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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34 우리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본문 요한복음 15:9~19(신약173) 
날짜 2020-08-02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34

성경 : 요한복음 15:9~19(신약 173)

제목 : 우리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콩쥐팥쥐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콩쥐 아버지는 죽은 아내 대신 새로 아내를 얻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콩쥐의 계모는 팥쥐라는 딸이 있었는데 콩쥐에게는 힘든 일을 시키면서 못살게 굴고 팥쥐는 끔찍이 아끼지요. 나무 호미 하나를 주면서 저 산 너머 있는 자갈밭을 매도록 해라, 자기는 팥쥐 데리고 잔치에 가면서 콩쥐 보고는 옷감을 다섯 필을 짜고 벼 다섯 섬을 찧고 깨진 독에 물을 채워 놓아라 시킵니다. 계모가 자기 딸인 팥쥐는 끔찍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의롭지 못한 이유는 편협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랄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은 너무 편협하고 치우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의가 되지 못하는 사랑이 있고, 어떤 사랑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여 의를 이루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도 말에 그치는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치우쳐 의가 되지 못하는 사랑으로 남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면서 예수를 참되게 사랑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1. 의를 이루는 사랑

 

 

예수께서는 제자들더러 ‘내 계명을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9, 10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9,10)

 

제자들이나 우리나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주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를 포함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하면서 엉망으로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은 주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만 가까운 문맥에서 보면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그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이 씻기신 제자들 발에 그 꼬장꼬장한 때가 뭡니까? 당시 저 밑바닥 인생이던 갈리리 어부 출신들이 스승 잘 만난 덕에 출세 한번 해 볼 욕심으로 한솥밥 먹는 동료들까지 경쟁자로 여기던 그 알량한 출세욕입니다. 내가 저보다 뭣이 못났다고 주님의 발을 씻어주냐며 저가 먼저 나서서 주님 발 씻어주기를 바라며 버티던 유치한 자존심입니다. 남을 이기려 들고 다스리려 드는 것은 가장 유치한 단계의 권력의지입니다. 진정한 권력의지는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배는 남을 다스리려는 자이고 대인배는 자기를 다스리려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냄새나고 꼬장꼬장한 발을 씻어주신 것은 그들의 미성숙과 출세욕과 속물근성에 찌들어 있는 자아를 부둥켜안아 주신 것입니다. 오래 참아주고 믿어주고 견디어 주는 사랑이었단 말이지요.

주님은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기억하고 흉내 내며 사는 것이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나를 경쟁자로 여기고 항상 나를 경계하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저 사람의 유치찬란한 태도를 참아주고 견뎌낼 때 내게 예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편들어 주는 사람에게만 갇혀 있지 않고 나를 반대하고 깎아내리려는 사람까지 향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때 우리 사랑은 편협함을 넘어서서 의를 이루는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이것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 또한 이것입니다. 너무 먼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좁은 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신앙체험이란 것을 하였을 때 뜨거운 감정이 올라와요. 그래서 하염없이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청춘남녀가 좋은 감정에 이끌려서 결혼을 합니다만 부부생활이라는 것은 서로의 다름과 불편함과 특히 상대의 모난 부분을 다 끌어안고 견뎌야하는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 사랑이지, 처음에 좋았던 감정은 그 사랑에 들어서는 관문이란 말이지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라고 했으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감정이나 성경읽고 기도생활하는 개인경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을 얼마나 행하며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의를 이루는 기도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하시면서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나가서 열매맺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서는 지난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일이나 사람 앞에서 예수를 생각하고 예수의 뜻에 맞게 살아내려고 애쓴 삶의 모습은 그것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간에 주님이 보실 때는 열매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굉장히 격려가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는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예수의 이름이 무슨 부적과 같아서 예수 이름을 붙여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무조건 결재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다는 의미를 기도와 연결시키면서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이름을 믿고 기도한다는 것은 곧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 뜻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올 때 형 에서가 400명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겁에 질린 야곱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얍복강 가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때 야곱이 제발 형 에서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기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을까요? 야곱이 자기와 씨름하던 자에게 구했던 축복은 형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형과 과거지사를 다 풀고 진심으로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였고 그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내가 더 차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모두가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는 바르게 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진리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시고, 필요하다 싶으시면 우리 기도를 교정해 나가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도록 하시고 그 기도를 지렛대 삼아 당신의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불의한 이득을 취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고, 저 사람을 이겨서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고, 마음껏 소비하고 사치하고 누리는 인생을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남을 힘들고 불편하게 하든 말든 내 편의를 봐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올해는 그래도 장마 같은 장마라서 가뭄이 해갈되었습니다만, 작년이나 재작년은 계속해서 마른장마여서 가뭄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가뭄이 3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수련회를 앞두고 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어떤 기도가 주님의 뜻에 더 맞는 기도일까요? 3년째 가뭄이어서 농부들의 어려움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황인데 화창한 날씨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수련회 기간에 비를 듬뿍 내려주셔서 해갈케 하시고 우리에게는 비를 감사히 여길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수련회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을까요? 후자가 아닐까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수준대로 기도 하지만 또 기도의 수준대로 살게 됩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삽니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의를 이루는 미움

