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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28 주머니 속 송곳

2020.06.21 13:57

배재우전도사 조회 수:117 추천:2

제목 요한복음강해28 주머니 속 송곳 
본문 요한복음 12:37~43(신약168) 
날짜 2020-06-2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28

성경 : 요한복음 12:37~43(신약 168)

제목 : 주머니 속 송곳

 

 

이끼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끼가 식물인줄도 몰랐습니다. 그냥 곰팡이 비슷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끼가 선태식물로 분류되는 식물이더군요. 여기 석부작 작품에도 이끼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 예쁩니다. 길을 가다가도 습한 곳이 있으면 이끼가 있나 쳐다보곤 하는데 의외로 이끼가 종류가 많습니다. 아주 작은 나무처럼 생긴 이끼도 있고 작은 풀처럼 생긴 것도 있고, 잎이 넓은 것, 좁은 것, 솜털처럼 생긴 것, 양탄자처럼 생긴 것, 키가 몇 센티미터까지 자라는 것,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글쎄 이끼 종류가 2만 4천 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나무는 커서 눈에 잘 띄니까 나무 종류 많은 것은 알고 살지만 이끼는 너무 작으니까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나무 못지않게 다양한 종류가 있는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끼가 산속 계곡이나 바위에 가야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에도 이끼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뒤뜰 잔디밭 한쪽 귀퉁이가 온통 이끼밭입니다. 그리고 연산홍 넝쿨 아래 바위에도 이끼가 잔뜩 있습니다. 안산홍 넝쿨 안을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이끼가 있습니다. 종류도 한두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입니다. 시간 있을 때 한 번 들여다 보시면 또 하나의 작은 세계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그 작은 세상이 주는 소박한 즐거움을 맛보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예수를 믿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뭘까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그들은 놀랐습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소문을 다 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 높이면서 환영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믿었다고 볼수도 있는데 성경은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뭘까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 믿음이지요. 그런 믿음도 있지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내다보는 것? 그것도 믿음이지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는 그런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표적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우리처럼 예수님을 주님이다, 왕이시다라고 부르며 따르고 높이기도 한 사람들을 향해 믿지 않았다고 할 때, 여기서 믿음은 뭘까요?

 

 

1.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보지 못한 사람을 고쳐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은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 부릅니다. 기적은 자연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주 신기한 일, 그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 눈을 뜨게 하신 일을 보고 ‘와, 신기하다, 놀랍다, 나도 믿으면 저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겠구나’, 이래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기적일 뿐입니다. 표적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표적이 되느냐? ‘주님, 저 사람만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저도 앞을 못 보는 눈뜬 장님입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 매번 속습니다. 욕심에 붙들리다 보니 눈이 어둡습니다. 그리고 저는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못난 사람이고 무지한 사람인지 항상 잊어버립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절실히 깨닫고 눈물로 고백했는데, 편해지니까 또 망각하고 삽니다. 제가 장님입니다. 순간순간 저를 깨우쳐주십시오, 주님!’이러면 그 사람에게는 표적이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을 보고도 유대인들은 나는 장님이 아닌데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조금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39~41절에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39~41)

 

이사야를 통해 주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보지 못하게 하시고 믿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완고한 마음으로 내버려 두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네 마음대로 인생길 걸어온 그 죄된 신발 벗고 이제 나의 종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믿음의 근본이 뭐냐?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자기 실체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20대 때 기도를 합니다. “주님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저에게 주십시오.” 나이가 더 들어보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기도가 바뀝니다. “주님, 이 민족을 변화시킬 힘을 주십시오.” 나이가 더 들어보니 이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 제 가정을 변화시킬 힘을 주십시오.” 그러다가 세상 떠날 때가 다가오자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죽기 전 기도는 “주님, 제 자신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였습니다. 믿음은 자기를 보고 자기를 변화시켜 나가는 부단한 과정입니다. 신발 벗는 일을 평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이 안 되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세리가 문제고 창기가 문제고, 그들을 의롭게 살아온 자기들보다 더 대우하는 예수가 문제였습니다.

내 신앙이 지금 건강한 상태인가를 가늠해 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최근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해본 적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없는 사람 같아서 우울했던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안전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자꾸 보지 마십시오. 믿음은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2. 믿음은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뭔가? 믿음은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복받는 비결이다, 믿음이 있으면 뭐든지 이루어지고 병도 낫고 다 된다,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만 믿음의 근본은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신실하다, 충성스럽다’는 의미도 됩니다. 무엇에 신실하고 무엇에 충성스러운가? 바로 진리대로 사는 일에 신실하고 충성스럽다는 말입니다.

