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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 26 내가 미울 때
2020.06.07 20:04
제목 | 요한복음강해 26 내가 미울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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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2:20~26(신약168) |
날짜 | 2020-06-07 |
설교자 | 전용표 목사 |
요한복음강해 26
성경 : 요한복음 12:20~26(신약 168)
제목 : 내가 미울 때
제가 주일학교 다닐 때 분반공부 시간에 선생님이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에게 대표기도를 시키셨습니다. 교회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친구가 나름 들은 것을 바탕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하나님, 우리에게 영광을 많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저거 아닌데,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거지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게 아닌데...’하면서 조마조마하게 기도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기도가 끝나고 선생님이 그 친구에게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또 한 번은 다른 친구가 기도를 하면서 어른이 하는 기도를 들었는지 ‘꼬리가 되지 말게 하시고 머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뱀꼬리와 뱀머리였습니다. 기도를 들으면 자꾸 상상이 되지요.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알고 보니까 세상에서 머리가 된다고 해서 꼭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머리가 되더라도 주님이 원치 않는 방법으로 머리가 되든지 머리가 되어서 주님이 원치 않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리가 없겠지요. 하나님 원하시는 길을 가다가 꼬리가 되었다면, 그리고 꼬리가 되어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산다면 충분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요.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방법대로 하면서 머리가 되면 그것은 영광이고, 꼬리가 되어서 하나님 방법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일등하고 성공하고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광에 대해 오해하는 대표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당신이 영광받으신다는 표현을 하신 적이 몇 번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경우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1. 주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받으시는 때
오늘 본문 20~23절을 한 번 보십시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0~23)
명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의 부탁을 받은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인자가 영광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이제 이방인인 헬라인까지 예수님을 뵙고자 찾아왔으니, 충분히 유명해 지셨고, 이것을 가지고 영광 얻을 때라고 하셨는가? 그것이 아니라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것을 보니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열방이 주께로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될 때가 되었고,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시고는 영광 얻을 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광 얻을 때는 십자가에서 죽는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광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당시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고안된 사형틀입니다. 로마는 로마시민은 죽을 때도 명예롭게 죽어야 한다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악한 죄를 지어도 절대로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법으로 금지해 놓았습니다. 그만큼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은 저주 중에 저주였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하면 집안에 그보다 더한 치욕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영광이라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 가지로 그 의미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십자가든지 십자가에 해당 되는 것을 짊어질 때 그때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산 적이 있는가’ 하고 성공하고 잘 한 것을 먼저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전혀 다른 곳에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게 어디 입니까? 내가 십자가 지고 힘들어 했던 일, 내가 십자가 지고 너무 억울했던 시간, 억울해서 밤잠을 못 이루고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했던 나날들, 내가 십자가 지고 남들은 다들 평탄케 사는데 나는 어째서 이런 인생을 사는가하고 내 인생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하고, 또 싫었던 것, 그때가 실은 나도 모르게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린 시간이고 주님이 나를 통해 영광을 거두신 시간입니다. 많이 억울했던 사람, 많이 참았던 사람, 많이 슬프고 애통했던 사람, 많이 분노했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실은 주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 사람들입니다.
2. 진정 내가 미워야 할 때
그런데도 대개 우리는 십자가를 질 때 부끄러워합니다. 남들 하지 않는 고난을 겪거나 고생을 하게 될 때, 어려운 짐을 떠안게 되었을 때,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처지가 된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단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아직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참 모진 말로 들리지 모르겠지만 오늘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25절을 봅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5)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시면서 그러려면 ‘자기 생명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된다. 그래야 진실로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아끼는 것은 생명체의 당연한 본능인데, 그런데 때로는 본능대로 사는 것이 죄가 되기도 하고 의를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 강한 본능을 거슬러 사는 힘이 바로 신앙의 힘이요, 믿음의 힘이요,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시고, 그 성령께 내가 주도권을 내어 드리기 시작하면 본능을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바로 자기를 미워할 줄 아는 사람, 자기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결국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순환논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려면 나를 더 죽이고 더 미워해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반에는 ‘말자’(가명)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코끝에는 허연 엿가락이 연신 들락날락하고, 헝크러진 머리에는 까치집과 헌데라고 부르는 딱지가 있고 한여름에도 눈가루가 사정없이 흩날렸습니다. 여름에는 짧은 옷, 겨울에는 긴 옷, 딱 두 벌 옷으로 일 년을 사는 관계로 옷은 기름기와 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반질반질한 코팅층을 만들었고 드디어 억수같은 비도 뚫지 못하는 천연방수코트로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자에게서는 고급 프랑스 향수를 숟가락째 들어부어도 감출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같이 앉을 짝지를 정할 날이 되어 선생님께서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을 세워서 순서대로 짝을 지어주시는데 남학생들이 자꾸 새치기를 한다든지 뒤로 간다든지 하는 겁니다. 왜 저러나 하고 있는데, 제가 말자와 짝지가 딱 되더군요.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습니다. 교회 다니는 어떤 아이는 ‘용표 니가 십자가를 져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작 저는 처음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너한테서도 냄새가 난다며 자꾸 놀려대고 멀리하니까 그때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보같이 왜 빨리 계산해서 뒤로 빠지든가 하지 멍청하게 가만히 있었을까?’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자와 앉는 것이 십자가 지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자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이지요. 강자의 일방적인 생각과 말입니다. 친구들의 말은 사실 말자에게는 언어폭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친구들이 놀리니까 왜 좀 더 약삭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하고 자신의 어리숙함을 탓하고 그런 어리숙한 나 자신이 미웠는데, 알고 보면 그건 미워할 내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나입니다. 오히려 미워해야 할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약삭빠르게 계산해서 어쨌든 짐을 지지 않으려 하고, 남들이 놀린다 해서 거기에 쉽게 굴복해 버리는 심지가 곧지 못한 나입니다.
