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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44 세 가지 필수품 
본문 요한복음 20:19~23(신약183) 
날짜 2020-10-1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44

성경 : 요한복음 20:19~23(신약 183)

제목 : 세가지 필수품

 

 

오래전 어떤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신사가 뱃사공더러 묻습니다. “자네, 문학을 좀 아는가?” “저 같은 사람이 무슨 문학 같은 걸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어허, 인생이 담긴 문학을 모른다니 인생의 삼분의 일을 모르는 걸세, 그럼, 철학은 좀 아는가?” “아니요, 전혀 아는 게 없습니다.” “어허, 철학을 모른다니 인생의 절반을 모르는 걸세!” 자꾸 이런 식으로 하니까 속에 열불이 난 뱃사공이 강 중간쯤 갔을 때 배를 뒤집어버렸습니다. 신사도 빠지고 뱃사공도 빠졌습니다. 연신 물을 마시고 어푸어푸 하는 신사를 향해 뱃사공이 물었습니다. “신사양반, 헤엄은 칠 줄 압니까?” “아니!” “어허 큰 일이네, 강에서 헤엄을 칠 줄 모르면 인생 전부를 모르는 건데!”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필수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소풍 갈 때 삶은 계란과 칠성사이다가 필수품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니지요. 한때는 필수품이라 생각한 것이 살아보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많습니다. 젊을수록 이것도 있어야 되고 저것도 있어야 된다 생각합니다. 필수품이 많아요. 그러나 사실 인생은 매듭을 잘 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의 매듭을 풀고, 성장과정이나 인생 여정에서 피치 못하게 생긴 부모와의 매듭을 풀고, 또 살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주변 사람들과 이런저런 찌꺼기가 쌓이기 마련인지라 그렇게 쌓여서 생긴 매듭을 하나씩 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는 바다처럼 모든 것을 담아내는 모습으로 가는 것이 인생에서 필수로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이 실은 푸는 이야기입니다. 미움과 시기와 다툼, 그리고 살인의 역사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매듭을 만들고, 또 하나님 뜻을 저버리면서 하나님과도 매듭을 만들어 사는 인간의 역사가 한편에 있다면, 이런 인간을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때로는 혼을 내시고 때로는 품어주시면서 매듭을 풀어내는 하나님의 역사가 한편에 있습니다. 그게 성경이야기입니다. 인생이 푸는 역사라고 할 때 거기에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지금의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이 두려워서 숨어 있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도 유대인에게 잡혀서 어떻게 될까봐 문을 닫아 잠근 채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문을 잠가놨는데 들어오신 겁니다. 그러잖아도 공포에 떨고 있는데 얼마나 더 놀랐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주님의 첫 인사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19).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

 

 

그런 다음 주님이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로마 군인들이 손에 못을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었는데, 그 자국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뭐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못 박히고 창에 찔릴 때 내버려 둔 채 도망치고,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장례도 치러드리지 않고 도리를 저버렸는데, 여러분 같으면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 기쁘겠습니까,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까?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 주신 것이 너무 고마워서 입니다. 함께 하겠다 해놓고 다 도망치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해서 정말이지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나셨으니까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살아 와 주신 것이 그저 고마운 겁니다.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할 겁니다. 유원지 갔다가 어린 아들 손을 놓쳐서 잃어버렸습니다. 자책하는 마음으로 하루도 마음 편히 살지 못했는데 30년 후에 극적으로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만약 아들이 부모 없이 고생 하다가 일찍부터 불량자가 되고 비관적인 사람이 되었다면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훨씬 더 컸을 건데, 자기보다 더 형편 좋은 양부모 만나서 누릴 것 누리면서 자라고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타나니 너무너무 다행이고 고마운 겁니다. 제자들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2의 기회가 주어졌잖아요. 그런 것에서 오는 안도감, 고마움, 이런 감정이 섞여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이고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시는 주님이 ‘너희가 날 버리고 부인하고 외면하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했다, 그럴 수 있냐,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봐라!’ 이런 의미와 태도였다면 제자들이 어찌 기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 봐라. 내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었던 예수다. 전에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죽은 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그 일을 위해서 왔고, 이제 그 일을 다 이루고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살아났다! 너희가 나를 부인하고 도망쳤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그런 너희의 약함까지도 내가 다 짊어지고 죽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느냐?’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시는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시는 주님의 분위기가 이랬기에 제자들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잊어주시는 능력

 

 

