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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24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1~11(신약167) 
날짜 2020-05-24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24

성경 : 요한복음 12:1~11(신약 166)

제목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버스 안만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담배를 피고 심지어 교실 안에서도 선생님이 담배를 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병원에서 주사기 하나로 열 사람 스무 사람에게 계속 사용했었습니다. 학교에서 예방주사 맞을 때는 60명이 넘는 한 반 학생들이 주사기 하나로 다 맞았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합니다만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는데 지나서 보면 아찔한 경우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아찔한 경우가 아니라 가슴 아픈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이들 마음을 울린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던 나

한밤중 자다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로는...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슴 아프게 반성하게 하는 시입니다.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그러면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 주님은 그래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라는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올라가시기 위해 예루살렘 입구에 있는 베다니에 들리셨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로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아마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잔치였으리라 봅니다. 대개 잔치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베푸셨지요. 가나 혼인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집 분위기가 말이 아닐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는데 말그대로 잔치를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앞을 보지 못한 사람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이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 고치신 것도 그 사람에게는 일생일대에 잔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예수님이 언제나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입장이었고 사람들은 예수님 덕에 잔치집 기쁨을 맛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유일하게 이때만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보고 가룟 유다가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 도와주지 왜 허비하느냐고 불만을 토하지요. 4, 5절을 봅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4,5)

 

마태복음에는 가룟 유다가 ‘어찌하여 허비하느냐’라고 꾸짖었다고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지 어찌하여 이런 식으로 허비하느냐, 꽤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가룟 유다가 도둑이어서 이걸 돈으로 바치면 자기가 챙기려는 계산을 깔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예수님으로서는 대단히 섭섭한 말입니다. 만약 누가 나에게 선물을 하나 주는데 옆에 있던 친구라는 녀석이 ‘야, 뭐하러 돈을 이렇게 쓸데없이 낭비하냐? 이 돈 갖고 길거리 노숙자에게 빵이라도 사 주지!’라고 한다면 그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까? 아니, 예수님을 위해 쏟아부은 것을 가지고 허비라니요? 예수님은 이런 대접 받으면 안 되고, 잔치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되는 겁니까?

이것이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주님 만나서 그 힘들고 고통스럽던 문제들 해결 받고, 주님 은혜로 그 어려웠던 일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 한 번 정도는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셔도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드리는 일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항상 주님으로부터 은혜도 받고 복도 받고 뭐든 받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마치 엄마 입장은 생각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항상 이해하실 거라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오른손이 범죄 하면 잘라버리고 눈이 범죄 하면 빼버리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설마 그렇게까지 몰인정 하시겠어, 긍휼이 무궁하신 분인데! 이번에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지!’라며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느냔 말입니다. ‘주님은 다 가지신 만유의 주님이셔. 우리에게 뭘 원하시고 하시는 분이 아니야!’ 맞는 말 같지만 결국 주님을 위해 시간도 드리기 아깝고 노력도 무엇도 드리기 아깝다는 핑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그래도 분인 줄 아는데 그래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2. 기회는 마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일을 기록하면서 정확한 때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1, 2상반절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1,2상)

 

이 일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유월절은 매년 한 번씩 지나가는 유월절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 유월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달려 죽으시기 엿새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일이 있었다 이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곧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는 그저 오빠 일로 너무 감사해서 우러나오는 마음에서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예수님 죽으심을 예비하는 일이 되었고, 예수님 죽기 전 예수님을 위한 마지막 섬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저는 이것을 어머니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힘들다는 신발공장에 다니셨는데, 아침에는 6시면 나가시고 저녁에는 야근이다 뭐다해서 늦게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소풍 갈 때가 되면 그 늦은 시간에 장을 보셨습니다. 6시에 나가시는 분이 아침에 일어나보면 도시락을 준비해서 용돈 얼마와 함께 두고 벌써 출근을 하셨습니다. 언제 주무셨는지.... 주님이 꼭 그런 분입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시기에 어떤 때는 주님의 일하심이 너무 정확해서 우리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데 기가 찬 필연이어서 놀라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더 지나보니 하나님께서 왜 그때 그렇게 하셨는지 깨닫고는 미안하고 감사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일하신 주님의 흔적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데는 바쁜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 효도하려고 하니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일도 기회가 마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절실히 느꼈습니다. 예배? 때로는 반복 되는 예배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뭐 예배는 내가 원할 때 교회 가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는 것 아니야?’라고 쉽게 생각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심각하자 아무리 원해도 모여서 예배드릴 수 없는 겁니다. 말씀을 배우는 일도 코로나가 심각하자 다 중단되었습니다. 내 원할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할 기회가 마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코로나보다 더한 상황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로, 어떤 사람은 말씀과 기도생활로,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절대로 예수 욕먹이지 않겠다는 각오와 삶으로, 어떤 분은 은혜받고 그때부터 골목 다니면서 쓰레기를 줍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합니다’ 그럽니다. 주님 사랑하는 일이 각자 다양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고, 기력이 쇠해지고, 갑작스런 변고라도 만나게 되면 기회가 사라지고 맙니다. 무슨 더 큰 복을 받을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은혜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 갚으려고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그런 믿음으로 해야 복이 됩니다.