살다보니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야 할 때가 있고 자기를 미워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전도서 3장에 있는 말씀과 같습니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사랑에 빠진 ‘극단적인 자기사랑의 시대(narcissism의 시대)’입니다. SNS를 통해 나는 이런 멋진 곳을 다니고 맛있는 것을 먹고 산다는 것을 알립니다. 다들 당연한 듯이 그렇게 하니까 생각 없이 따라하기도 합니다. 물론 한 두 번은 그럴 수 있습니다만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은 실은 내면에 구멍이 나서입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지 못하니까 포장을 해서 보여주려고, 나는 괜찮다고 시위를 하는 겁니다. 건강하면 그럴 필요없습니다. 한 두 번 해보고 응, 이런 것도 있네 하고 그만둡니다. 계속해서 내 사생활을 그렇게 공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자기를 미워해야 할 때는 어쨌든 짐을 지지 않으려 하고, 믿지 않는 사람 못지않게 약삭빠르고 계산적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때는 나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자신에게 절망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예수를 닮아갈 수 있고 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나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야할 때는 내가 원해서 졌든, 남이 떠맡겨서 졌든, 주님이 지워서 졌든 간에 십자가를 지고 끙끙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 내가 처량하고 불쌍하게 여겨질 때입니다. 남들은 지지 않아도 될 십자가를 왜 나는 이렇게 지고 가는가 싶어 너무 불행하게 느껴질 때, 그때는 정말 한없이 자기를 사랑해 줘야할 때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 앞에 죄가 되지 않습니다.
3. 십자가가 영광
자기를 미워할 줄 아는 신앙을 가져야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 십자가는 반드시 영광이 됩니다. 24, 2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4, 26)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다고 하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절대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죽어야 열매 맺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섬긴다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고 예수님 있는 곳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면 나도 같이 골고다를 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계시면 내가 구경꾼 자리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귀히 여기시느냐?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십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주일식사 당번이어서 예배가 끝나갈 때쯤 먼저 주방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주방에서 누군가가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 겁니다. 황급히 일어나서 도망을 가는데 같은 식사당번인 모 집사님이었습니다. 아마 먼저 내려왔다가 급한 나머지 아무도 없고 하니까 그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요. 그런데 문제는 권사님이 그분 볼 일 봐 놓은 것을 수습하느라 청소도구를 들고 있는데 식사당번들이 쭉 내려와서 보고는 이 권사님이 주방에서 볼일을 봤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일이 일파만파 커지는데, 사람들이 이 권사님만 보이면 수군거리고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권사님 가족들에게도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교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에 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냐고 권사님을 추궁합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남편 장로님도 화도 나고 합니다만 권사님의 신앙을 익히 아는 터라 뭔가 필시 일은 있는데 말을 하지 않으니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이런 일이 있는 동안 권사님은 밤마다 예배당에 나가서 아무도 없는 캄캄한 예배당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가는데, 교회 여론이 너무 안 좋습니다. 자녀들은 교회를 못가겠다고까지 나오고, 당회에서는 교회 여론이 너무 안 좋으니까 그만 있을 수는 없다고 치리까지 논의가 되다가 권면해서 장로님 기도를 잠시 쉬도록 하고 권사님을 불러서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권계하는 것으로 처리하기로 합니다.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다 자기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있어났다며 정중히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합니다. 일이 그렇게까지 되자 남편 장로님도 화가 많이 났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속시원하게 얘기도 없고,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명예도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지고, 너무 속이 상한 겁니다. 그래도 권사님이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 난리를 겪는데, 그걸 다 보고 있던 그 집사님이 결국은 입을 엽니다. 실은 자기가 한 일인데, 권사님이 다 덮어쓰신 거라고. 일이 그렇게 된 거라고. 교회가 지난 번 일이 발생했을 때보다 더 발칵 뒤집혔습니다. 미안해서 발칵 뒤집히고 ‘아직도 저런 신앙인이 있는가’ 해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권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실물로 배운 것입니다.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님이 그 문제의 발단이 된 사람만 살린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많은 교인들의 신앙까지 살린 것입니다. 이상하게 듣지 마십시오. 그 권사님이 예수님입니다.
다양한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지는 십자가가 있고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도 있고, 살다보니 저절로 내 인생이 되어 버린 십자가도 있습니다. 집안이나 가정에서 지는 십자가도 있고, 직장에서 지게 되는 십자가도 있고, 교회에서 지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떤 십자가든 간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겉으로는 불행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입니다. 힘들고 눈물나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십자가 지면, 억지로 진 십자가라도 십자가 지면, 주님이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겪은 아픔을 똑같이 겪는 사람 보면 가만 못 있잖습니까? 너무 마음이 가잖아요? 주님도 누군가 당신처럼 십자가 지고 가는 것보면 그것이 스스로 진 십자가든 억지로 진 십자가든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저 측은하고 마음이 동하여 뭐든 해주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 진 것은 반드시 영광으로 매듭이 지어집니다.
맺는 말
우리가 평안할 때는 나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아무리 생각하고 묵상해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깊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으면서 예수를 생각하면 예수가 실감이 납니다. 그것이 큰 은혜입니다. 예수를 그토록 깊이 느끼고 경험할 기회가 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누군가 십자가 져야 누군가가 살아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내가 지금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고 있기에 누군가가 살아납니다. 내 자녀가 살든지, 내 가족이 살든지, 내 교회가 살든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살든지 살아납니다. 해산의 고통은 내가 하는데, 태어나기는 저쪽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살리시려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해산하는 고통을 치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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