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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30 사랑이 무엇인가 
본문 요한복음 13:31~36(신약171) 
날짜 2020-07-0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30 맥추절 설교

성경 : 요한복음 13:31~38(신약 171)

제목 : 사랑이 무엇인가

 

어려서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자란 덕에 중국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시아인들의 삶의 애환을 깊이 이해하게 된 펄벅 여사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펄벅 여사가 가장 좋아한 나라, 그리고 마지막 인생을 바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펄벅 여사가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박사와의 인연 때문입니다. 펄벅 여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여하였고, 그때 독립운동을 하던 유일한 박사를 알게 되었고 많이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그 인연으로 펄벅 여사는 1960년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한 번은 가을 들판에 나갔는데 우연히 어떤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오면서 타지도 않고 오는데 어깨에는 무거운 짐까지 메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왜 수레도 타지 않고 또 짐도 수레에 실으면 편할 건데 짊어지고 오십니까?” 그러자 농부가 “오늘은 우리 소가 일을 많이 해서 내가 그 짐을 좀 덜어줘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펄벅 여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한 번은 감나무 꼭대기에 있는 감을 따지 않고 남겨둔 것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까치 밥 하라고 남겨둔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펄벅 여사는 우리나라 사람들 심성에 또 한 번 깊은 감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펄벅은 우리나라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고아들이 생겼고, 그 중에 미군들과 혼혈로 태어난 고아들이 인권사각지대에 버려진 인생을 사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경기도 부천에 소사희망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미군혼혈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헌신하였습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답하겠어요라고 하는 유행가 가사가 있습니다만, 사랑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농부가 소달구지를 타지 않고 짐까지 짊어진 이유는 하루종일 일한 소가 불쌍해서였고, 꼭대기 감을 굳이 따지 않은 것도 날짐승의 배를 걱정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고, 펄벅 여사가 소사희망원을 설립한 것도 혼혈고아들의 인생이 불쌍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속을 뒤집어 놓는 남편이 그렇게 밉다가도 뒷모습을 보니 허리도 기울고 어깨도 처진 것이 눈에 들어오면 갑자기 미운 마음은 오간데 없고 불쌍한 마음이 들지요. 불쌍한 마음이 들면 미워도 사랑하게 됩니다. 항상 불쌍한 마음이 들면 사람이 천사처럼 살겠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니 문제인 것이지요.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십자가 지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따라올 수 없는 길이 있으며 잠시 너희를 떠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34, 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4,35)

 

마치 엄마가 외출하면서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당부하고 나가듯이 주님도 떠나가시면서 제자들더러 당신이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사랑하면서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13장 1절에 보면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고 나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중간에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고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뒤로 둘러싼 사건들을 보면 또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 앞에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가는 사건이 있고, 뒤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가 자신이 행한 일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빠져 믿음에서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눅 22:31,32).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지요. 베드로 경우보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26절에 은 30에 당신을 팔아먹는 배은망덕한 가룟유다에게 떡 한 조각 적셔서 주신 장면입니다. 배신자에 대한 마지막 호의를 잊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다른 성경에 보면 가룟유다를 두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자기에게는 좋을 뻔하였다(막 14:21)고 하시면서 역사의 악역을 담당하는 가룟유다의 인생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기까지 하신 것이 나옵니다. 정말 마지막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마지막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그럴지라도’ 사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주로 ‘ 때문에 사랑’을 합니다. ‘네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도 네가 좋다, 마음에 들기 때문에 사랑한다, 내 말을 잘 들어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어야 사랑을 합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아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사랑할 이유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고 ‘그럴지라도’ 이해하고 사랑기 위해 애써야 할 사람은 널렸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더러 너희도 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좋게 하는 사람은 좋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미운 것이 본능인데, 주님은 이 본능을 성령의 힘으로 거슬러 날 힘들게 하는 사람마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천국 갈 때까지 멈추지 않는 도전입니다.

 

 

2. 서로 사랑하라

 

 

떠나가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또 하나의 단서를 다셨습니다. 34, 35절 다시 한번 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4,35)

 

두 번째 단서 조항은 ‘서로’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요구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서로’라는 단서를 붙이셨을까요?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외출할 일이 있어서 아이들을 불러 당부를 합니다. 형에게는 뭐라고 합니까? “동생 잘 봐라, 괴롭히지 말고!” 동생에게는요? “형아 말 잘 들어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인데,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서로서로 하라는 겁니다. 형은 동생을 잘 돌보려고 하는데 동생이 계속 형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면 형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동생은 형 말을 잘 들으려고 하는데 형이 못 돼서 이유 없이 동생을 괴롭히면 동생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서로서로 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든 말든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우리는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데 나 혼자 일방적으로 사랑한다? 피붙이를 향한 사랑은 그것이 되지만 피붙이를 벗어나면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을 잘 아시기에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겸손한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밟게 하십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길을 지금은 따라올 수 없고 나중에야 따라 올 수 있다고 하시자 베드로가 대뜸 나서서 하는 말이 주를 위하여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37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7)

 

자기는 주님을 끝까지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장담입니다. 그때 주님이 그러시지요?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비춰 풀어보자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그래, 베드로, 너의 열정과 자신감은 좋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자신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아직 세상 쓴맛을 경험해 보지 못한 온실속 화초와 같아서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겠지. 하지만 그런 순박한 생각으로 사랑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는 고난과 넘어짐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을 깊이 깨닫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그 출발이 불쌍히 여기는 것, 곧 긍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배우기까지는 넘어져 보기도 하고 고난도 겪어보고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넘어지는 사람을 향해 정죄가 아닌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가지게 되고, 모두가 힘겨운 인생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동질감과 동정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푼다는 교만한 자세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동등한 측면에서 사랑하는 겸손한 사랑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도 십자가 지심으로 사랑을 완성하셨지만 우리 사람의 사랑은 완성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사랑에 근접하려는 부단한 도전과 노력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을 겪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다면 베드로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닌 괴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졌기에 진정한 신앙에 이를 수 있었고 자기 같은 부인하고 넘어지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베드로 인생에 부인하고 넘어지는 과정을 넣어두지 않으셨을까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사는 일에 성공만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패도 하게 하시고 넘어지게도 하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성숙시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나가십니다. 그래서 나는 실패여도 주님은 실패가 아니고 나는 실수여도 주님은 실수가 아닙니다. 그래서 안전합니다.

 

 

맺는 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제자인줄 안다는 말은 비로소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고등부 때 이사를 와서 우리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영희라는 친구의 어머니는 얼굴도 고우시고 심성도 고운 충청도 아주머니였습니다. 영희 아버지는 아파 보이는 분이셨고 경제생활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평생 일을 못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영희 어머니는 같은 마을 총각인 영희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여 반대하는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결혼을 하셨고 딸 둘을 키우고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사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고생이 많다고 젊어서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남편만이 아니라 주변에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커져만 갔습니다.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은 영희 어머니야말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울면서 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끌어 안기 힘든 대상을 끌어안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보다 더 예수님 닮은 모습이 세상에 있을까요? 오늘이 상반기를 돌아보는 맥추감사절입니다. 우리장로교의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교리서에서는 감사는 구원받고 난 후의 신자의 모든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난 6개월 간 내가 믿음으로 산 것이나 믿음으로 사는 일에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나 모두가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배우게 하시는 주님의 계획하심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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