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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15 우리는 누구인가 
본문 요한복음 8:1~11(신약157) 
날짜 2020-02-09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15

성경 : 요한복음 8:1~11(신약 157)

제목 : 우리는 누구인가

 

 

여러 목사님들이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듣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설교를 듣는 이유는 주로 부족한 점이나 고쳐야 할 점을 찾아서 다음 번에 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제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저도 한 때는 좋은 설교를 하려면 주일에 했던 설교를 꼭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선배목사님들의 교훈을 좇아서 제 설교를 녹음해서 들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했던 설교를 녹음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 목소리나 발음이 이렇게 부정확한지 몰랐습니다. 평소 말하면서 듣는 제 목소리와 녹음을 해서 듣는 제 목소리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발음은 더 했습니다. 아나운서들의 정확하고 매끄러운 발음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괴로울 정도로 발음이 부정확한 것입니다. 저의 설교를 매주 듣고 계신 여러분은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충격을 받고 그래도 몇 번 더 시도해보았습니다만 충격이 줄어들기는커녕 설교할 자신감마저 사라질 정도로 역효과가 커져만 갔습니다. 이러다 설교 못하게 되겠다 싶어서 제 설교를 듣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대신에 설교를 한 뒤에 설교원고는 여러 차례 읽으면서 고칠 것은 고치는 작업은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본다는 것은 충격입니다. 사람이 다들 자기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내 목소리와 녹음을 해서 들어본 내 목소리가 이렇게 다른데, 하물며 나라고 하는 사람의 실체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얼마나 더 다를까요? 어쩌면 하늘나라 가서 가장 놀라게 될 일은 거기서 나의 실체를 100퍼센트 확실히 알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구해 주신 사건입니다. 몇 번 설교를 했던 본문인데 이번에 이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있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누구를 정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더러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자를 돌려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들고 씩씩거리며 서 있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몰고 온 사람에다 성전에 있던 사람들까지 해서 많은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간음하던 현장에서 발각되어 끌려온 여자는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와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런다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돌멩이를 내려놓고 다들 돌아갔습니다. 7절 하반절에서 9절까지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7b~9)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적잖은 의문이 들곤 합니다. 어째서 이 말씀 한 마디에 다들 돌아갔을까?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지 않을까? 이때 사람들이 요즘 사람들보다 더 양심적이었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들이 돌아간 이유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잡혀왔다면 그 상대인 남자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남자는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랬을까?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들 역시 그 남자와 비슷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즐기는 남자들은 다른 남자의 간음에 대해서도 관대합니다. 간음을 남자들의 특권정도로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 남자일수록 반대로 여자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잣대를 갖다대면서 따지고 정조를 지켜야 된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이스라엘처럼 통제된 사회일수록 음성적으로 더 많은 죄들이 행해집니다.

이들은 두 사람이 간음하던 현장을 덮쳐서 남자는 문제 삼지 않고 여자만 잡아왔습니다. 여자만 잡아와서는 마치 자기들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어본 사람들처럼 돌을 들고 치려고 씩씩거리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은 놀랍게도 자기를 보게하는 능력있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서울의 한 부자 동네에 있는 큰 교회에 집사였는데, 주일에 교회를 가면 항상 거지 하나가 예배당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 거지를 볼 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넓은 서울 바닥에서 주일만 되면 이 교회 입구에 와 앉아있는 것이 마치 이런 무언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 너희 예수쟁이들아, 입만 열면 하나님 사랑 예수 사랑 하는데 어디 그 사랑 한 번 나한테 해봐라!’ 집사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이 거지에게 돈을 주는 교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거야! 저런 거지에게 돈을 주면 우리가 속는 거지, 줄 필요 없어!’ 매주 어김없이 예배당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거지를 볼 때마다 속으로 정죄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 거지를 고쳐준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웬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양심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 거지를 볼 때 한없는 부담감을 느껴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고쳐주었는데 나는 성경책을 들고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을 향해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필요한 것을 달라고 당연한 듯이 하나님께 손을 내밀면서 거지를 향해서는 저런 사람에게는 줄 필요 없고 주지 않는 것이 잘 하는 일이라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시키면서 살았구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향해서 나처럼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거지를 대하는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께 달라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모순되게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이건 도저히 예수를 믿는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거지를 통해 양심을 일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깨달아졌습니다.‘그래, 주자, 거지가 100만원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10만원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겨우 몇 푼 바라고 앉아있는 건데 매주 얼마씩이라도 줘야겠다!’ 그렇게 반성을 하고는 돌아오는 주일에 교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딴 데로 옮긴 것이지요. 오래 전 일이지만 아직까지 그때의 일은 양심의 가책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자기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 삶을 올바로 살아가게 하는 일에 이토록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봐야할 존재들입니다. 나의 실체는 실은 내가 정죄하는 대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보게 하십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한 그대로 나도 누군가에게 판단 받고 정죄당하는 일을 겪게 하실 때도 있고, 무의식 중에 습관적으로 행하던 내 모습을 쓰라리게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내 실상을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2. 우리는 용서받아야할 존재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온 목적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5~6절을 봅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5,6)

 

