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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13 이해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을 때 
본문 요한복음 7:1~9(신약 154) 
날짜 2020-01-26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13

성경 : 요한복음 7:1~9(신약 154)

제목 : 이해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을 때

 

 

 

청년대학시절은 가장 에너지가 왕성한 시절입니다. 그래서인지 청년대학생 나이가 되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집을 벗어나서 자취생활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집에 말씀을 드렸더니 안 된다고 그러십니다. 부산에 살면서 부산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데 무엇 때문에 우욋돈 써 가며 자취를 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로는 꺾을 수 없는 뭔가가 그때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면서 뭔가 발산해보고자 하는 에너지라든가, 집을 벗어나서 나만의 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실현해보고자 하는 어떤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하는 끌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어머니께 다 설명하고 이해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자취비용은 알바를 해서 스스로 충당하기로 하고는 결국은 허락을 맞고 자취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해 시키고 이해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미워하고 미움받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살다 보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보다 훨씬 자주 일어나는 일이 미워하고 미움받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토록 자주 겪는 일들인데도 여전히 미숙한 것이 또 이런 일들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도 이런 문제를 겪으셨다는 것을 보고는 적이 놀랐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빼도 전체 흐름상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굳이 기록한 데에는 뜻이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가득한 조롱을 쏟아내는 장면과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를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오늘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자주 겪는 이해와 미움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애써 이해를 구하지 말고 세월에 강물에 맡기세요

 

 

 

우리나라 설날처럼 큰 명절인 유대인의 초막절 명절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향해 불만가득한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리러라 (3~5)

 

“형님,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어 안달이 나신 양반이 왜 이러고 계십니까? 이제 곧 초막절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대로 모이겠습니까? 그리로 가서 한 번 멋지게 자신을 드러내 보십시오!” 이런 말인데 형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말입니다. 아마 동생들은 형님인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겠지요. 어려서부터 좀 특별한 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집에서 가업인 목수일을 배우면서 함께 자란 형인데, 언제부터인가 집을 나가더니 광야로 가서 40일 금식을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해야한다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동생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남도 아니고 가족들이 이해를 못 해 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외롭습니다. 곁에 사람이 없어 외로운 것보다 곁에 사람이 있는데 외로운 것이 더 사무치는 외로움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는 애써 이해를 시켜야할 문제도 있지만 어떤 것은 세월의 강물에 맡겨야할 문제도 있습니다. 한번은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에 걸려서 차를 멈추고 서 있는데 건너편에 무슨 박스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게 뭔가하고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낌이 쌔한 것이 기분이 이상해서 그 박스 옆을 보니 어떤 아가씨가 저를 째려보고 있는 겁니다.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아가씨는 제가 자기 다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참 묘하게 꼬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어떻게 하긴요, 신호바꼈으니까 가야지요. 거기서 차를 세워두고 그 아가씨에게 가서 해명을 하며 이해를 구한들 그게 더 우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문제는 세월의 강물에 맡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잘 맡기지 못합니다. 조바심으로 인해, 억울함으로 인해 극구 이해를 얻어내려고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아직 때가 되지않은 문제들인 경우에는 십중팔구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말지요.

예수님을 보세요. 애써 동생들을 이해시키거나 이해를 구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아십니다. 때가 되면 밝히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을 아시기에 그냥 두십니다.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는 동생들이 형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고 예루살렘 교회에 신실한 일꾼이 되지요. 다 이해를 시키려고 하다가 더 꼬이고 복잡해 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다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인데 하물며 남이 내 인생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습니까? 욕심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맡겨두면 주님께서 때가 되면 오해도 이해로 바꾸실 날이 옵니다.

 

 

 

