세 개 맞추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깨우실 때 그렇게 하십니다. 요나에게처럼 풍랑도 보내시고, 사람도 보내시는데 믿는 사람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도 보내십니다. 때로는 격려와 칭찬도 주시지만 때로는 질책과 부끄러움도 주십니다. 또 때로는 문제의 사람이 되게도 하셔서라도 우리를 잠에서 깨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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