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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 19 세 가지 보석

2020.03.22 09:45

배재우전도사 조회 수:175 추천:1

제목 요한복음강해 19 세 가지 보석 
본문 요한복음 10:1~10(신약 162) 
날짜 2020-03-22 
설교자 전용표 목사 

3월 22일 가정예배지

 

인도 / 가족 중에서

 

1. 시작기도

 

하나님, 지난 한주간도 우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가정예배로 드리는 주일예배를 통해 영광받으시고 연약한 우리에게 한없는 긍휼을 베풀어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찬 송 : 568장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3. 성경봉독 : 요한복음 10장 1~10절(신약 162)

 

4. 강 론 : 세 가지 보석 / 전용표 목사

 

5. 기 도 : 인도자나 가족 중에서

 

하나님, 오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지만 타락한 세상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때로는 가진 물질에 따라 대하고, 때로는 기계부속품처럼 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여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깊이 마음에 담아 우리 마음이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해지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우리 길을 인도하여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너무 사랑하다가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의미있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아픔과 절망스러운 환경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여전히 아름답게 만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어느 자매님의 고백처럼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상처와 아픔의 힘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을 우리들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족하지만 우리 삶을 통해 영광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 주님의기도

 

 

 

요한복음강해 19

성경 : 요한복음 10:1~10(신약 162)

제목 : 세 가지 보석

 

 

코로나사태로 어려움과 불편 속에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길 기도하고 아울러 큰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형이 낚시하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낚시를 하지 않았지만 심심하지가 않았습니다. 구경만 하는 데도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였기 때문이고, 또 그곳 경치가 눈을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금방 잡은 물고기로 즉석에서 회를 떠 초장에 찍어 먹는데, 바닷바람을 맞으며 좋은 경치와 함께 먹는 회맛은 가히 일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으면 얻는 것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목자가 그러한 존재입니다. 양은 염소와 많이 닮았는데 염소처럼 강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고 빠르지도 못합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조금 과하게 몰면 의외로 쉽게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양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한 짐승이 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의 선한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당신의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을 좇아갈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1. 인격적인 존재로 여김받습니다

 

 

먼저 2, 3절을 읽겠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가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2~3)

 

주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에서 양을 불러낼 때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불러서 인도하여 내신다고 합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을 통해 얻게 되는 첫 번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과 거의 흡사한 양치기 문화를 가진 지역에 여행을 가서 찍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밤이 되니까 목동들이 각자 자기 양떼를 몰고 와서 들판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리 안에 집어넣습니다. 이 집 양, 저 집 양, 여러 집 양들이 한 우리 안에 섞여서 잠을 잡니다. 여러 집 양들이 저렇게 섞이면 어떻게 분리해 내냐고 여행자가 목동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동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 집 양들 얼굴을 다 알고 있고 또 양들은 다들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다 따라옵니다.” 몇 백마리 되는 양들 얼굴을 다 안다는 것도 신기하고 양들에게 제 각기 이름이 다 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목자로서 우리를 대하실 때 도매급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대하신다고 하십니다.

저는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상장을 주거나 수료증을 줄 때 ‘이하동문’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일일이 다 읽고 전달합니다. 처음에는 흔히들 하는 방식대로 대표자 것만 내용을 다 읽고 ‘나머지’ 아이들은 이름을 부른 다음 ‘이하동문’이라 하고 전달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상장을 받는 아이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겁니다. 그 표정속에서 어린아이도 자신이 도매급으로 취급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머지’가 아니었습니다. 엄연한 하나의 인격체였습니다. 그때부터 내용을 다 읽고 전달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도매급으로 취급받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왜냐? 인격적 존재로 대우받고 싶은 것이 본능적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내실 때 “몇 년 몇 월 몇 일, 총 35,145명 출생시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신경을 써서 세상에 내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편의상 누구누구 외 몇 명 이런 식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연일 ‘확진자 몇 명, 사망자 몇 명’이라는 통계를 접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통계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뉴스를 보고 사람들은 그저 사망자 몇 명 늘었구나라고 반응합니다. 그런데 그 사망자 숫자에 든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통계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저 확진자 몇 명, 사망자 몇 명, 이러고 말고, 또 많이 늘었네, 조심해야겠다, 이러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통계를 내서 발표를 하지만 통계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합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신다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은 굳이 사마리아로 지나는 길로 가셔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의 해결불가능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밤에 몰래 찾아왔던 니고데모지만 싫다 않으시고 진지하게 만나시고는 영혼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고요. 나병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만나주셨습니다.

이 주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이렇게 대하신다는 사실을 묵상하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마음을 가질 때 세상에서 구겨진 마음이 말끔하게 펴지게 됩니다.

 

 

2.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을 좇아갈 때 얻게 되는 두 번째 유익은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4, 5절을 읽겠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4,5)

 

주님 말씀에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목자를 따라가고 목자 아닌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목자가 아니면서도 믿고 따라오라는 소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만을 따라갑니다. 그 음성을 따라가다보면 평탄한 길만 있지 않고 불편하고 험한 길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청년 때는 방황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방황을 많이 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도 하고 자기 길을 찾기 위해 방황도 하고 세상에 대해 이유없는 반항같은 방황도 합니다. 그런데 방황을 길게 했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의 깊이도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방황을 많이 해봤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황을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하지요. 어쨌든 청년의 때 방황을 해 볼 필요는 있지만 방황을 길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빨리 길을 찾고 방향을 정해서 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면 청년들이 하는 방황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 사람도 방황을 합니다. 나이든 사람의 방황은 인생이 무료하고 허무하고 허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나이든 사람의 방황이고 실은 잠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살다 보면 그런 시간이 찾아옵니다.

