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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라
2020.05.04 17:18
제목 | 이렇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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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6:1-6(신약196) |
날짜 | 2020-05-03 |
설교자 | 전용표 목사 |
성경 : 사도행전 6:1~6(신약 166)
제목 : 이렇게 하라
코로나사태와 관련하여 앞으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 오늘 본문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코로나 이후 교회가 갖출 신앙
코로나사태로 우리교회는 9주간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렸습니다. 우리보다 더 길게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해서 드리는 교회가 있습니다만 이 근처에서는 우리교회가 가장 길게 한 교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부분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한달 정도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세 드신 어르신들만 있는 교회들은 방송설교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예배를 중단하기도 그렇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교회들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고, 또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마당에 누가 더 잘 했고 못 했다는 평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9주간이나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해서 드리면서 제가 느낀 것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교회가 저력(底力)이 있는 교회라는 점입니다. 우리교회는 뜨거운 교회가 아닙니다. 뜨겁게 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만 뜨거워지지 확 뜨거워지는 교회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차가운 교회냐? 보기에 따라 냉랭한 교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냉랭한 교회라기보다는 차분한 교회, 생각이 있는 교회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합니다. 크게 화려하게 뭘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나름 다들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맞는가를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니면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또 동네에서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애를 쓰며 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부분입니다. 말 그대로 저력입니다. 원래 저력(底力)이란 말이 보이지 않게 밑바닥에 깔려있는 힘이란 뜻이니까 우리교회는 저력이 있는 교회가 맞다, 이 말씀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앞으로의 전망을 한 번 해 본다면, 첫째, 앞으로는 더더욱 개인 영적 생활을 잘 해 나가는 성도가 집회위주에 길들여진 성도보다는 위기상황을 잘 헤쳐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사람들 모아놓고 뜨겁게 달구는 집회 위주로 흘러왔습니다만 거기에 길들여진 성도는 집회가 중단되면 맥을 못 춥니다. 그러나 혼자서 말씀을 보고 기도생활을 꾸준히 해 나가는 신앙을 배운 성도는 어떤 위기상황이 와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둘째, 첫 번째와 이어지는 맥락입니다만 교회가 성도들을 자꾸 수동적으로 만들지 말고 능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순종을 강조하면서 말 잘 듣는 성도를 만들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통했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다들 배울 만큼 배우고 똑똑합니다. 무조건 순종해라, 이런 것 잘 안 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인 만들어서 교회가 더 발전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 또다시 코로나사태가 올 수 있다고 하는데, 수동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한 성도들이 많아가지고는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능동적인 신앙으로 가야합니다. 성도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신앙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스스로가 말씀을 찾아 먹고 책 볼 수 있는 사람은 신앙서적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고 또 말씀과 교리를 공부도 하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상한 데는 가지 마시고요. 꼭 교회에서 프로그램으로 하지 않더라도 남을 돕고 봉사할 기회를 찾아서 능동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런 교회가 코로나사태 이후에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상식을 갖춘 성도와 교회라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통해서 신천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성교회들 중에서도 몰상식적인 모습을 드러낸 교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기성교회를 신천지와 비슷하게 평가를 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래서는 코로나사태 이후 전도가 더 힘들어집니다. 코로나사태 이후 아마 신뢰도 조사에서 기독교는 더 점수가 내려갈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전도에 역풍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교회는 몰상식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보면 상식을 무시할수록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평가하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러면 교회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집니다. 신앙이 분명 상식을 초월하는 면이 있지만 몰상식이 되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제가 우리교회가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번에 코로나 사태 중에 여론파악을 위해 성도들과 통화를 해보니 우리교회 성도들이 지극히 상식적이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적인 신앙에 빠져 몰상식한 생각과 판단을 한다고 느낀 경우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집회위주의 신앙생활이 아닌 개인영적생활이 중심이 된 신앙생활로 가야합니다.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능동적인 신앙생활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상식적이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구별된 신앙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번 코로나사태를 교훈삼아 더욱 건전한 신앙으로 전진해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2. 이렇게 하라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교회가 일곱집사를 세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도 다음 주에 일꾼을 뽑습니다. 교회가 일꾼을 세운다는 것은 감사한 일인 동시에 어려운 일입니다. 일꾼 세우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실은 한 가지 이유로 압축됩니다. 바로 사람의 욕심입니다. 누구의 욕심이든지 욕심이 강하게 작용하면 반드시 시험들 일이 생기는 것이 바로 일꾼 세우는 일입니다. 비결은 자꾸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말씀을 흉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된 이유는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성도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었는데 자꾸 헬라파 유대인이 소외되는 겁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에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히브리말을 쓰는 본토박이들이고, 헬라파 유대인은 그리스말을 쓰는 이주민들입니다. 