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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46 재활 전문가

2020.10.26 01:06

배재우전도사 조회 수:128 추천:1

제목 요한복음강해46 재활 전문가 
본문 요한복음 21:15~23(신약185) 
날짜 2020-10-2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46

성경 : 요한복음 21:15~23(신약 185)

제목 : 재활 전문가

 

 

어제 뉴스를 보니까 곧 있으면 다리에 착용하는 로봇이 판매된다고 합니다. 장애가 있어 걷지 못하던 분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재활해 낼 수 없던 것도 과학이 발달하면서 재활을 해 내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세상입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한 세상인데 사람의 정신과 마음은 더 많은 고민과 문제로 병들어가고 있는 역설적인 세상이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 말 중에‘영끌’이란 말이 있습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입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이 말을 주로 쓰는 곳은 이런 곳입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도 연봉이 2500밖에 안 돼! 영혼까지 끌어모아도 겨우 전세 전세집이야! 영혼을 끌어보아서 고민하는 것이 물질, 외모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영끌’이란 말은 요즘 사람들의 팍팍한 삶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오늘날 사람들의 빈약한 정신과 마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과학의 발달로 육체를 재활하는 기술은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사실 더 심각한 것은 점점 빈약해지는 사람들의 마음이고 정신입니다. 과거의 상처들, 패배의식, 비교의식, 우울함, 이런 것들이 건강한 육신을 가진 사람도 건강치 않은 인생을 살도록 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재활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고향에 돌아가 예전처럼 고기잡는 생활로 살아가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이름이 나오지 않는 두 제자, 도합 일곱 명은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가서 다시 고기잡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고 손과 옆구리 상처를 확인하기까지 했으면 지금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어야 하는데 예전 생활로 돌아갔다는 것이 의아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부활을 믿게는 되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활하지 못한 채 여전히 패배자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지만 여전히 자책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자아상에 깊이 붙들려 있었다던 것이지요. 전형적인 실패자,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예전 주님 따라 사마리아 수가성에 갔을 때 인생을 여러 번 실패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던 여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자기들이 그와 같은 신세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 인생 모를 일입니다. 그토록 주님 곁에서 승승장구하던 제자들이 지금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신세가 되다니 말입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 함부로 판단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고기잡이도 허탕만 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과거를 치료 하시는 재활전문가

 

 

역시나 어김없이 주님이 먼저 찾아오시지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 하셨고 제자들이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습니다. 일부로 여러 해 전 처음 이들을 찾아오셨을 때와 비슷한 상황을 만드십니다. 예전 생각 물씬 났겠지요.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들을 위해 모닥불을 피워놓고 친히 준비하신 저녁식사를 제자들과 나누셨습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와 그 유명한 대화를 하십니다. 15절을 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

 

주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2:42)며 이름을 바꾸어 주셨었는데, 지금 예전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예전 이름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참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게바, 견고한 반석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자기는 반석처럼 살지 못했거든요. 그리고‘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될 것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유가 있지요. 최후만찬석에서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저들보다 제가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라는 호언장담 아닙니까? 그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신 겁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찔렸을까요? 얼굴이 벌개졌을 겁니다. 한 번만 물어보셔도 바늘방석인데 세 번을 물어보시니 죽을 지경이었을 겁니다. 이것도 베드로가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찔리고 민망한 질문을 세 번씩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차마 제 입으로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못합니다. 그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만 대답합니다. 그래도 그 고백을 세 번 하도록 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씩이나 다시 일을 맡겨주시겠다 하십니다. 스스로 부적합자라 여기던 베드로에게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살펴보면 주님은 베드로가 제일 힘들어하는 아픈 기억들, 부끄러운 기억들을 일부로 떠올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베드로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묻어두고 낙향하여 살아간다 해서 과거가 끝난다거나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유는 실패의 기억을 되살려 그 아픈 사건, 그 부끄럽고 찔리는 사건 앞에 다시 설 때에 일어납니다. 대면하고 직시해야 하는 것이지요. 묻어두고 도망치면 절대 치유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문제가 되고, 다시 터져나와 발목을 잡고 맙니다. 주님은 아프더라도, 힘들더라도 그때 일을 대면하도록 하십니다.

예전 청년시절 기도할 때마다 그날 있었던 일 중 실수했던 일, 잘못했던 일, 자신감 없이 움츠러들고 회피했던 일들을 자꾸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오래 전 일까지 기억나게 하시더군요. 그러면 한참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고 아파하면서 기도했었습니다. 나중에 상담 수업을 듣다보니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과거의 아픔을 다시 떠올려 직면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치유가 일어난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내가 넘어졌던 일과 비슷한 상황을 다시 만나게 하시고 또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힘들고 아파도 또 비슷한 상황으로 몰아넣으십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하시고, 자꾸 생각나게 하셔서 마음을 씻어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상처를 아물게 하시고 극복하게 하십니다.

