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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45 비주류에게 박수를 
본문 요한복음 20:24~29(신약183) 
날짜 2020-10-1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45

성경 : 요한복음 20:24~29(신약 183)

제목 : 비주류에게 박수를, 의심에게 찬사를

 

 

쿠바라는 나라를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야구로 유명하지요. 전문여행자들이 그렇게 가보고 싶어하는 나라라고 합니다. 쿠바는 미국 바로 밑에 있는 섬나라입니다. 지도를 찾아보니까 미국 동부 최고 남쪽에 플로리다가 있는데, 거기서 140km 정도 거리에 있더군요. 왜관에서 부산까지가 164km정도니까 미국 바로 코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쿠바는 50년 전에 미국에게 밉보여서 미국이 경제봉쇄를 해 버렸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쿠바와 무역을 하는 나라는 미국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였지요. 전쟁은 단번에 죽이는 것이라면 경제봉쇄는 서서히 피를 말려 죽이는 방법입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쿠바는 세계무대에서 퇴출당하여 가장 가난하고 발전이 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다들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뭐든지 재활용을 해서 쓰면서 경제봉쇄를 이겨낸 것입니다. 자동차 같은 경우는 50년대 60년대 미국에서 들어온 골동품 차들을 고쳐쓰고 고쳐쓰고 또 고쳐쓰면서 지금도 타고 다닙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점이 있습니다. 땅이 오염되지 않습니다. 유엔 환경기구에서 발표한 바로는 전세계에서 탄소발생량이 가장 낮은 나라, 오염이 제일 안 된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식량도 봉쇄되다보니까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겠지요. 전국민이,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다 텃밭을 가꾸어 살아갑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의사도 텃밭을 일구며 삽니다. 경제봉쇄로 비료 만들 원자재 같은 것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나라 전체가 어쩔 수 없이 유기농 농사를 짓습니다. 나라전체가 유기농 농사를 짓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국민 건강이 좋을 수밖에 없겠지요. 질병률이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설령 아프더라도 병원비 약값이 전부 무료입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도 세계가 알아주는데, 쿠바는 아예 전부 무료입니다. 그리고 의약품도 다 봉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약과 백신을 자체 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의약과 백신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빈익빈 부익부가 없습니다. 의사월급이나 노동자 월급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습니다. 부자나라는 아닌데 모두가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는 나라, 상대적 빈곤이 없는 나라, 사람들이 불만이 없이 사는 나라입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세계무대에서 퇴출되어 비주류로 전락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건강하고 안정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쿠바는 국제사회에서 꼭 주류가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의미있는 사례입니다. 언제나 박수는 주류의 몫이고 비주류는 실컷 일해도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주류가 되려고 애를 쓰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주류로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비주류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고 박수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얼만 좋을까요?

 

 

비주류 도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입니다. 도마도 어찌보면 비주류인간이라 할 수 있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던 관계로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도마에게 말하지요. 그때 도마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25절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

 

손의 못자국에 내 손가락 넣어보고 창자국난 옆구리에 손가락 넣어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합니다. 안 믿어지고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의심이 많아요.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믿음인데 이렇게 의심이 많으면 신앙에서는 결격사유입니다. 적어도 신앙에서는 주류가 되기 어려워요. 제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학창 시절, 믿음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제일 큰 고민은 ‘왜 나는 저 친구들처럼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일까’였습니다. 쉽게 믿고 쉽게 감동 받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기도하는 친구들 보면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잘 믿어지고 감동 잘 받고 눈물 많은 것보다 신앙에서 좋은 것이 없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신앙의 주류가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여겨졌습니다. 반면, 안 믿어지는 것,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는 비주류가 되게하는 조건들 같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저마다 믿음을 뽐내듯 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확실히 비주류입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방문하신 자리에 혼자만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이 있고 난 후 다들 예수님 만난 이야기로 떠들썩할 때 도마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거든요. 신앙공동체에서 신앙체험이 없는 것만큼 소외감을 느끼는 일도 없습니다. 다들 하나님 만난 이야기, 예수님 체험한 이야기, 성령체험 한 이야기, 뭐 이런 이야기들 하는데 나는 할 이야기가 없을 때 처참하지요. 적어도 신앙의 세계에서만은 철저히 비주류가 되는 겁니다.

 

 

비주류의 주체성

 

 

그런데 도마는 비주류적 성향과 기질을 가졌다해서 주눅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아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14:4)고 하셨을 때 도마가 대뜸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요14:5)라고 했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 하지도 않고, 침묵으로 모르는 것을 덮지도 않았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당당히 말하였습니다. 주체성이 있는 것이지요. 괜히 어쭙잖게 주류흉내를 내지 않는 겁니다.

저는 도마처럼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창시절 마지막 여름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회장이라는 부담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내가 회장이니까 후배들에게 은혜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지금으로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부담감이었습니다. 수련회에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날 저녁 집회가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여기저기서 기도가 터지고 눈물이 터지고 은사가 터지고 하는데, 부담감과 강박감이 커서였는지 저는 기도도 터지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얼굴을 들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적 충만이나 체험이 은혜의 전부는 아니지요. 은혜의 진면목은 하나님 말씀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어려서인지 이런 것도 몰랐고, 또 자신에게 솔직하지도 못했습니다. 도마는 솔직하기라도 했습니다. 주님 앞에는 솔직한 것이 가장 좋습니다.