조상적부터 다른 나라에 나가 살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정착한 사람들이지요. 양식 나눠주는 일의 총책임은 사도들이 맡았지만 실무는 성도들 중에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본토박이들은 빠짐없이 챙깁니다. 그런데, 이주해온 헬라파 유대인들은 꼼꼼히 안 챙겼던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면 문제가 안 됐겠지만 빈번하게 생기니까 이것이 쌓이고 쌓여서 폭발을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도들에게 가서 항의를 합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그 항의를 묵살하지 않고 오히려 반성을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하기에도 빠듯한데 양식나눠주는 일까지 맡아서 하다보니 이런 일이 생겼구나, 양식 나눠주는 일은 집사를 뽑아서 그들에게 온전히 맡겨야겠다.” 교회는 뭐니뭐니해도 말씀과 기도가 우선이라야 합니다. 너무 행사가 많고 일이 많아 일하는 것이 전부가 되는 교회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시끄럽고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 가르침은 교회의 여러 사역 중 하나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역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들은 이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맡길 테니 일곱 사람을 뽑아오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 임명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결정에 맡깁니다. 공동체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성령충만한 사람이라야
이렇게 일곱 사람을 뽑아오라고 하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나 뽑으면 안 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첫 번째로 성령충만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교회 일은 똑똑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 전하고 전도하는 일만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일은 모두가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주방에서 밥하는 일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보다 시험 들기 쉬운 일이 없습니다. 차량운행도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운전대에 앉아서 짧게라도 기도하고 운행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안전하게 해주십시오. 운전하면서 화내지 않게 하시고 급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물질을 담당하는 일은 돈 계산 빠르고 똑똑하면 잘 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물질의 유혹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해야 믿음으로 재정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야
두 번째로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전체를 살피는 눈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양식 나눠주는 일이 문제가 된 이유가 바로 이 전체를 살피지 않아서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형평성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사람은 교회를 전체적으로 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나하고 친하다고 그쪽 위주로 일을 처리한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교회가 시험에 듭니다. 형평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친동생이라도 서운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체를 살피는 자세입니다.
3) 칭찬받는 사람이라야
세 번째는 칭찬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여기서 칭찬받다는 말을 찾아보고는 날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칭찬하면 ‘칼로스’라는 말을 씁니다. ‘좋게 말하다, 잘 말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쓰고 있는 말은 ‘말튀레오’라는 말인데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칭찬 몇 마디 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나할 것 없이 그 사람에 대해서 이러는 겁니다. ‘그 사람은 내가 보증합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내가 증인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야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 좋은 교회에서 위대한 교회가 되는 길
그랬더니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일곱 사람을 뽑아왔습니다. 일곱 사람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입니다. 이 일곱집사의 이름들은 모두 헬라식 이름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비주류에 속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몰표를 준 것입니다. 그동안 헬라파 유대인들을 은근히 소외시켰던 자신들의 좁은 마음과 그로 인해 힘들어 했을 저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돈 자루와 곡간 열쇠 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힘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저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내어줬습니다. 여러분 두 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TV리모콘 양보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신앙의 최고수준은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교회가 어렵고 힘들어지는 이유는 기득권 때문입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고 기득권을 쥐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그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위대한 교회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 많았습니다. 그러나 문제 앞에 주저 앉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통해 더욱 성경적인 교회로 변해갔기 때문이고, 기득권까지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았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라북도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여년 전 금산교회에서 금산지역의 땅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양반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조덕삼은 예수를 믿은 다음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에게도 권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교회에서 장로를 세우는데,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되고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교회를 때려치울 법도 한데 조덕삼은 여전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다음 번에 장로를 세울 때 조덕삼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조덕삼은 자기집 머슴출신인 이자익의 총명함을 보고 사비를 들여 평양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자익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조덕삼은 나중에 이자익을 청빙하여 금산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게 하고 자신은 그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맺는 말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곳이 될 때 좋은 교회에서 위대한 교회로 발돋움합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기득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당할 수 있는 각오와 결심 그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기득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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