예수님은 참 난감한 올무에 빠지셨습니다. 만약 평소에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신 대로 용서하고 살려주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자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저 여자는 율법대로 죽어야 한다고 하시면 평소에 가르침을 본인 스스로가 어기게 되어 이 또한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개는 내가 살고 보는 쪽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용서와 사랑을 가르쳤어도 범위가 있는 것이지 저런 상습적인 여자는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형벌의 대상으로 보는 게 맞다, 벌줘라!” 이러고 빠져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쉬운 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과 같은 자리에 머무르셨습니다. 음행 중에 잡히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당시 미혼의 남녀가 선을 넘었을 경우 두 사람을 결혼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쪽에서 반대하면 배상금을 물어주고는 무마시키는 식이었지 이렇게 돌로 쳐서 죽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만약 미혼여성이 재력 있는 유부남과 관계를 가진 경우도 대개는 재력 있는 남자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든가 하지 음행죄를 물어 돌로 쳐 죽이려 드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여자는 직업적인 성매매 여성이거나 남편이 있는데 상습적으로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사는 소문 난 여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여자는 가련한 여자로 무조건 동정표를 받아야할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아닙니다. 형벌을 받아야할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줘야할 가치가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사람의 기준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따지는 일에 익숙합니다. 가진 물질에 따라 가치를 나누고, 역할에 따라 가치를 따지고, 능력에 따라 가치를 나눕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는 이 여인처럼 가치가 없어보이는 사람도 십자가 져서 구원해야할 불쌍한 양입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며 살아온 수가성 여인이나 고고한 인생을 살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주님이 십자가이 은혜로 용서받아야할 잃은 양이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하고 구원해야할 잃은 양이라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부자로 한편생을 살아온 삭개오나 거지로 한평생을 살아온 바디매오나 주님이 피흘려서 구원해야할 가난한 영혼이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가치를 따져서 사랑하시거나 용서하시거나 구원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여자를 죽이려던 자들이 다 돌아가자 주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값싼 용서는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자신이 죄인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죄인이 느껴야할 부끄러움과 비참함과 처참함을 죽을만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값싼 용서가 값싼 신앙과 영성을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비싼 값을 치르게 하신 뒤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죽을 정도로 힘들어 할 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스스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깊은 자책 속에 허우적 거릴 때 용서를 경험케 하십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할 죄인입니다. 그 점에서 모두가 동등합니다.

 

 

 

3. 우리는 함께 존재해야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미국영화를 보고 미국만화를 봐와서 그런지 모든 것을 흑백대립의 구도로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도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셨다, 이기셨다라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7절 하반절에서 9절까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7b~9)

 

수세에 몰리셨던 예수님이 잠시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시는 그 짧은 시간에 기발한 묘책을 생각해 내서 전세를 완전히 역전 시키셨다, 저들을 물리치셨다라고 생각하기 쉬운 대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처세술을 부리는 분이 아닙니다. 처세술을 잘 부리는 분이라면 예수님을 진리로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와 처세는 다른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 말씀은 정말 위대한 말씀입니다. 왜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우리 자신의 실체를 일깨워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누구를 패배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모두를 승리케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돌로 치려던 자들을 이기고 이 여자를 구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 말씀으로 돌로 치려던 자들을 이기고 그들에게 패배를 안기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승리를 주신 것이고, 이 말씀으로 이 여자만 구해주신 것이 아니라 돌로 치려던 자들까지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면서 남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죽이는 죄에서 주님이 이 말씀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그들까지도 건져주신 것이지요.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두 사람이 말콤 엑스라는 사람과 마틴루터 킹목사님입니다. 말콤 엑스는 백인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 싸워 백인을 이겨야 흑인에게 자유가 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틴루터 킹 목사님은 누구 한쪽이 이기는 승리가 아니라 양쪽이 다 이기는 승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장한 것이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여러 차례 나를 죽이려 위협하고 협박하였습니다만 나는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우리 흑인이 도덕적으로 미개하고 게으름뱅이들이라고 전국적으로 흑색선전을 해댔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가 흑인인권운동을 한다하여 당신들이 내 자녀들을 위협하고 우리집에 폭탄을 던진다 하여도, 정말이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인내하여 결국엔 당신들을 이길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자유를 찾을 것이며 그 자유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마음과 양심까지도 자유롭게 하는 자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승리가 곧 당신들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한밤의 노크소리」중에서)

마틴루터 킹 목사님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던 분입니다. 나의 승리가 저들의 패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승리가 곧 저들의 승리가 되고 나의 패배가 곧 저들의 패배가 되는 싸움을 킹 목사님은 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입니다. 누구는 의인이 되고 누구는 죄인이 되는 것은 이미 모두가 패배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의인이 되고 누구는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용서받아야할 죄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정죄받아 죽을 수밖에 없던 이 여자를 구해주셨고, 동시에 죄인이면서 의인행세를 하며 다른 죄인을 난도질 하려던 자들까지 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가 더 의롭다, 누가 더 악하다 하는 것은 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이 땅에 같이 존재해야할 자들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은 우리를 윽박질러서 억지로 무릎 꿇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패배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엎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승리입니다. 내가 주님께 지는 것이 인생에서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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