비단 이런 신앙생활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괜히 주체성 없이 어쭙잖게 주류 흉내를 내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모르면 솔직하게, 뱁새가 황새 흉내 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황새 다리가 아무리 길어도 뱁새에게는 뱁새 다리가 제일 잘 아울리는 법입니다. 형편 따라 갖추고 입고 먹고 살면 됩니다. 황새 흉내 낼 필요 없습니다. 가랑이 찢어집니다. 우리 조선 사람 얼굴에는 조선 사람 코가 제일 어울리고, 조선 사람 눈이 제일 예쁩니다. 괜히 돈 들여서 서양사람 코 만들고 서양사람 눈 만들어봤자 기계처럼 보이고 어색할 뿐입니다. 눈이 덮여서 보기가 어렵거나 의료목적으로 필요해서 하는 것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형편도 얼굴도 성향과 기질도 비주류라도 주체성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비주류에게 박수를, 의심에게 찬사를

 

 

오늘 본문의 묘미는 이런 도마를 위해 주님이 한 번 더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이번에 나타나신 것은 전적으로 도마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26~27절을 봅시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도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6, 27)

 

이 대목을 예수님이 믿음 없다고 도마를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번에 나타나신 것은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도마가 지난 번 제자들에게 못 믿겠다며 했던 말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파격적인 제안을 하시지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직접 만져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런 다음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시지요.

이 대목을 실감 나게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1601년에 그린 <의심하는 도마>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친히 옷을 젖혀서 옆구리 창 자국을 내보이시고 의심하는 도마의 손목을 잡고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놀란 도마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생물학자처럼 주님의 상처를 들여다 봅니다. 의심하는 제자의 손을 잡고 당신의 상처 자국에 넣어 보도록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온갖 인간군상들의 죄를 더럽다 외면치 않고 모조리 짊어지신 바로 그 모습이고,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하고 당신의 시신이 짐승밥이 되든 말든 버려둔 채 숨어버린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의 그러한 모습까지 다 받아들이고 용서하였으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말라는 의미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모습입니다. 도마의 의심까지 다 품으시는 것이지요. 사실 이 그림은 그림을 그린 카르바조에게는 신앙고백과 같은 그림입니다. 카르바조야 말로 철저하게 비주류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성질을 다스리지 못해 심심하면 폭행을 해서 주변인들에게 골칫덩어리로 취급받았습니다. 원래 이름이 미켈란젤로인데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이름이 같아서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출생지역을 부르다 보니 출생지인 카르바조가 아예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름까지도 주류에게 밀려 비주류의 길을 걸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림 그리는 방식도 당시에는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화풍은 성경이야기를 그린 성화를 그릴 때 거룩함이 느껴지도록 그리고, 밝고 화사하게 그렸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카르바조는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예수님도 거룩하기보다는 일반 사람과 다를 바없이 사실적입니다. 그리고 중심인물 빼고는 사람도 배경도 어둡게 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사람들에게 카르바조에 대해 그림을 특이하게 그리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성화를 성화답지 않게 그리는 사람, 예수님을 불경스럽게 그리는 사람, 그림으로 신성모독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림분야에서 이단자였던 셈이지요. 그러니 카르바조 자신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카르바조 그림에 나타나는 어두운 배경과 등장인물들은 사실 카르바조 자신의 마음, 자신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타고난 걸 그렇게 타고났으니 바꿀 수도 없어요. 까다롭고 폭력적인 성격과 독특한 그림방식으로 누구에서도 쉽게 환영받지 못한 채 시대의 이방인으로, 비주류 인생을 살아온 지친 자신을 정말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유일한 분이 예수였던 것이지요. 그림에서 도마의 손목을 붙잡고 당신의 옆구리로 이끌고 계신 주님의 손이 유독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자신에게는 한줄기 빛이었다는 고백입니다.

결국 카르바조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결과 당시에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며 비판과 비난을 받던 그의 그림방식은 르네상스를 끝내고 바로크시대의 문을 열어젖혔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가 바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입니다. 카르바조는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의심은 죄인가? 비주류는 아름답지 못한 것인가?’ 그림을 통해서 또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마음까지도 받으셔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의심도 찬사를 받기에 합당하다.’ ‘주님 안에서는 주류의 인생만 아니라 비주류의 인생도 충분히 아름답다.’

정말 그렇습니다. 뭣 하나 쉽게 아멘하지 못하고 정말 그럴까하고 물음표를 던지던 성미가 있던 저였는데, 그런 성미로 인해 자꾸 성경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다보니 성경을 계속 팔 수밖에 없게 되었고, 성경에 매이게 되더군요. 의심병이 없었으면 아마 성경 던져놓고 다른 것 붙들고 있었겠지요. 의심이 있어 주님을 놓지 못하고 의심이 있어 성경을 놓지 못하는 겁니다. 의심이 고마운 것이고 의심까지도 사용하시는 주님이 감사한 겁니다. 비록 주인공의 인생을 살 때가 적고 언제나 조명받지 못하는 조연과 비주류의 인생을 산다하더라도 주님 안에서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았던 대부분 신앙의 선조들은 당대에는 어김없이 비주류였고 변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충분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맺는 말

 

 

높은 산꼭대기에 든 단풍은 찾아주는 이가 적습니다만 그렇다고 낮은 언덕 많은 사람이 찾아주는 단풍에 비해 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더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의심 많은 도마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를 충분히 수용하고 받아주셨습니다. 도마의 의심과 신앙공동체에서 비주류일 수밖에 없던 그의 인생에 찬사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이 격려가 여러분들과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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