2. 자발적 미움을 즐기십시오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유명하고 싶으면 명절에 올라가서 한 번 자신을 드러내보라고 하는 동생들의 볼멘소리에 예수님은 당신이 어째서 외로운 존재인지를 밝히시는 대목이 6, 7절에 나옵니다. 6, 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6,7)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은 세상과 이질적인 존재이시기에 세상에서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예비되어 있다는 말씀이고, 예수님의 동생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기에 언제든지 세상이 환영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자기 말 잘 듣는 동생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진리를 좇아사시면서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은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미움받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고 왜 미워하는지를 아셨습니다. 사람은 미움을 받게 되면 어째서 내가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를 헤아리기보다는 기분 나빠하고 갚아주려는 감정에 먼저 휩싸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시덩굴이지 길이 아닙니다. 미움을 받아 기분이 나쁘더라도 우선적으로는 어째서 내가 미움을 받게 되었는가를 헤아려봐야 합니다. 미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미운 짓을 해서 받는 미움이 있고, 두 번째는 다윗이 사울에게 받은 것처럼 연단을 위해서 받는 미움도 있으며, 세 번째는 다니엘이나 예수님처럼 의를 위해 받는 미움이 있습니다. 연단하시려고 받게 하시는 미움에는 어떤 이유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억울하게만 느껴집니다만 그 미움도 인내하며 받아내면 높이 올리실 때가 찾아옵니다. 의를 위해 받는 미움에는 자꾸 타협하라는 유혹이 찾아오지만 끝까지 가면 면류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움을 받을 때 내가 받는 미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헤아려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모임에서 미움받는 사람의 특징을 몇 가지로 재미나게 적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첫 번째, 제 멋대로인 사람. 두 번째, 돈 버는 이야기나 돈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사람. 세 번째, 자기의견만 내세우는 사람. 네 번째, 남의 말 잘 끊는 사람. 다섯 번째, 입만 열었다하면 불평불만만 이야기하고 남 험담하는 사람. 여섯 번째,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사람. 대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만약 내가 미움을 받는데 어째서 미움을 받는가를 돌아보니 내가 이러고 있다? 그러면 이걸 고치면 됩니다. 내 좋은 이야기만 하지 말고 저 사람이 좋아하는 이야기도 하고, 남의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고, 어떤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의 규칙이나 앞의 인도자 말을 잘 따르고, 불평불만 좀 줄이고 좋은 점도 자꾸 말하다 보면 호감을 사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움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바른 것을 좇아 살고 의를 추구하면서 타협하지 않기에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두리뭉실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누구와 부딪힐 필요도 없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게만 살면 어떤 단체의 부정부패나 사회의 옳지 못한 관행 같은 것이 더 견고해지기만 하지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판단을 중단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시류 따라 살아가면 내 한 몸은 편할 수 있지만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이 정상 노릇을 하는 왜곡된 세상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사건건 문제 삼고 까다롭고 트집 잡는 사람이 되면 곤란합니다. 허허실실 웃을 줄 알고 농담으로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이 분명히 갈리는 지점에서는 좀 뾰족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몇 명이서 짝짱궁해서 비리를 저지르는데 믿는 사람이 거기에 쉽게 포섭되면 곤란합니다. 그때는 까탈스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눈치 보고 어려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게 된다면 차라리 미움받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미움의 길을 선택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세상의 악함에 대해서는 날선 검이셨습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고 살해위협 속에 불안한 상황에서 사셔야 했습니다. 그저 평안히 인기를 누리다가 이제 십자가 지러 가볼까하고 뜬금없이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날마다 십자가였기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주님을 공감할 수 있고 주님께서도 공감해주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악함에 뼈저리게 손해 본 적이 있고 당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악한 세상과 악한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좋은 사람이야, 이런 소리 들어서는 곤란합니다. 악한 세상과 악한 사람들로부터 미움 한 번 안 받아보고 내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려다 받는 미움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면류관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 5:10,12)고 하셨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전부 이런 면류관 쓰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결코 망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맺는 말

 

 

 

한 가지 이야기로 마치겠습니다. 장자라는 책을 보면 붕이라는 새가 나오는데 날개 한쪽 날개 길이가 천리가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새입니다. 붕이라는 새가 나를 때도 바람이 있어야 납니다. 조그마한 새는 조그마한 바람만 있어도 납니다만 붕이라는 새는 너무 커서 날아오르려면 큰 태풍이 일어나야 납니다. 큰 태풍이 불어주지 않으면 날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게 어렵게 한 번 날아올라 태풍을 배로 안고 날아가서 저 남쪽바다를 다스리는 새가 됩니다. 참새같은 작은 새는 붕이라는 큰 새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차라리 그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잘라버려! 평생 몇 번 써보지도 못할 그 큰 날개가 무슨 소용있어? 그런 태풍을 맞으면서 뭣하러 그 멀리까지 가려고 그래? 그럽니다. 만약 참새의 말을 듣고 ‘그래, 이런 거추장스러운 날개, 평생 한 번 써볼까말까한 날개 무슨 소용이람? 남쪽 바다까지 날아가본들 뭐하겠어? 저 나무에나 오르고 말지!’하고 붕이 자신의 날개를 잘라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평범한 새가 됩니다. 나무 위에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새로 남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새가 아닙니다. 봉황입니다. 세상의 달콤함 앞에 믿음의 날개를 잘라먹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작은 예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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