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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41 해골언덕을 뒤덮은 생명 
본문 요한복음 19:17~27 
날짜 2020-09-2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41

성경 : 요한복음 19:17~27(신약 180)

제목 : 해골언덕을 뒤덮은 생명

 

부산 석포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정삼목사님이 신학교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버스를 타고 오면서 정말 감동적인 노래를 들었는데, 주님과 우리 관계를 이처럼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가 있을까 싶은 노래였습니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대충 이런 노래였는데 혹시 여러분 중에 이 노래 아시는 분 있으면 제목 좀 가르쳐 주세요.” 노래를 아는 학생들이 웃었다고 합니다. 김수미의 <애모>라는 곡이 갖 나왔을 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정삼목사님이 일부러 웃길려고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비슷한 일을 저도 겪은 뒤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를 흘러나오더군요.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완만했던 우리가 지나온 길엔/ 달콤한 사랑의 향기/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듣는 순간 위로가 되더군요. ‘아, 누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상황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만든 노래구나!’ 했습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거야 가프른 이 길을 좀 봐...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아득한 저 끝은 보지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금 힘겨운 코로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가사 아닙니까? 그래서 찾아보니까 이 노래가 8년 전 2012년이더군요. 윤종신이 결혼하는 신혼부부를 위해 지은 곡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을 하면서 앞으로 우리가 헤쳐나가야하는 세상은 연애할 때처럼 달콤한 세상이 아니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야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될 거라면서, 그래도 곁에 있어주는 당신으로 인해 나는 견디고 갈 수 있고, 우리는 마침내 오르막 길을 다 오르게 될 거라며 서로 격려하는 노래였습니다. 상황에 따라 같은 노래가 전혀 다르게도 들릴 수 있더군요.

오늘 우리는 비대면예배를 두 주간 드리고 석 주째 다시 대면예배로 전환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올 해 두 번째 이런 일을 겪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더 반복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정말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몇 년 싸우다 끝날 일이 아니라 이제는 이것이 영원히 계속될 새로운 삶의 형태라고도 합니다 코로나이전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말이지요. 최악의 경우 정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기전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길게 하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상황에서 변하는 것만 바라보고 탄식하다가는 지레 지쳐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그래도 변하지 않고 계속 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해골이라는 곳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간악한 대제사장무리들과 그들에게 선동된 군중들, 그리고 자신의 입신영달(立身榮達)을 위해 정치적 타협을 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으신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곳에 가서 못박히셨습니다. 바로 골고다언덕입니다. 갈보리언덕이라고도 하는데 갈보리(Calvary)는 라틴어 칼바(Calva)에서 온 영어이름입니다. 골고다나 갈보리나 다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언덕을 해골이라고 부른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언덕 모양이 해골바가지처럼 생겼기 때문이라 그러고, 또 어떤 사람은 거기가 예수님 당시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곳이 아담이 죽어서 묻힌 곳이고 아담의 머리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좀 황당한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왜 그곳이 골고다, 해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죄로 죽었던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추악한 인간들의 죄를 홀로 짊어지고 죽으신 장소가 해골이라는 장소였다는 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는 장소로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였다는 것 만큼이나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에 에스겔의 환상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붙고 살이 돋아났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드디어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거짓말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패망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주신 환상입니다. 그것처럼 해골이라는 곳에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요 말씀이요 진리이신 분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해골바가지 같은 인간군상들이 드디어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로 죽었건, 어떤 모습으로 죽었건 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피가 발을 적시고 심령을 적시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나와 상관있는 말씀으로 읽어내려면 이 해골의 정체에 집중해서 이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골이란 곳에 걸어다니는 해골들

 

 

오늘 말씀은 마치 취재기자가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사형집행을 취재하면서 사람들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면서 필요할 때 한마디씩 논평을 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다큐멘터리기법과 매우 비슷한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빌라도와 대제사장무리를 비춰줍니다. 당시 로마법으로 재판을 해봐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정치적 계산과 타협으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허락한 빌라도는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지 십자가 위에다가 ‘나사렛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써붙였습니다. 그걸보고 심기가 불편했던 대제사장무리가 우리는 저 자를 우리 왕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쓰라고 압력을 넣습니다만 빌라도가 지난 번처럼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이번에는 거절하지요.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분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설교하면서도 그 진실이 나에게 불리한 진실이면 억지도 부리고, 압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어쨌든 덮으려고 애쓰는 대제사장들이나 어떤 때는 입신영달을 위해 알고도 진실편에 서지 못하다가 또 어쩌다가 좋은 일도 가끔 하면서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하는 저 빌라도나 다 해골들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사형을 집행한 군인들을 비춰줍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취해 네 등분해서 나눠갖고, 통으로 짠 속옷은 나누기 힘드니까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갖습니다. 그 옆에 자기들이 반죽여서 못을 박아 달아놓은 사람이 피를 하염없이 쏟아내며 죽어가고 있고, 모친되는 사람이 지인들과 오열을 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이들은 희희락락 서로 옷을 가지겠다고 제비뽑기를 합니다. 이들은 비정함과 잔인함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시편성경의 예언(시22:18)을 성취합니다. 나로 인해 남이야 아파하든 말든 나만 잘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 비정하기 그지없는 군인들이야말로 해골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그리고 그 옆에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과 한 제자를 비춰줍니다. 자식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데 품위있게 슬퍼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실신할 정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토록 따르고 사랑했던 스승이 죽어가는 마당에 제자는 또 어떠 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죽어가는 예수께서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슬픔과 아픔보다 무력감이 더 고통스럽게 마음을 짓누릅니다. 자식이 죽어가도, 소중한 것을 잃어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실은 이들도 해골들입니다.

