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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 21 이 사람을 보라

2020.04.05 08:27

배재우전도사 조회 수:181 추천:3

제목 요한복음강해 21 이 사람을 보라 
본문 요한복음 11:17~37(신약 165) 
날짜 2020-04-05 
설교자 전용표 목사 

4월 5일 가정예배지

 

인도 / 가족 중에서

 

1. 시작기도

 

하나님, 지난 한주간도 근심걱정많은 세상가운데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도들이 가정에서 드리는 주일예배를 통해 영광 받아 주시고 강같이 흐르는 주님의 긍휼에 지친 우리의 심신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찬 송 :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3. 성경봉독 : 요한복음 11장 17~37절(신약 165)

 

4. 강 론 : 이 사람을 보라 / 전용표 목사

 

 

5. 기 도 : 인도자나 가족 중에서

 

하나님, 오늘 말씀속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이 주님이심을 다시금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만 우리는 이해받기 위한 변명도 많고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불만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을 통해 참된 인생의 모습에 눈 뜨게 하시고 주님을 닮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오늘 말씀에서 진실된 모습으로 사셨던 주님을 보면서 왜곡된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은 우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생각이 굽어지고 감정이 굽어지고 뜻이 굽어진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매사에 진실되게 사신 주님의 모습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 좋은 것을 보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것을 보면 슬퍼할 줄 알며 불쌍한 것을 보면 측은히 여기고 불의한 것을 보면 의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작은 고난 앞에 쉽게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어오시는 주님 앞에서 주님은 지금 이 문제에 부활의 능력이 되심을 믿고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도‘예, 주님, 제가 일어서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 예배를 받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은혜베푸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 주님의 기도

 

요한복음강해 21

성경 : 요한복음 11:17~37(신약 165)

제목 :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 빌라도가 사람들더러 “이 사람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1640년 귀도 레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이 피를 흘리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 특이한 점은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시는 주님 손에 지팡이가 들려 있다는 점입니다. 화가가 왜 지팡이를 그려넣었을까? 고난받으시면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셨던 이 주님이 우리의 인도자, 즉 우리가 믿고 좇아가야할 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여섯 번째 드리는 가정주일예배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고난주일이어서 죽은 나사로 집에 찾아가신 주님의 모습을 주님의 고난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고난 속에 산 자를 보라

 

 

예수님이 나사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삼일째 묻지만 유대인은 당일날 묻습니다. 시신을 묻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죽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안장을 한 후에 일주일 간 애도의 기간을 보내는데 예수님이 애도 기간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기별을 받고 마르다가 먼저 맞으러 나옵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르다가 그럽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주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인데, 왜 조금 더 서둘러 오셔서 고쳐주실 것이지 이렇게 늦게 오시는 바람에 오빠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너무 아쉽고 해서 하는 말이겠지요. 32절에 보면 나중에 기별 받고 나온 마리아도 같은 말을 합니다. 37절에 보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단 말인가?’라며 조문객들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이들의 안타깝고 슬픈 심정이야 이해가 되지만 우리가 조금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것이 주님을 원망할 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습니다. 아프기도 합니다. 적게 아프고 많이 아프다 차이지 아프지 않고 사는 사람 없습니다. 나도 예외 아니고 내 가족도 예외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당연한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원망은 언제나 주님의 몫이 된단 말이지요.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다 힘든 것인데 막상 내가 힘들면 주님을 향해 섭섭해 한단 말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고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아쉬움과 원망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입니다. 마르다나 마리아, 조문객들은 주님의 계획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만 아니라 주님은 평생 이해받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로부터도 말이지요. 이것이 주님의 고난입니다. 채찍에 맞고 십자가 지신 고난만 생각하지만 실은 주님의 삶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평생을 이해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쓰라린 고난이었겠습니까?

이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애당초 모두에게 이해받으며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이해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에는 오해가 필수입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쓰라림이 있을 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다 이해시킬 수도 없고 또 그걸 바라는 것도 욕심입니다. 오늘 주님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와서 슬픔에 찬 아쉬움을 말하고 마리아가 와서 그러고 사람들이 또 그래도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으십니다. 이해를 구하다 보면 변명이 늘고 변명이 늘면 오해받느니만 못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저 주님의 능력의 손만을 바라봐서는 곤란합니다. 내가 겪는 인생의 갖가지 어려움을 똑같이 겪으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깨달음이 생깁니다. 그 깨달음이 위로입니다. 그 위로가 경험되면 견디고 버티고 이기게 됩니다.

