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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25 나의 길 May Way 
본문 요한복음 12:12~19(신약167) 
날짜 2020-05-3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25

성경 : 요한복음 12:12~19(신약 167)

제목 : 나의 길 ; My Way

 

다친 이후로 운동량이 급격히 준 데다가 코로나로 인해 목회자 축구팀도 중단되니까 조금씩 하던 운동마저도 끊겼습니다. 몸무게가 10kg이 늘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있는데 축구팀 목사님 중 산(山)을 좋아하시는 분이 ‘축구도 중단되었는데 산에나 갔다 옵시다’, 해서 산에를 따라다녔습니다. 산을 다녀보니 ‘어느 산이 좋다’는 말은 가능해도 ‘어느 산이 어느 산보다 더 좋고, 어느 산이 어느 산보다 좀 못하다’는 말은 맞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산마다 다 특색이 달랐습니다. 어떤 산은 바위가 둥글둥글하면서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고, 어떤 산은 바위가 삐죽삐죽하면서 우람합니다. 둥글둥글하고 기괴한 모양을 한 바위는 재미가 있고, 삐죽삐죽 우람하게 우뚝 솟은 바위는 압도감과 심비감을 줍니다. 어떤 산은 계곡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데, 어떤 산은 계곡이 깊고 위엄찹니다. 모양도 다르고 주는 느낌도 다릅니다. 어떤 산이 더 낫고 덜하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산이 꼭 높아야 명산인 것도 아니더군요. 100대 명산이다 뭐다 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 즐겨 하는 일이고 산은 저마다 자기만의 특색과 멋이 다 있었습니다.

어떤 산에는 등산로 정비를 하느라 어디 다른 곳에서 돌을 가지고 와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산의 바위들과 좀 이질적이었습니다. 다른 산에서 아무리 좋은 바위를 갖다 놓아도 원래 그 산 바위들이 내뿜는 멋을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山)만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다 특색있게, 다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달라야 정상이고 멋스럽습니다. 청년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이 책 파는 영업이었습니다. 참 저하고는 안 맞는 일이더군요. 제가 잘 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친구 하나는 영업의 귀재입니다. 뭐든지 다 척척 팔아냅니다. 재미난 것은 그 친구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습니다. 너무 영업을 잘 하니까 나중에는 사주는 사람이 더 신기하더군요. 그 친구는 말을 더듬었지만 기질적으로 장사기질을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장사 기질 타고난 사람이 저처럼 살면 불행할 것이고, 저 같은 사람에게 평생 장사하라고 하면 불행할 것입니다. 제가 그 친구를 대체할 수 없고 그 친구가 저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나답게 살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1. 밖의 것이 내 속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12, 13절입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2,13)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수많은 사람이 일제히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를 외쳤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유명했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대대적인 환영인파가 몰린 것은 17, 18절에 요한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이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제 다 틀렸다. 봐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보통 사람 같으면 들떠서 난리를 지겼을 것인데 예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는 이 사람들이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당신을 죽이는 일에 선봉에 서게 될 자들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거짓된 환영 때려치우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두십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상황 따라, 이해관계 따라 쉽게 쉽게 바뀐다는 것을 아시기에 사람들의 말에 좋았다, 슬펐다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요2:24,25).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대개 사람은 칭송이 과하면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마냥 들떠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비판을 받으면 화가 폭발한다든지 기가 죽는다든지 해서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사람은 칭찬과 비판, 인정과 무시, 이 둘 사이에서 자기를 잃어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기분이 좋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만 예수님은 밖의 것이 마음을 함부로 움직이거나 흔들어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누가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서 내 물건을 함부로 쓰고 또 이리저리 흐트려 놓는다면 기분이 나쁘겠지요?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화를 내며 싸우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단 말이지요. 내가 다른 사람을 다 통제하고 환경을 다 통제해 낼 수는 없습니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인정하고 무시하도록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이 한 말이 내 마음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은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내 마음을 함부로 들었다 놨다하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잠그고 풀 수 있는 것이 내면의 힘입니다. 이 내면의 힘이 없으면 사실상 내 인생을 산다는 것이 힘듭니다.