진리대로 사는 것이 믿음인데 이것이 왜곡되어서 복받는 것이 믿음이다, 소원을 이루는 방편이 믿음이다, 이래 버리면 미신과 차이가 없어집니다. 믿음으로 살면 복을 받기도 합니다.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으로 산 결과이지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믿음은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대로 사는 믿음을 갖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 또한 믿음입니다. 상당히 아이러니 합니다만 유대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 못한 이유 두 가지는 첫째, 자기들이 안다, 본다 라고 철썩같이 믿은 것이고, 둘째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철썩 같이 믿은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될 필요가 뭐 있으며,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뭐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나 기독교인도 충분히 유대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기독교인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예수믿고 구원받았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이 확신이 강하면 진리대로 더 살아야 되는데,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받고 확신도 넘치고 교회충성 잘 하는데 회사에서는 악덕기업주이고, 사회에서는 얌체족으로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차라리 확신이 부족해서 내가 정말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이 죄를 덜 지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실은 진리대로 사는데는 앉은뱅이구나, 내게 유익이 되는 일에는 너무 쉽게 타협하고 넘어지는 내가 바로 앉은뱅이구나, 깨다고 쉽게 앉은뱅이가 되는 나를 고민하는 사람이 진리대로 살아낼 가능성이 오히려 큽니다.

믿음은 거짓된 확신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단순해야 합니다.

 

 

3.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신앙인

 

 

당시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회당에서 출교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42, 43절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2,43)

 

당시 초대교회의 신앙은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드러내는 정도가 돼야 신앙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정도의 핍박은 없습니다. 단지 ‘개독’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실추된 기독교 이미지로 인해 어디 가서 교회 다닌다는 말을 하기 꺼려지는 시대적 분위기가 강합니다. 이런 시대에 믿는 것을 드러내야 좋은 믿음이라는 생각으로 마치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교회, 하나님, 은혜, 성령’ 이런 낱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진짜 믿음이 좋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런 말을 달고 살지만 정작 별로 정직하지도 않고, 성실한 면도 세상 사람보다 떨어지고, 정의에 대한 개념이나 의식적인 면에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별로 낫지 못하다면 차라리 표 안 내고 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탁월한 설교자 자크 엘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 성령, 주님, 역사, 이런 말을 가급적이면 쓰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말을 얼마나 가볍게 사용하며, 또 이런 말을 사용하는 만큼 삶을 살지 않음으로써 이 거룩한 말들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삶의 모습으로 내가 가진 신앙이 진리임을 드러내는 자세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카라멜이라는 것이 처음 나왔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것이 있나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걸 먹어야겠는데, 돈은 없고, 궁리 끝에 어머니가 모아두신 계란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가서 바꿔먹었습니다. 꿀맛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두 번은 성공을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하다가 그만 계란이 주머니에서 깨져버렸습니다. 옷이 엉망이 되었고 틀켜서 혼이 났습니다. 주머니에 생계란 넣고 다니다간 언젠가는 깨집니다. 비슷한 것이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입니다. 주머니 속에 송곳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머니 속에 송곳이 있으면 옷을 뚫고 삐죽 튀어나옵니다.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고가 아니라 반드시 나옵니다. 재주 있는 사람은 아무리 감추려해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좋은 인품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드러나는 법입니다. 진실한 신앙이 그러합니다. 입으로 선전하지 않아도 삶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아직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 여기고, 어디서든지 하나님, 주님, 은혜, 이런 말을 섞어 가면서 크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을 믿음이 분명하고 좋은 사람이라 인정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는 초대교회 당시와는 다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느냐 드러내지 않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라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허구한 날 예수, 하나님, 은혜, 기적,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생활하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드러내지 않는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바로 그런 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만 나중에 예수님 장례 때는 그 위험한 일을 도맡아서 행하였습니다. 희생해야할 일에 정작 나설 줄 알았던 참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네, 예수 믿는 사람이야? 어쩐지 다르더라 했어!” 이런 말을 듣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머니 속 송곳 같은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번 들여다보면 그 예쁜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 이끼같은 성도 되시길 바랍니다. 참 믿음은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맺는 말

 

 

코로나사태를 겪으면서 과연 한국기독교가 지금까지 붙들고 살아온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미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인가, 몹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는 첫단추를 찾아 바로 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시작은 과연 믿음이 뭔가, 믿음의 의미를 올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입에서 개독이라는 말을 하나씩 지워나가시는 삶을 살아, 그것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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