 

 

미래를 치료 하시는 재활 전문가

 

 

사람이 패배의식과 또 큰 상처에 붙들려 있으면 자꾸 위축되고 움츠러든다든지 아니면 불만과 원망으로 사나워진다든지 합니다. 양상이 조금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결국 현실을 당당하게 대면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심리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의 과거만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미래도 치료하십니다. 새로운 나로 살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주님이 베드로의 과거를 치료하신 다음 그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신 대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8)

 

이제부터는 베드로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띠로 묶어서 네 원과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고 다니게 될 거이다, 이런 말씀인데, 이것은 베드로가 더 이상 자기 원하는 인생이 아닌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시는 회복이라는 것은 단지 과거의 상처가 아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를 새롭게 하시어 새로운 내가 되어 살게 하시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과거가 치유됨으로써 내가 새로운 나가 되고, 새로운 나가 됨으로써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해당 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미성숙할 때는 인생을 자기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갖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으려 합니다. 가고 싶은 곳에 갑니다. 먹고 싶은 것은 먹고야 맙니다. 하고 싶은 것 꼭 하려고 듭니다. 무리해서라도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후유증도 만만치 않게 겪곤 하지요. 그리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불만하고 원망도 하고 그럽니다. 실패감이나 패배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돼도 좋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게 됩니다. 살아오면서 원하는 것은 안 되고, 원치 않는 일을 겪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제는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무리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군에 간 첫째가 강원도 양구에 있는 GOP사단으로 자대배치 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배치받은 사단을 찾아보니 부대들이 죄다 1천 미터급 산 위에 있어서 겨울에는 영하 25도 이하로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기분이 안 좋더군요. 왜 하필 그 힘든 곳인가, 싶은 게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운전병 보직을 받고 후반기 교육을 강원도 홍천으로 갔기에 그것 마치면 강원도에 배치될 것은 알았습니다. 기왕 강원도라면 그래도 원주 정도로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라던 바와는 정반대로 된 겁니다. 그날 하루 기분이 몹시 안 좋았고 다음 날도 마음이 별로였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되더군요. ‘내 아들은 편하고 좋은 데 가야 하고 남의 아들은 철원 양구 인제 원통 가도 되나? 내가 너무 생각을 좁게 하고 있었구나!’ 반성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고 더구나 목사가 되었어도 여전히 내가 바라는대로 돼야한다는 고집과 미성숙함이 여전히 내 속에 강하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부끄럽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철이 든다고 하지요. 옛사람들은 젊은이가 혈기방장하게 행하던 것을 그치고 이제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때에 맞춰 살기 시작하면 그걸 보고 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철이 든다는 것은 자꾸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만과 원망을 품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섭리를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철이 들면 이제는 꼭 이래야 된다고 하는 그 바라는 마음을 품지 않게 됩니다.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맡겨 사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무엇을 주시든지 다 뜻이 있어서 주셨겠지 하고 그저 받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실패의 자리에서 벗어나게만 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뜻에 맡겨 사는 성숙함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여기까지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옆에 있던 다른 제자의 인생이 궁금했습니다. 그 제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정황 상 요한입니다. 베드로와는 고향 친구이면서 열 두 제자 중 첫 자리를 다투던 사이였습니다. 아마 은근한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고 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때 주님이 그러시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 사람 천년만년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사람 인생과 네 인생 자꾸 비교하지 말고 너는 너에게 주어진 길만 가면 된다. 그렇지요. 요한의 인생은 요한의 인생이고 베드로 인생은 베드로 인생입니다. 그걸 자꾸 비교해 봤자 무슨 소용있습니까? 내가 좀 낫다 싶으면 교만한 것이고, 내가 좀 못하다 싶으면 우울해질 뿐입니다. 낫고 못한 것도 다 내 기준입니다. 겉으로 볼 때 나아보여도 그 속사정은 안 살아보면 모르는 것인데, 그런 무익한 비교를 하면서 내 인생을 자꾸 감옥에다가 가둘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속 비교하다가 나중에는 자식 인생 놓고 비교하고, 또 나중에는 손자 가지고 비교합니다. 그것도 자기 인생을 사는 길은 아닌 것입니다. 멀건 된장에 고추장 넣고 비벼먹어도 내 입맛에 맛있으면 그건 맛있는 건데, 이웃집에 오늘 고기 먹었다는 소리 들으면 괜히 된장에 고추장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내것의 소중함, 내 삶의 소중함, 내 인생의 소중함을 놓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그분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 때 얻는 유익 중 정말 큰 유익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만족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마음이 점점 자라면 비교하는 병적인 마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 또한 주님이 우리를 데리고 가시려는 성숙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만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미래까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맺는 말

 

 

작년에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고 수술을 하고 한동안 깁스를 하고 다녔었습니다. 깁스를 풀고 재활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 기억이 납니다. 재활 치료사가 이쁘장한 아가씨였는데, 미소를 지어가면서 발목을 사정없이 꺾더군요. ‘아야!’라고 하는데도 ‘아프지요?’부드럽게 말하면서 계속 꺾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다고 봐주고 하면 발목이 굽어지는 각도가 영영 나오지 않게 되어 평생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환자가 아프더라고 재활치료사는 봐주지 않고 꺾습니다. 주님도 우리의 아픈 과거를 힘들어도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치료해 내십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치료해 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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