 

 

되살아난 해골들

 

 

이 해골들이 모인 곳에 십자가가 섰습니다. 거기에 악을 악으로 맞서지 않고 사랑으로 맞선 분의 피가 십자가를 타고 해골언덕으로 흘렀습니다. 남의 잘못은 고사하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생떼를 부리는 사람들 위로 저들의 죄를 죄다 짊어지고 죽으시는 분의 피가 흐르고 덮었습니다. 그 피가 흘러 발을 적시고 심령을 적신 자들 중에 살아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사형집행을 총괄하던 백부장과 군인들이 이렇게 죽으시는 장면을 보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믿음이 생긴 동시에 양심이 살아난 것이지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울기만 하던 여인들과 제자들이 나중에는 담대함을 얻어 ‘너희가 십자가에 못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다’(행 2:32,36)고 외치고 또 위협하는 무리들을 향하여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하면서 적극적으로 예수를 위하고 전하기 시작합니다. 무력함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돈 몇 푼 받고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던 사람들 중에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며 가슴을 치며 그때 일을 뉘우치고 참된 길을 묻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 어떤 집사님이 어렵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다고 수도 없이 가르쳤지만, 사실 제 자신도 하나님이 내모습 이대로를 받으셨다고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하시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셨네’라고 노래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내 모습 이대로를 받으셨다고 절절하게 통감하지 못했고 그래서 나 자신도 이웃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 주님을 닮으려고 몸부림쳐왔지만 특정한 지점에서 언제나 죄를 짓고 쓰러지는 죄의 습관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몇몇 사람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속으로 그들의 불행을 은근히 바라며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번번히 자신에게 좌절하곤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불의에 타협하지 말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했지만 직장생활에서는 이해관계를 계산하면서 속마음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기 일쑤였고 그렇게 하는 나를 보면서 소름이 끼칠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주님의 보혈의 공로만을 더욱 의지하며 겨우겨우 다시 일어서곤 했지만 습관적으로 쓰러지는 저의 어두운 모습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내 공로를 의지하는 공로주의에서는 벗어났다라고 생각했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내 공로를 의지해서 왔다갔다 하는 공로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 진솔한 고백이지요. 요즘 이런 고민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습니다. 다 자기가 해골이 아닌 줄 알고 삽니다. 하지만 이 집사님은 자기가 해골인 줄 아는 분입니다. 자기가 해골인줄 아는 사람 마음에 주님이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뜨거운 보혈을 흘려보내십니다. 특정 지점에서 번번히 쓰러지고 죄짓는 습관으로 가버리는 자신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하는 그 마음에, 성경말씀을 알고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고 때로는 비굴하게 때로는 약삭빠르게 색깔을 바꾸고 처신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그 무력한 마음에 어김없이 십자가를 세우시고 보혈을 허락하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끌어안아 생명을 싹틔우십니다.

 

 

맺는 말

 

 

코로나사태가 장기적으로 돌입했습니다. 긴 여정이 될 듯 싶습니다. 마라톤 경주를 백미터 달리듯 하면 쉽게 지쳐 완주할 수 없듯이 코로나 상황에서는 섣부른 기대를 갖게 되면 쉽게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다보면 끝은 있을 것이고, 주님은 자연에게 놀라운 복원력을 주시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이 다시 회복되는 것처럼 지금 코로나 극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우리 인간에게도 복원력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더하여 결국에는 이겨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코로나사태보다 더 길고 긴 싸움이 주어진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살이고,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길을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걸어왔고 또 끝까지 가 낼 수 있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나를 사랑하신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빚어가시는 주님의 포기없는 사랑이 지금도 우리 심령에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가다보면 언젠가 마른 뼈다귀 뒹구는듯한 심령에도 생수가 흐르고, 더 이상 변화없이 마지못해 사는 듯한 일상에도 새살이 돋고 생명이 넘실거리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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