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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18 쇠똥구리는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는다 
본문 요한복음 9:5~7(신약 161) 
날짜 2020-03-1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인도 / 가족 중에서

 

1. 시작기도

 

하나님, 지난 한주간도 우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예배를 통해 영광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찬 송 :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3. 성경봉독 : 요한복음 9장 5~7절(신약 161)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4. 강 론 : 쇠똥구리는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는다

/ 전용표 목사

5. 기 도 : 인도자나 가족 중에서

 

하나님, 우리를 아무런 편견없이 사랑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간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남을 왜곡되게 보고 남의 행동을 오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희들에게 편견과 선입견을 깨닫고 그것을 벗어버릴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냄받아 오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인생, 내가 원하는 상황, 내가 원하는 자리만을 고집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지금 주어진 시간과 자리와 상황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고 여기서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는 영광의 본체를 버리시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집에 붙들려 내가 저보다 쓸모가 많은 사람으로 자처하며 살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밝히시사 ‘주여 저는 쓸모없는 무익한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눈뜬 맹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눈뜬 존재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코로나 사태가 어서 빨리 끝이 나고 교회공동체로 모여 예배드릴 날이 이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 주님의기도

 

 

 

요한복음강해 18

 

성경 : 요한복음 9:5~7(신약 161)

제목 : 쇠똥구리는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는다

 

 

성도 여러분 오늘로서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린지 4주째입니다. 오늘도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 위에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초등학교 시절 신체검사는 속옷까지 검사하던 용의검사와 함께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일이었습니다. 신체검사가 시험도 아닌데 왜 그리 숫자에 집착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키를 잴 때는 1 밀리미터라도 늘리려고 몸을 있는 대로 늘어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더 웃기는 것은 시력검사였습니다. 정확한 시력을 재는 것이 중요한데 다들 점수컴플렉스가 있었던지 그것도 잘 받으려고 컨닝을 합니다. 먼저 검사한 아이들 중에 시력이 좋은 아이들에게 시력검사표의 글자모양을 물어서 외우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원래 시력보다 훨씬 높게 나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시력 측정 후 시력이 안 좋은 학생을 앞자리에 시력이 좋은 학생을 뒷자리에 앉도록 자리배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시력검사에서 컨닝을 해서 시력이 높게 나온 친구가 뒷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칠판의 글씨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지요. 그렇게 해서 한동안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력검사 컨닝해서 나 시력이 2.0이라고 자랑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잘 보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어렸을 적에 좋았던 눈도 나이를 먹으면 나빠져서 잘 보이지 않게 되는데 비단 육신의 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도 그러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지혜의 눈이 밝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욕심이나 세상에 찌뜬 때가 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뭐든지 왜곡되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이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보면서 과연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가지고 진짜로 본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편견과 선입견의 비늘을 벗는 것

 

 

 

무엇이 눈을 뜨는 것인가? 먼저 오늘 본문 요한복음 9장 5~6절 상반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5~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치시는데 그 방법이 특이합니다. 땅에다 침을 뱉아 흙반죽을 하신 후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런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고쳐 주시지 굳이 이런 지저분한 방법으로 고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예수님 침에 효능이 있어서 이렇게 하셨다고 그러던데 재미나지만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침으로 반죽한 진흙을 발라 붙이신 것은 이 맹인뿐 아니라 우리 인생들 모두가 실은 눈에 진흙을 덕지덕지 붙이고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는 맹인임을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맹인으로 태어나서 앞을 보지 못하지만 너희는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마음에 온갖 죄와 잡다한 것들이 가득 들어차서 항상 왜곡되게 보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며 사는 존재들 아니냐, 이 말씀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직장에서 너무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집사님이 쓴 보고서를 몰래 고쳐서 부장님께 야단을 맞게 한다든가, 부장님 지시사항을 전달할 때 자기만 쏙 빼고 전달을 해서 불이익을 당하게 한다든가, 사무실 사람들에게 자기에 관한 나쁜 소문을 낸다든가, 해도 해도 너무 심하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선물도 주고, 일도 도와 주면서 마음을 맞추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고, 나중에는 원수지간이 되어서 신경전을 펼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몇 년 후 괴롭히던 사람이 직장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동안 당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 왜 그토록 괴롭혔는지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은 너무 어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새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랐는데 이 집사님이 자기 새어머니와 눈이 너무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괴롭힌 이유의 전부였습니다.