 

 

모두가 의를 바라는 것 같지만 진짜 의가 나타나면 불편하게 여길 사람도 많고, 싫어하고 미워할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의를 행하러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의를 행하셨습니까? 그분 자체가 의덩어리였습니다만 사람들이 다 좋아했습니까? 싫어하고 탄압하고 위협하고 결국에는 죽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처럼 살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미움입니다.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9)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가 죽이고 죽는 원수처럼 지내다가 1992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평화와 공존으로 가자고 합의하였습니다. 이 합의에 앞장선 사람은 이스라엘의 온건파 지도자 라빈 수상과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입니다. 국제사회가 바라마지않던 평화와 공존의 몸부림이었습니다만, 이 합의를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은 이스라엘 강경파들에 의해 암살당했고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도 하마스라는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평화와 공존, 얼마나 하나님 뜻에 맞는 것들입니까마는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면 언제든 이 귀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외면하고 심할 때는 짓밟고 탄압합니다.

조금 좁혀서 생각해 보면, 직장에서 2차 가고 3차 갈 때 옆에 동료에게 야, 그만 따라 가고 집에 가자, 가정도 좀 생각해야지 라고 하면 더 놀고 싶은 사람들의 눈총을 사야 합니다. 가정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하룻저녁의 쾌락을 위해서 버려지는 세상이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 아직까지 우리 직장문화의 수준입니다. 눈먼 공금이 생겨서 두셋이 나눠 먹으려는 순간, 이거 좀 찔린다, 우리 돈 몇 푼에 양심을 팔지 말자라고 하면 정직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바이러스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정직성입니다. 온갖 아부와 향응 제공, 대가성 봉투들이 오고 가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고 그것을 불법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세상사는 지혜나 처세정도로 여기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수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가치가 왜곡되고 죄가 관행으로 둔갑한 세상에 살면서 미움을 받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서 미움받고 핍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받은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긴 거룩한 피학증 환자(masochist)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의 없고 무례해서 받는 눈치나, 몰상식하게 행동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다가 받는 따돌림과 미움을 진리를 위해 받는 미움과 혼동해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예수 사랑하려면 미움은 필수입니다.

 

 

맺는 말

 

 

예수를 사랑하는 힘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자 세파를 해쳐나가는 힘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에, 그분에 삶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 힘을 붙들지 않고 돈의 힘과 숫자의 힘을 붙들기 때문에 교회가 힘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기에 예수처럼 인내하고 예수를 사랑하기에 예수의 인격을 닮고 예수를 사랑하기에 냄새나는 저 사람의 발을 부둥켜 안으려는 몸부림을 칠 때 우리를 통해 거룩한 포도주가 만들어지고 그 포도주에 사람들이 취하면 짐승같은 마음이 비로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참인간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예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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