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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나 강해1 사망에 이르는 바른 길 
본문 요나 1:1~3(구약1287) 
날짜 2020-11-0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나강해 1

성경 : 요나 1:1~3(구약 1287)

제목 : 사망에 이르는 바른 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 조선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알아보려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냅니다. 그때 단장 격인 정사(正使)는 황윤길이었고 부단장 격인 부사(副使)는 김성일이었습니다. 황윤길은 황희의 후손답게 성격이 유하였고, 김성일은 성격이 대쪽 같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치고 명나라로 가는 육로 무역길을 내기 위한 전쟁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군사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군조직이나 무기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일찍부터 일본에 들어와 있던 포루투갈 사람들로부터 조총을 구입하고 또 만드는 비결까지 습득하여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조선에서 사신이 가면 높이 떠받드는 분위기였는데, 이때는 무례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함부로 대하였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전쟁을 일으킬 분위기였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조정에 보고를 하는데 정반대의 보고를 합니다. 단장인 황윤길은 일본이 조만간 틀림없이 쳐들어온다고 보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럴 일은 없다며 단호하게 말하면서 일본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은 두 패로 나뉘어 싸웠고 결국 전쟁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습니다. 2년 후인 1592년 4월, 봄에 일본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고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과거 보러 가는 사람도 그것보다는 더 결렸습니다. 거칠 것 없이 갔다는 말이고 그만큼 조선은 완전 무방비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보면 김성일도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전쟁 난다고 보고하면 백성들이 겁에 질리고 나라가 혼란에 빠질까봐 그렇게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같은 당에 속한 사람이어서 대신 변명을 해 준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일각에서는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어서 반대당의 의견을 지지하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일부로 반대 의견을 낸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더 황당한 이유입니다. 물론 이후 김성일은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실제로 전사합니다. 목숨을 바쳐 속죄를 한 셈이지요. 그렇지만 김성일의 보고는 두고두고 역사에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학문도 높았을 뿐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지금까지 존경을 받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 김성일도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에는 너무나 큰 실패를 한 셈입니다. 김성일이 볼 때에는 바른 판단이었던 것이 조선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판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 이야기가 길었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그때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켜서 곤욕을 치루기도 하고, 그때는 꼭 필요한 말이라 생각해서 했던 말인데 나중에는 아니한만 못한 것이 되어서 곤란을 겪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오늘부터 요나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을 무려 46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설교하는 제가 힘들어서 이번에는 구약으로 가서 좀 짧은 성경을 설교해야겠다 해서 요나를 선택하였습니다. 대부분 선지서가 어렵습니다만 요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쉽습니다. 거기다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서는 너무 길어서 분량에서 벌써 질리는데 요나서는 짧아서 부담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요나서는 선지서 중에서는 다니엘서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선지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사실 쉬운 성경이 아닙니다. 흔히 알기로 요나서는 요나가 뉘우치고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이야기로 알지만 사실 전혀 다른 주제를 말씀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더 상세한 내용은 요나서를 살펴 가면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꼬이고 막힐지라도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일이 하기 싫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와 반대 쪽에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3절을 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3)

 

참 신기한 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 하기 싫다고 도망가는데, 일은 잘 풀립니다. 욥바라는 항구로 내려갔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매일 출항하는 정기여객선이 있던 것도 아니고 계절풍이 불 때만 무역선이 다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배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태워달라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태워줍니다. 배삯을 지불할 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술술 잘 풀리던 길이 나중에는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빠져 죽기 직전까지 가는 길이 되고 말지요.

그러니 우리가 일이 술술 잘 풀린다 해서 마냥 좋아하거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곤란합니다. 반대로 지금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뭔가 꼬이고 복잡하게 돌아간다 해서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않으신다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실망해서도 안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를 보십시오. 엘리사가 아람 나라 국방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자 나아만이 너무 고마워서 준비해온 엄청난 예물을 주는데 엘리사가 극구 받지 않습니다. 게하시는 그게 너무 아까웠던 나머지 게하시는 엘리사 몰래 나아만을 좇아가서 그러지요. ‘지금 엘리사 선생님께 제자 둘이 새로 왔는데 그들에게 줄 옷 두 벌과 은 한 달란트가 필요하다 하시면서 저더러 받아오라 하셨습니다.’(왕하5:2) 거짓말이지요. 그런데 나아만이 속아넘어간단 말이지요. 뿐만아니라 은 한 달란트 달라했는데 두 달란트를 주는 겁니다. 얼마나 일이 잘 풀립니까? 그렇다고 이 길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입니까? 아닙니다. 결국 나중에 게하시는 나아만에게서 떠나간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반대로 정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인데 쉽지 않고 막히고 꼬이기 일쑤인 길도 있습니다. 올해 3월 3일 독일 보쿰에서 생을 마감한 최정규라는 분이 있습니다. 1950년생으로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독일에 가서 광부가 될 사람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밥이라고 먹어볼 요량으로 지원하여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독일에 가서 광부가 된 한국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끔찍할 정도로 열악하고 힘들었습니다. 현대판 노예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서 이주노동자들의 지옥같은 인권을 위해 힘써주던 독일이 목사님을 만나서 글을 배우고 인생에 눈을 떴습니다. 그때부터 이분도 독일에서 이주노동자로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어려움은 이루 말로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단한 경제성장을 이룬 조국을 보면서 한없이 기뻐하면서도 한국땅에서도 자기같은 이주노동자들이 자기가 겪었던 똑같은 차별과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국으로 와서 동남아를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몸에 병을 얻어 올 봄 세상을 마감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고귀한 가치와 참된 가치를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곡절이 많은 길을 걸으셨듯이 참된 길에는 막힘도 많고 꼬여 있는 구간도 많습니다. 그러 내가 가는 길에 막힘도 많고 꼬임도 많다하여 쉽게 이 길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 아닌 것 아닌가하고 속단하거나 미리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도 그런 길을 가셨습니다. 정말 뜻을 바로하여 가다보면 어려운 만큼 값진 열매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 보기에 좋은 길이나 종국에는 사망의 길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반대로 당장에는 힘들고 복이 없고 억울한 길이지만 실은 생명의 길, 복된 길이 있습니다.