청년기의 방황의 원인은 인생을 모르고 자기자신을 몰라서 하게 되는 방황이라고 한다면 장년기의 방황은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게 되는 방황입니다. 죽자 사자 자식 위해서 살때는 방황할 겨를이 없다가 장성한 자식이 품을 떠나고 사랑을 쏟을 대상이 사라지면 갑자기 멍해집니다. 마음이 진공상태가 됩니다. 그게 방황입니다.

그런 방황을 끝내는 길은 달리 없습니다. 주님을 다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베토벤이 이사를 하게 되어 마차에 짐을 싣고 이사할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마무가 이삿짐을 내리려고 베토벤을 찾아보니 마차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어느 숲을 지나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마차에서 뛰어내린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그 숲에서 밤새도록 작곡을 하다가 날이 새고야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돌아간 집은 새로 이사간 집이 아닌 예전 살던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베토벤은 산책을 하다 악상이 떠올라서 노트에 적다가 길을 잃기가 일쑤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베토벤은 자주 길을 잃곤 하는 사람이지만 실은 길을 제대로 찾은 사람이지요. 사랑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사울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을 치면서 불시험의 골짜기를 헤맬 때 방황하지 않던 다윗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뒤늦은 방황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동안 휘몰아치는 폭풍을 겪고 난 뒤 다윗은 잃었던 길을 다시 찾게 됩니다. 그 비결은 다시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랑할 대상이 있습니까?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다시 주님을 사랑하시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3. 삶이 풍성해 집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좇아갈 때 우리가 누리게 되는 세 번째 것은 삶이 풍성해지는 복입니다. 9, 1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9, 10)

 

우리의 삶을 도둑질 하고 영혼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도둑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가 도둑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영혼에 생명을 주기는커녕 지키기도 벅찬 수많은 규정으로 사람을 옭아매서 마음 편히 숨도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빠지면 인생을 도둑맞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도 인생을 도둑질 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이단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최근 신천지에 빠졌다고 나온 사람들이 신천지를 상대로 청춘반환소송을 제기해서 1심에서 승소를 하였습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은 처음에는 잘해 줍니다. 돈이 필요하면 돈도 주고, 직장이 필요하면 직장도 알선해 주고, 세상에 그보다 좋은 곳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완전히 세뇌가 되면 그때부터는 갖다바쳐야 합니다. 시간도 갖다 바치고 돈도 갖다 바치고 인생을 죄다 갖다 바쳐야 합니다. 비단 이단이 아니더라도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정통교회에 속했다 하더라도 건전한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허구한 날 교회에 오도록 해서 일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한다든지, 이런 저런 명목으로 많은 헌금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코 주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갖다 바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씀을 굳이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질은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 수도 더 황폐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풍성함이란 어떤 상황 속에도 인생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으리라 봅니다. 심한 척추장애로 키가 자라지 않은 편물기술자 김혜영씨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김혜영씨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딸이라고 화를 내며 술에 취해 방바닥에 던져버리는 바람에 척추를 다쳐 키가 자라지 않고 양쪽 다리 길이가 심하게 차이가 나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학교는 초등학교가 끝이었습니다. 엎친데 겹친격으로 고물상을 하시던 아버지는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어머니가 생활력이 없어 김혜영씨는 아홉 살이던 그때부터 불편한 몸으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엄마 대신 동생 넷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을 배우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편물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다닌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대접해주고 관심을 가져준 교회 사람들이 고마워서였습니다. 악착같이 기술을 배워서 전국기능대회를 휩쓸었고 1985년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 기계편물부문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김혜영씨는 어떤 선교단체 회보에 실린 아프리카 보츠와나 소식을 읽고는 보츠와나 청소년들에게 편물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미련없이 떠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그가 아무런 보수가 없는 일에 그 기술을 쓰기로 한 것은 자신처럼 세상으로부터 좌절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는 보츠와나 청소년들을 향한 묘한 끌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보츠와나에서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경영이 어려워진 보츠와나 직업학교가 문을 닫을 지경이 되자 김혜영씨는 자신이 그 학교를 떠맡기로 하고 교장이 되어 14년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선교부를 통해 김혜영씨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혜영씨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국제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도 세계를 누비며 희망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혜영씨만큼 가시많은 인생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내게 좌절을 권했지만 나는 희망을 찾고 싶었다. 내게 견딜만한 고통이 있다는 거은 축복이었다. 행복한 것은 그냥 지나가지만 아픔과 상처는 그 자리에 남아 반짝반짝 빛을 낸다. 나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그 상처와 아픔의 힘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주님은 가시 속에서도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상처와 아픔 속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빛을 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목자이신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입니다.

 

 

맺는 말

 

 

이러한 은혜가 이 한주간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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