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요한복음강해 10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 
본문 요한복음 6:1~15(신약151) 
날짜 2020-01-0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10

성경 : 요한복음 6:1~15(신약 151)

제목 :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

 

 

옛날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에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맹상군이라는 왕족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 집에는 무려 3천 명의 식객이 있었습니다. 식객이란 말 그대로 밥을 얻어먹는 사람인데 식객으로 있던 사람들의 면면이 더 놀랍습니다. 글 읽는 선비나 칼 쓰는 무인, 언변이 좋은 유세가, 정치지망생 등 당시로서는 알아주는 능력자들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문서조작을 잘하는 문서사기범,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진 도둑놈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재주라고 하기도 어려운 재주를 가진 사람이 닭소리 흉내를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식객들은 ‘닭소리 내는 것도 재주라고 남의 집 밥이나 축내면서 붙어사느냐?’며 이 사람을 깔보고 놀렸습니다. 그러나 맹상군은 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알아주는 재주를 지닌 식객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맹상군이 당대 최강대국인 진나라 왕의 부름을 받고 진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맹상군은 여러 명의 식객을 참모로 삼고 진나라에 가게 되는데 그때 닭울음소리 내는 사람도 데리고 갔습니다. ‘물론 저런 사람을 뭣 하러 데리고 가느냐?’며 사람들의 불만이 많았습니다. 진나라 왕은 맹상군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를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했지만 진나라의 기득권자들이 자기 자리 빼앗길까봐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진나라 왕은 저런 인재를 돌려보내면 장차 자기 나라에 큰 위협이 되겠다싶어 맹상군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맹상군은 밤에 야간도주를 하여 함곡관이라는 국경에 도착을 합니다만 성문을 굳게 닫혀있고 국경수비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함곡관문은 새벽닭이 울어야만 열립니다. 그런데 아직 새벽닭이 울려면 시간이 멀었고 뒤에서는 진나라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진퇴양란이지요. 이때 그토록 멸시받던 재주를 가진 바로 그 사람이 나섰습니다. “어르신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하고는 마을로 들어가서 닭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동네닭들이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함곡관 성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맹상군일행은 성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뛰쳐나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작은 재주가 뜻밖에 큰 일을 하였습니다. 성경에도 이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도 당시 유대인들이 쓸모없는 돌처럼 멸시했습니다만 결국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특기가 세상에서 멸시받고 버려진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이고, 세상이 몰라주는 재주와 사람을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2020년 교회표어를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지난 연말에 신년 목회방향을 놓고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몇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정한 표어입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웃과 함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주님은 우리가 가진 재능과 헌신이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귀히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이 주제로 풀어보면서 한 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들을 함께 그려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돌아가서 여기저기 소문을 내자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사람들 수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무슨 도시락을 싸온다든가 하는 것 없이 그냥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어지지요, 해는 저물어 가지요, 마땅히 먹을 것은 없고 사람들은 허기가 집니다.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5, 6절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5,6)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에게 뭔가 답을 구하는 듯이 물어보셨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할지를 미리 다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물어보신 것은 빌립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요한복음에는 상당히 점잖게 되어 있지만 마태나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명령조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달리 말하면 ‘너희가 이 문제를 해결해라!’ 이 말씀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거 문제 있다’고 문제를 지적하거나 이거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은 누구나가 잘 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해결은 하지 않고 그저 해결되기만 막연히 기다리거나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느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해결해 봐라!’그러십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가 타락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그럴 때 주님은 ‘사랑이 없다, 타락했다 하면서 다른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네가 먼저 사랑을 해라!’그러십니다. 우리가 ‘한국교회가 공평과 정의를 잃어버렸어! 큰 일이야!’그럴 때 주님은 ‘공평과 정의를 잃어버렸다 탄식만 하지 말고 네가 먼저 공평을 실천하고 정의를 굳건히 지키면서 살아봐라!’ 그러십니다. 우리가 ‘교회가 전부 자기 배 불리면서 집안잔치 하느라 나눔을 실천하질 않아!’그럴 때 주님은 ‘그래? 그렇게 베풀지 않는 교회들이 많으냐? 그러면 다른 교회 뭐라 하지 말고 너희 교회가 한번 해 봐라!’그러시는 겁니다.

어떤 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아주 많이 합니다. ‘하나님, 굶어죽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십시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기도를 드립니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장롱속에 숨겨둔 돈이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둑이 들었다고 신고를 하려고 하는데 그 집에 어린 아이가 자기가 그럽니다. “아빠, 내가 아빠 기도 응답해줬어! 아빠가 맨날 기도하면서 어려운 사람들 걱정하길래 내가 아빠 돈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다 갖다 냈어!”