 

 

3. 예수를 살려야 내가 삽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리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렸습니다. 3절을 봅시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했을 때 가룟 유다만 아깝다 생각했을 것이라 보지 않습니다. 아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냥 통째로 드려서 예수님이 매일 한 방울씩 찍어 바르게 할 것이지 저 비싼 것을 왜 저런 식으로 쓰나? 얼굴에 바르기도 아까운 것을 왜 발에다 다 붓나? 수건으로 닦아 드리면 될 것인데 머리털로 저렇게 할 것까지 있나?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이 실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머리 위에 이고 삽니다. 물질이 사람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발아래 있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사람 머리 위에 있습니다. 사람 잃은 것보다 물질 잃은 것을 더 안타까워 합니다. 사람보다 물질이 앞섭니다. 또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실은 주님이 내 심부름꾼이고 내가 주인일 때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습니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는 발아래입니다.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자기 머리를 항상 예수님 발아래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내가 살고 집안이 살고 인간이 살고 세상이 삽니다.

사람들이 예전에는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어렴풋이나마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믿는 사람조차도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죽여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축구 모임의 한 목사님이 책을 하나 선물로 주는데 철학책이었습니다. 이분이 어찌 이리 어려운 책을 보시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목사님도 철학을 전공하셨더군요. 그 책을 보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호모데우스(HomoDeus)의 시대’라고 해요. 호모는 인간이란 말이고 데우스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정확한 말이라고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독일 철학자 니이체가 인간이 자꾸 연약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니까 인간이 불행하다고 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지워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니이체의 철학은 모든 영역에 들불처럼 퍼져갔고 니이체 이후 인간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제거하는 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지우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인간이고,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신이 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죽이고 인간이 신이 되고 돈을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신 노릇을 하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존층이 파괴되었습니다. 남극대륙에 얼음이 녹고 풀이 자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존 열대 우림이 거의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일 년에 인간의 먹이로 죽는 소가 5억 5천만 마리, 양과 염소가 10억 마리, 돼지가 13억 마리, 오리가 26억 마리, 닭은 무려 520억 마리로 늘어났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후 100년 만에 인간이 수천 종의 동물을 멸종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파괴하고 있습니다.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수술을 버젓이 행하고 있고, 인간을 복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돈이 안 되는 사람은 인간 취급 안 해 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는데 인간은 보기에 역겹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아직 이래도 되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뭐든지 할 위험한 사람이 됩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길이 진정 우리 인간을 위한 길입니다. 이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개인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자리가 희미해지면 그때부터 삶이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삶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길은 돈도 아니고 나도 아닙니다. 주님 자리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 믿을 때는 내가 죽고 예수가 주인이라고 절실히 깨닫고 고백하고 믿었는데, 살다 보면 그 마음이 아침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무슨 극악한 죄를 지어서 타락이 아닙니다. 마음에 예수가 죽고 내가 살아나면 타락입니다. 오늘 이 사건 앞뒤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 이야기가 샌드위치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이고 우리가 처한 신앙의 위기입니다. 예수를 마음속에 살려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살려 내십시오. 그러면 가정이 살고 세상이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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