그러신 다음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인사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의 허물과 죄를 다 짊어졌고, 너희의 허물과 죄를 잊었으니 평강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을 보면 이 점을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25). 간과는 넘어가 준다, 용서한다, 잊어준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는 우리 죄를 잊어주시는 것입니다. 어째서 잊어주십니까, 어째서 용서해 주십니까? 예수께서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노아시대 때 땅에 널리 퍼진 인간이 땅을 죄로 뒤덮고 하늘까지 죄를 쌓았을 때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을 하셨지요.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족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그 향기를 받으시고는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하겠다며 은혜의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시지요.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3)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무지개가 등장하고 무슨 동화 같습니다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무지개가 히브리어로 ‘케쉐트(קשת)’인데, 무지개도 되고 활이라는 말도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창세기 9장 13절 빼고는 전부 활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활은 각궁이라 해서 3자 모양이지만 저 이스라엘이나 다른 나라의 활은 거의 무지개와 같은 반원모양이었습니다.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는 말씀은 내 활을 구름 속에 걸어둔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지요. 마치 전쟁을 끝낸 장수가 무기를 벽에 걸어두듯이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걸어둔다는 것은 다시는 활을 쏘지 않겠다,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둔 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무지개가 하늘을 향해 둥그렇습니다. 그게 활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화살을 걸어 쏘면 땅에 있는 사람이 맞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 하시면서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신 것은 너희의 모든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지고 내가 화살을 맞겠다는 뜻인 것이지요.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실제로 대신 짊어지시고 심판을 받아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잊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데, 하나님의 능력 중 가장 큰 능력이 바로 대신 짊어지시고, 잊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그걸 잊지 못하고 자책한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잊지 못하고 또 꺼내서 자책하고 또 자책하고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배신하고 저주하고 도망친 제자들까지 잊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평강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 잊어주는 능력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다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하)고 하십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요(22). 그리고 이어서 사명의 말씀을 주십니다.‘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연결시켜서 풀어본다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서 용서와 화평을 이루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니 너희도 세상에 나가서 용서와 화평의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용서와 화평의 복음을 행함으로 전하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평화의 복음, 곧 용서의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불어넣으신 것은 이 일을 사람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하라는 의미이고 또 성령의 능력이라야 해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 일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자꾸 나누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되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용서해야 합니다. “이건 내가 용서할 수 있어!” 용서할 수 있는 문제라고 분류 하는 문제는 애당초 용서가 필요하지도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는 문제라면 어쩌면 내가 옹졸해서 지금껏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도저히 용납이 안 돼!”라고 하는 바로 그 문제, 용서할 수 없다고 분류되는 문제가 진짜로 용서해야할 문제이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용서 외에는 실은 평화를 누리는 길이 없기도 합니다. 엘바라고 하는 성폭력 피해 여성이 가해자를 용서하기까지의 길고도 아픈 이야기를 쓴 <용서의 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엘바는 자신에게 그 몹쓸 짓을 한 사람을 증오하면서 그런 자는 영원히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며 저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주하며 살아온 지난 9년 동안 그 사건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더럽고 혐오스럽게 느끼면서 지옥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서 더더욱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결국 용서할 수 없는 그 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하면서 이런 말을 하지요. “용서가 유일한 길이야, 그 사람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건 없건 나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어!” 평화를 누리는 길은 용서밖에 없는 것이지요.

용서에는 또 어떤 조건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이기에 저절로 용서가 되고 하지 않습니다. 뭔가 조건이 갖추어져야 용서가 되기도 합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이 그렇게 밉다가도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되면 용서가 됩니다. 더 정확히는 용서라기보다는 너그러워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어 그 사람이 나보다 형편이 더 좋아지면 다시 용서가 안 되기 시작합니다. 또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때의 상처가 아무니까 용서가 됩니다. 이것도 일종의 용서는 용서지요. 더 정확히는 무뎌지는 것이지만요. 그렇게라도 용서가 되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또 크게 다치거나 크게 아프니까 용서가 됩니다. 크게 다치거나 크게 아프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또 이제 곧 세상 하직할 것 같으면 제아무리 큰일도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 풀고 가고 싶고 풀 수 있는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다치거나 아플 때가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풀었던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돈 떼먹은 친구를 어렵게 수소문해서 병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돈 안 받고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미안해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렇게 풀었습니다. 그런데 곧 죽을 것 같던 이 사람이 회복되어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돈 안 받겠다, 용서 한다고 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는 겁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어떤 조건이 되어서 용서하는 것은 조건이 달라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나도 남에게 용서받을 일을 하며 산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마음이 와야 합니다. 나도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죄인이라는 마음에서부터 용서해야 그 용서가 진정한 용서가 되고 오래 갑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가 되려면 성령으로부터 ‘잊어버리는 능력, 잊어버리는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그전까지는 용서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용서가 아닌 겁니다. 사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 우리 인간이 용서를 온전히 이루어낸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사랑이 쉽습니다. 과거지사 없는 사람 사랑하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용서는 어려워요.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용서가 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때 용서하지, 뭐!’ 하면서 용서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용서하려고 하면 용서해 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포기하지 않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도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화평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십니다.

 

 

맺는 말

 

 

높은 산에 가보면 낮은 곳에서는 보기 힘든 기괴한 형상의 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나무들은 세찬 바람을 이기기 위해 몇 그루의 나무가 서로 붙어서 마치 한 그루처럼 자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진 바람을 견디고 살아온 것이지요. 우리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화평을 이루어 같이 살아야 합니다. 화평은 마음의 매듭을 풀어내고 막힌 담을 헐 때 찾아옵니다. 결국 인생은 주님 앞에 가기 전까지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화평, 성령, 용서, 이 세가지를 필수로 하여 주님 앞에 매듭이 없는 모습으로 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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