마음을 굳게 잠그고 풀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2.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권투를 배워서 육체의 힘을 기르고, 돈을 벌어서 사회적 힘을 기르편이 차라리 쉽지 내면의 힘을 기른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한 번 봅시다. 14~16절입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4~16)

 

그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인데 그런 분위기에서는 적어도 아리비아 종마 정도는 타 줘야 모양새가 나지 않겠습니까? 당시의 왕들이나 로마의 장군들은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멋진 말을 타고 그 위용을 뽐냈는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다 큰 어른이 얼마나 엉거주춤했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는 분위기하고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이미 남의 눈에 맞추어 살면서 자기 인생을 살아오지 못한 사람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모양새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양새라는 것이 실은 남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모양새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무리를 해서라도 명품을 사고 치장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우상이고 하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있었습니다. 15절을 보면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라고 한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달라집니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을 빨리 처리했을 때 만족을 느끼고 그렇지 못할 때 불만족이 쌓입니다. 옷을 잘 입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옷을 신경 써서 차려입고 나갔을 때 사람들로부터 오늘 멋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만족스럽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말씀을 이루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최고로 중요하게, 가치 있게 여기셨습니다. 대개 예수님처럼 살면 모양새는 좀 빠집니다. 그러나 모양새로는 가질 수 없는 감동(感動)이 있습니다.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세계적 명문 캠브리지 대학을 나와서 외교관이 되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목사가 된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2011년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을 이끄셨는데 기독교역사계에서는 20세기를 이끈 최고의 리더 5인에 이 분을 뽑습니다. 특히 IVF라는 선교단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로이드존스 목사님과 함께 우리나라 기독 청년들과 목회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목사님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실 때마다 마중을 나갔던 목사님이 계시는데 존 스토트 목사님이 두 번째 방문을 하셨을 때 마중 나갔다가 적잖이 놀라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10년 전 오실 때 입었던 허름한 푸른색 양복을 또 입고 오셨더랍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평생을 무소유에 가깝게 사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또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온 관심을 쏟았습니다. 오로지 그렇게 사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모양새는 많이 빠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학교 교수님을 꼽으라면 아마 정암(正嵒) 박윤선 목사님일 것입니다. 후배 목사님이 이 분 집을 방문하여 밥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반찬 하나에 손이 가면 계속 그 반찬만 드시고, 국에 손이 가면 국만 계속 드시더랍니다. 그래서 후배목사님이 다른 반찬은 안 드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아, 내가 그랬나?’이러더랍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머리 속에 성경이 가득찬 분이었습니다. 그저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것만 가득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이분이 미국유학 중 외로우니까 한국에 있는 친구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자주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회개하시더랍니다. 내가 외롭다고 하나님보다 친구를, 사람을 더 의지하였나이다라면서요. 정말 생각하나까지도 하나님 보다 앞세우지 않기를 바라고, 오로지 삶의 가치를 말씀에 두고 사셨던 분입니다. 모양새는 많이 빠집니다. 그런데 감동이 있잖아요. 요즘은 모양새는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드물지요. 이런 분들을 너무 잊고 살았습니다.

마음을 지킨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가 있어야 지켜집니다. 초점이 분명해야 지켜집니다.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느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이런 저런 목표도 있고, 성취도 이루어야 합니다만, 그것이 주가 되면 내 인생을 못 삽니다. 너무 비교하면서 남의 눈에 맞춰, 남의 평가에 맞춰, 모양새 갖추는데 급급하면서 살게 됩니다. 남들 입고 다니는데 나는 뭔가, 남들 거기 가 봤다는데 나는 뭔가, 남들 그 식당에 가봤다는데 나는... 이러고 사는 겁니다. 그게 누구 인생입니까? 지난 주에 이어 드리는 말씀인데, 하나님 자리가 내 속에 없으면 이상하게 사람은 남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나 다울 때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울 때입니다. 하나님 자리가 분명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 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모양새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기록된 말씀을 실행에 옮기시는 기쁨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 장군들처럼 번쩍번쩍 기름기 흐르는 아라비아 종마를 타고 입성하셨다면 그게 예수님 다웠을까요? 아닙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모습이 가장 예수님 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 살려고 하면 가장 나 답게 됩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나만의 개성, 나만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맺는 말

 

 

사람이 다 같은 방식, 같은 모양, 같은 시간표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만의 방식, 나만의 모양, 나만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려면 밖의 것이 함부로 들어와서 내 마음을 통제해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은 초점을 하나님께 맞출 때에 생겨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왕이라고 칭송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분위기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엉거주춤 입성하시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 평정심을 가지고 내면의 기쁨을 누리셨던 그 예수님을 내가 살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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