 

 

내키지 않는 역할과 일일지라도

 

 

그러면 선지자나 되는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지 않고 정반대 길로 도망을 쳤는가? 이것은 배경 역사를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아주 오래된 나라로서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큰 나라입니다. 힘이 없을 때는 움츠리고 있다가 힘이 세지면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여 죽이고 빼앗는 일을 저지르는 깡패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힘이 없어 움츠리고 있다가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부터 다시 힘이 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디글랏 빌레셀(왕하15:19,29 16:10)이라는 왕이 등장하면서 엄청나게 힘을 키우더니만 드디어 주변 나라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지요. 거기에 아람이란 나라가 망하고 좀 더 지나면 이스라엘도 망합니다(이스라엘이 멸망시킨 앗수르 왕은 사르곤2세). 그러니 요나가 좋아할 리가 없지요. 요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 지역 나라들에 대해서는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힘만 세졌다 하면 쳐들어와서 죽이고 빼앗아가는 습성이 있는 나라인데 좋을 리가 없지요. 꼭 중국하고 비슷합니다. 중국도 원래 좀 큰 나라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습니다. 옛날 초한지나 삼국지를 보면 그때 중국은 지금 중국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크기였습니다. 지금 중국은 주변 나라들을 잡아먹어서 커진 겁니다. 신장위그르를 잡아먹었고 원래는 몽골 땅이던 내몽골도 잡아먹었고 6.25 전쟁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우리나라에 집중되고 있던 1951년에 티벳을 잡아먹었습니다. 지금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 역사까지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약해지면 역사뿐 아니라 나라까지 잡아먹으려 들겠지요.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어찌 보면 중국은 깡패 국가이지요. 우리나라는 이웃이 좋은 이웃이 없어요. 틈만 보이면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이웃만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나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가지고 있는 감정이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외치라는 겁니다. 2절 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항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2)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은 당장 심판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내가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희들 죄가 쌓였으니 심판을 받을래, 아니면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래, 선택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선지자인데 이걸 모를 리 있겠습니까? 회개하면 저 미운 놈들 심판을 면하는데 그 메시지를 전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전하라는 말씀 전하지 앟고 도망친 겁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14장 16절을 보면 요나가 잘 전한 말씀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토를 확장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에게 좋은 메시지지요. 물론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선지자라면 이래서는 안 되지요. 자기 마음에 들고, 자기 이해관계와 맞으면 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하지 않고 도망치고, 그렇게 하고서 선지자라 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도망자 신세가 되어 아둘람 굴에 숨어 지낼 때 다윗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오는 사람들이 전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다윗도 지금 도망쳐 나와서 기댈 곳이 필요한 입장인데, 기왕이면 돈 많은 사람, 위로와 격려 잘하는 사람, 군대를 가진 사람, 뭐 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원통함을 매일같이 들어줘야 하고, 사람들의 빚을 해결해줘야 하고, 환난이 많고 상처 많은 사람들의 거친 말과 몸짓을 다 끌어 앉고 또 조정해주고 하는 진이 다 빠지는 역할을 주신단 말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이런 사람들과 같이 십 년을 지내면서 성군이 되는 데 필요한 정치력과 품성을 이때 다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 능력을 배웁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품을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배우게 됩니다. 조화되기 어려운 거칠고 힘든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서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요나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역할이나 일이나 사람이 주어졌을 때가 실은 주님이 내 믿음을 성장시키시고 복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 때입니다. 신대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이 자기는 어딜 가든지 거기서 가장 모가 많은 사람, 제일 힘든 사람을 놓고 기도를 집중적으로 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을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만큼은 품어낸다고 하더군요. 그분이 지금 대구 동신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맞습니다. 내키지 않는 역할, 일, 사람을 감당하려고 애쓰다 보면 남들보다 쓰라린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때 깊이 패인 곳에 더 많은 은혜가 쌓이게 됩니다. 내키지 않는 역할, 일, 사람이 곧 축복의 통로요, 그걸 감당하는 길이야 말로 내 영혼이 살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윤택케 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맺는 말

 

 

오늘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갔다는 대목입니다. 참 어리석은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면 모든 길이 사망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인식하고 살아가면 그 길이 평탄한 길이든 구불구불 굽은 길이든 상관없이 그 길은 생명이 되고 복이 되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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