우리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실제적으로 뭘 하는 것 없이 기도만 하는 것은 사실 양심에 찔리는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올 해에는 우리의 기도가 몸으로 써내려가는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이것이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면 되겠느냐?’이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니까 제자들이 두 가지로 반응을 합니다. 하나는 빌립의 반응이고 하나는 안드레의 반응입니다. 7~9절을 봅시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7~9)

 

빌립은 이들을 다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빵을 사더라도 모자랄 것이라 말씀을 대답을 합니다. 계산이 굉장히 빠르지요. 그리고 아주 현실적입니다. 빌립의 말대로 이 문제는 아무리 계산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이렇게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을 때 안드레는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를 얻어서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주님, 여기 어떤 아이가 도시락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버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에게 이 작은 도시락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너무 적은 양이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 굳이 예수님께 들고 와서 말씀드리는 건 뭡니까? 안드레는 이런 것이지요. ‘계산기만 두들기고 있으면 뭐하냐? 뭐라도 해 봐야할 것 아니냐? 비록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않겠느냐?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해도 그것이 주님 손에 가면 문제는 달라지지 않겠느냐?’그러니까 빌립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인 반면 안드레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일단 주님께 들밀어 보는 사람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행정을 처리하는 일에는 빌립같은 사람이 적격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데는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발로 먼저 뛰는 사람, 작은 것부터라도 일단 실천으로 옮기는 안드레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문제 다 해결해 놓고 나서 남 도울 것 돕고 베풀 것 베풀려고 들면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코가 석자라도 교회가 감당해야할 일은 하면서 하는 겁니다.

이것이 원래 한국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 교회는 다들 작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습들이 교회에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성미단지였습니다. 성미는 가난한 목회자들의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초대교회에 많은 교회들은 성미를 목회자들뿐 아니라 그 동네에 가난해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용했었습니다. 방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예배당에 성미를 모아두는 쌀단지나 뒤주를 두고 형편이 좀 괜찮은 사람은 갖다 넣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밤에 몰래 와서 가져갑니다. 욕심내서 다 퍼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배곪고 있다는 것을 헤아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갔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가 하면 옷걸어두기 풍습이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설명절이 되면 형편이 좋은 집은 옷을 지어서 설빔을 해서 입는데 가난한 집은 설빔이 어딨습니까? 누더기를 걸치고 설을 맞는 거지요. 형편이 좋은 성도가 자기 가족들 옷 외에 한 두 벌을 더 만들어서 예배당에 걸어둡니다. 그러면 밤에 몰래 와서 옷을 가져가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습입니까? 이것이 한국교회의 미풍양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교회 욕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올해 기도하는 중에 이런 것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부활주일을 앞두고 고난주간을 한 주간 지키는데 매년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해주셨다는 것만 기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거기에서 한걸음 나아가서 우리도 우리 주변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든지 대신 짊어지든지 짊어지는 일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올해 고난주간에는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찾아서 도배를 해준다든지 낡은 전등을 LED전구로 교체해 준다든지, 뭐든지 그 집에 필요한 것을 해주는 기간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목장도 이 일에 동참해 주시는데, 미리부터 의논들을 하십시오. 올 해는 우리 목장에서 이런 뜻있는 일을 좀 해보자. 장애우들 단체에 봉사활동을 간다든지 뭐든지 이웃의 짐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일을 의논해서 일년동안 실천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부터 하시면 됩니다. 처음부터 세상을 뒤집어 놓을 일을 하려 들어서는 힘듭니다. 안드레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작은 가능성으로 주님께 갖다드렸습니다. 그 정도면 됩니다. 거기서부터 세상의 변화는 시작되는 겁니다.

 

 

 

3. 하나님 앞에 서 보았는가

 

 

 

작은 도시락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이 먹고도 열두광주리를 거두어 들이는 이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11~1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3)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1~13)

 