 

 

2. 진실한 사람을 보라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조문객들이 슬퍼하면서 예수님께 아쉬움과 원망스러운 마음을 쏟아낼 때 예수님은 이해를 구하지 않으시고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3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3)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분개하다 비난하다’인데, 그렇다해서 예수님이 마르다나 마리아, 조문객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 여기시면서 화를 내셨다는 식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굉장히 가슴 아파하시면서 감정이 격할 정도로 슬퍼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늦게 오셔놓고 또 이렇게 슬퍼하신다?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면서 또 이렇게 슬퍼하신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을 철저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전혀 없이 로봇처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실하게, 정말 참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행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아파서 죽어가고 여동생들은 걱정하고 슬픔에 겨워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때에 맞추느라 늦추셔야만 하셨습니다. 그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의 비통함은 아마 그 억누르고 억눌렀던 아픔과 슬픔이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이겠지요.

주님은 매사가 진실하셨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면 가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보시고는 분노하셨습니다. 불이익이 겁이 나서 불의에 대해 분노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당대 최고권력자들의 자금줄인 성전매매에 대해 두려움 없이 분노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만나셨을 때는 스플랑크니조마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기계와 너무 가깝다 보니 감정도 기계처럼 딱딱하고 날카로워져서 따지고 싸우기는 잘해도 측은히 여기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슬퍼하는 자들을 보시면서 비통한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빨리빨리 지나가고 즉흥적인 삶에 익숙하다 보니 남의 슬픔을 함께 느낄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 더 문제는 사실 슬픈 것을 보고도 슬퍼할 마음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이겠지요.

세상이 왜곡된 모습으로 살도록 강요하는 세상이다보니 우리네 감정도 표정도 마음까지도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시간을 내어 성경을 펴고 주님을 더 들여다 봐야합니다. 저는 주님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 좋습니다. 주님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보입니다. 내 부족이 보이고 내 비참함이 보이고 내가 가야할 곳이 보이고 내가 품어야할 희망이 보입니다. 참사람이신 주님을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할 때 참인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가 참인간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3. 부활이신 자를 보라

 

 

주님은 슬픔에 겨워 아쉬움과 원망의 넋두리를 하는 마르다에게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23~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ㅣ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3~26)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는 것인 줄 알고 마지막 날에는 죽은 사람이 다 부활한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선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죄가운데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마지막 부활 때에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서, 지금 바로 이 문제에도 네가 부활을 믿느냐 이 말씀입니다. 네가 부활을 믿는다고 한다만 너의 그 믿음이라는 것이 죽은 네 오라비가 마지막 때가 아닌 지금 여기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냐? 네가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는다고 한다만 정말 그 믿음으로 너는 일어설 수 있느냐? 이 주님의 질문을 오늘도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클래식 음악에 취미가 별로 없습니다만 유독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하고 뛰는 것이 있습니다. 베토벤 얼굴을 그려놓은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해보입니다만 실제로는 병약하여 간경화, 신장질환, 폐질환을 평생 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이십 대 후반부터 귀가 멀기 시작해서 잘 들을 수가 없는 생활을 하다가 40대가 되어서는 귀가 완전히 멀었습니다. 음악가로서는 사망선고를 받은 셈입니다. 귀가 멀자 덩달아 찾아온 것이 우울증이었습니다. 베토벤이 두 동생에게 남긴 유서를 보면 베토벤은 심한 우울증에 평생 시달렸고 한시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베토벤이 남긴 대부분의 명곡들은 대부분은 귀가 완전히 멀어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 40대 이후의 작품들입니다. 베토벤이 남긴 곡들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은 아마 아홉 곡의 교향곡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베토벤 자신이 가장 위대한 곡으로 꼽은 곡은 <장엄미사곡>입니다. 인생 말년에 작곡한 그 곡에는 베토벤의 절절한 신앙고백이 담겨있습니다. “하늘 높은데 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성부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로 시작하여 “성부의 어린양 그리스도, 세상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시여,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평화를 주소서!”라고 끝을 맺는 그 노래에서 베토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중심악장 부분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주 장엄하게 노래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노래하는 대목에 자신의 고난이 들어있고, 고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겨낸 인생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음악가로 살게 하신 고난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고백과 찬양이 들어있습니다.

고난보다 그리스도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고난보다 그리스도를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때도 없습니다. 고난의 그리스도보다 더 은혜로운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육신의 질병과 아픔, 물질의 어려움이 주는 괴로움, 사람이 주는 고통과 환경이 주는 힘겨움, 어떤 것도 우리를 완전히 거꾸러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합니다.

 

 

맺는 말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쳐다보고 자란 사람은 바윗돌처럼 우람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었고 뒷동산에 큰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가 있어 그 나무를 보고 자란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쉴만한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고난이 부활의 영광이 되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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