우리 마음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온갖 선입견과 편견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이 오래되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편견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관계가 복잡해져서 남도 힘들게 하고 자신도 힘든 것입니다.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내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눈에서 떨어져 나간 비늘 같은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그가 예수께 가지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이었습니다. 그게 떨어져 나간 것이 눈을 뜬 것입니다. 내 눈을 왜곡되게 하고 나아가서 내 인생을 굽어지게 만드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들이 떨어져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보내신 곳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눈을 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7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7)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맹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새롭습니다. 어떤 분이 오더니만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더니 반죽을 해서 눈에 바릅니다.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앞도 못 보는 사람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겁니다. 한바탕 싸울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실로암으로 갑니다. 그랬더니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신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담긴 뜻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내가 바라던 것이든 아니든 간에 주님이 보내신 자리요 주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곧 맹인인생에서 눈뜬 인생이 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주님이 주신 자리입니다. 지금 이 인생이 주님이 허락하신 인생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고 불만하고 원망하면 인생이 더 어두워집니다. 그게 맹인인생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칼을 빼 휘둘렀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표현이자 이것은 내가 바라던 인생이 아니라고 거칠게 거부하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8). 네 원하는대로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 원하는대로 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애시당초 인생은 내 시간표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사태로 인해 모두가 이 진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주일을 원했습니까? 누가 이런 답답한 상황을 바랐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도 우리가 얻는 것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이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캐내야 합니다. 이것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입니다.

엘리야선지자는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을 피해 시돈 땅에 있는 한 과부에게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을 향해 거부권을 행사했겠지요? ‘하나님, 왜 하필 바알의 본거지 시돈 땅으로 피하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가난한 과부에게 얻어먹고 지내라니요?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수치요, 사내대장부로서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갑니다. 보내신 곳이 내가 바라던 곳이 아니더라도, 또 살아가는 방식이 내가 원하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갑니다. 그랬더니 다함이 없는 은혜가 거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맹인이 누구입니까? 내 원하는 인생만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눈을 뜬 사람입니까? 보내신 자리, 보내신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다함이 없는 은혜가 부어집니다.

 

 

 

3.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

 

 

 

무엇이 눈을 뜨는 것이냐? 오늘 이 사건의 결론이 나와 있는 9장 40, 41절을 읽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9:40,41)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후 예수님은 내가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맹인이 되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이냐라고 반문하지요. 자기들을 맹인취급한다면서 기분 나빠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새인은 내가 남들보다 더 잘 안다는 자부심, 내가 남들보다 더 바르게 산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남들보다 쓸모있는 사람이다, 남들보다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을 남들과 똑같이 맹인취급 하니까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주님 앞에는 내가 남들보다 더 잘 안다, 더 바르게 산다, 더 쓸모있는 존재다,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라야 합니까?‘주님, 맞습니다. 제가 바로 맹인입니다. 제가 바로 쓸모없는 사람입니다.’이런 마음이라야 합니다.

장석이라고 하는 천하제일의 목수가 제자를 데리고 재목(材木)을 찾아다니다가 크기가 산봉우리만한 나무를 만났습니다. 제자는 입이 쩍벌어져서 놀라고 있는데 스승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갑니다. ‘아니, 스승님, 저렇게 좋은 나무를 어째서 거들떠 보지도 않으십니까?’라고 제자가 물으니 장석이 그럽니다. ‘쓸모없는 나무다. 쓸모가 있었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았겠느냐?’ 쓸모가 있었으면 목수들이 벌써 베가도 베갔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날 저녁 그 나무가 장석의 꿈에 나타나서 호통을 칩니다. “이놈 장석아, 네가 나더러 쓸모없다고 하였느냐? 네 기준으로는 내가 쓸모없어 보였는지 몰라도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내가 지금까지 잘려나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진정한 쓸모가 아니고 뭐냐? 만일 내가 네 기준대로 쓸모가 있었다면 지금 살아있겠느냐? 나는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그 쓸모라는 것이 없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각고의 노력 끝에 너희 인간이 말하는 쓸모가 완전히 없어졌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이것이 나의 쓸모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하는 마음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그때부터 진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바로의 궁정에서 공주의 아들로 살 때, 스스로 내가 지혜를 가졌고 내가 능력이 있고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자신을 쓸모 많은 존재로 여길 때는 주님께서 철저히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쫓겨나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그 자랑하던 쓸모라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사라졌을 때, 그래서 저는 못합니다, 저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쓰셨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짜 눈을 뜬 것입니다.

 

 

 

맺는 말

 

 

 

요즘은 사라진 쇠똥구리가 있습니다. 쇠똥을 돌돌말아서 집으로 옮기고 있던 쇠똥구리에게 누가 쇠똥구리가 굴리던 쇠똥덩어리만큼 큰 다이어몬드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러자 쇠똥구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쇠똥을 굴리는데만 정성을 쏟았습니다. 쇠똥구리 눈에는 다이아몬드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쇠똥만 귀할 뿐입니다. 우리 눈에는 진리의 길만이 귀하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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