주님은 안드레가 전해드린 도시락을 받고 보잘것없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귀히 받으시고 그것으로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다는 말 ‘유카리스테오’는 감사를 표하다는 말인데 특히 식사할 때 유대인들은 그날 음식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받으시고는 그런 식으로 감사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주님의 감사에 안드레의 믿음도 들어있겠지만 이 어린아이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들어있다고 봅니다. 아이가 자기 먹을 것을 포기하고 내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오천명이 먹고 남을 수있었던 결정적인 헌신이 이 어린아이의 헌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오천명이 먹은 일만 기억하고 한 아이의 헌신은 쉽게 묻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아이를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섬김과 희생과 봉사를 특별한 선물로 여겨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부스러기 하나도 헛으로 낭비하는 일없이 그 헌신과 섬김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열두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열두광주리는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하고 신약에서는 새이스라엘인 하나님나라 공동체 전체를 상징합니다. 즉 이 작은 헌신으로 하나님나라 공동체가 충만히 채워지는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선택해야 합니다. 더 편하고 안락하고 화려한 교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아껴서 이웃을 섬기는 교회로서의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갈 것인지? 어떤 것이 좁은 길인지도 고민해 봐야 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는 전자로 갑니다. 후자로 가는 교회는 드뭅니다. 형편이 못돼서 불편하게 지내지 형편이 되는데 자발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고 이웃을 섬기는 쪽으로 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겠습니까? 깡통교회로 불리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개척 때부터 깡통막사에서 지내며 교회 재정의 60%를 이웃을 위해 쓰던 교회로 유명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탄의 소리가 나오나 봅니다. 결국 대세는 넓은 길입니다. 이런 시대에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는 고민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주님은 알아주시는 길입니다.

나눠주고 섬기기를 좋아하는 교회 치고 가난해지는 교회 없습니다. 움켜쥐려고만 하면 당장은 교회가 부요해지는 것같지만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바람 한 번 불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려갑니다. 하지만 어려워도 힘들어도 베풀고 나눠주고 섬기는 교회는 여름 태풍에도 겨울 모진 눈바람에도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오상고절 겨울 소나무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빛이 바래지 않고 더욱 푸르듯 고난과 역경에도 꺾이지 않고 더욱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영광을 발산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살면 그 자식들은 결코 배곪고 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부디 올 한해 우리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면 저 이웃의 짐을 우리가 함께 질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며 의논하는 소리들이 많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목장도 모여서 그런 의논들이 풍성해지고, 또 짐을 나누어 진 기쁨이 열두광주리 가득 거둬들이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318 사도신경강해 10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요한일서 4:1~3(신약 391)  2022-03-06  전용표 목사 
317 요한복음강해37 더 이상 용꿈을 꾸지 말라 요한복음17:11~17(신약176)  2020-08-23  전용표 목사 
316 요한복음강해31 믿어낸 만큼 살아낸 만큼 요한복음14:1~14(신약171)  2020-07-12  전용표 목사 
315 요한복음강해23/교사주일설교 기왕이면 요한복음11:45~53  2020-05-24  전용표 목사 
314 현재를 사는 부활의 능력 요한복음11:17~27 (신약 164)  2024-03-31  임재형 목사 
313 요한복음강해17 타인과 자신의 고통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 요한복음 9장 1~3절(신약 160)  2020-03-08  전용표 목사 
312 요한복음강해 18 쇠똥구리는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는다 요한복음 9:5~7(신약 161)  2020-03-15  전용표 목사 
311 감정시리즈 3 미안함과 죄책감 요한복음 8:9~11(신약157)  2021-10-31  전용표 목사 
310 요한복음강해 16 인간 자유의 조건 요한복음 8:31~34(신약159)  2020-02-16  전용표 목사 
309 요한복음강해 15 우리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8:1~11(신약157)  2020-02-09  전용표 목사 
308 요한복음강해 14 내 속에 목마름 [1] 요한복음 7:37~39(신약156)  2020-02-02  전용표 목사 
307 요한복음강해 13 이해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을 때 요한복음 7:1~9(신약 154)  2020-01-26  전용표 목사 
306 요한복음강해 12 꺾을 수 없는 날개 요한복음 6:60~71(신약154)  2020-01-19  전용표 목사 
» 요한복음강해 10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 요한복음 6:1~15(신약151)  2020-01-05  전용표 목사 
304 요한복음강해 11 누가 내 발목을 잡는가 요한복음 6:14~21(신약152)  2020-01-12  전용표 목사 
303 요한복음강해 9 저울에 올라서기 요한복음 5:30~47(신약150)  2019-12-29  전용표 목사 
302 요한복음강해 8 익숙함과의 결별하기 요한복음 5:1~16(신약149)  2019-12-22  전용표 목사 
301 요한복음강해7 마르투스 요한복음 4:27~42(신약147)  2019-12-15  전용표 목사 
300 요한복음강해6 내가 왜면한 내 인생인데 요한복음 4:20~29(신약147)  2019-12-08  전용표 목사 
299 요한복음강해5 내가 외면한 내 인생인데 요한복음 4:1~19(신약147)  2019-12-01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