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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9 저울에 올라서기 
본문 요한복음 5:30~47(신약150) 
날짜 2019-12-29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9

성경 : 요한복음 5:30~47(신약 150)

제목 : 저울에 올라서기

 

유대인은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에게 세 가지를 집어넣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그 사람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어 보면 안다는 겁니다. 돈이 없다가 돈이 생기면 사람이 변하지요. 좋게 변하는 경우도 있고 좋지 않게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돈 관계를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지요. 두 번째는 그 사람에게 술을 집어넣어 보면 안다고 합니다. 술이 들어가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괜찮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이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그 사람에게 화 날 일을 집어넣어 보면 된다고 합니다. 화 날 일이 생겼을 때 화를 어떻게 다스리고 푸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평가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친구끼리도 평가하고 집안 사람들이 모여도 누구는 어떤데 누구는 어떻다며 평가를 합니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고 나쁜 평가를 받으면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심하면 살맛이 없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또 보면 사람들의 평가라는 것이 꼭 맞는 것도 아닙니다. 옳은 일을 했는데도 박하게 평가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잘한 것도 없는데 칭찬이 과하게 쏟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딱 그러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만은 안식일에 사람 고쳤다고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5장 18절을 보면 비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아무리 따져봐도 38년 병으로 누워지내던 사람 고쳐서 자신의 인생 마음껏 살도록 만들어준 일인데 무슨 흠을 잡는단 말입니까? 참 억울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정말 바로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칭찬은커녕 오히려 비난과 좋지 못한 평가로 마음고생 했던 일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마음이 참 힘이 들지요.

예수님은 부정적이고 나아가서 공격적이기까지 한 평가를 받으셨을 때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오신 분인데 어떻게 해서 그러실 수 있는가? 저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람의 저울로 자신을 달아봅니다. 사람의 평가로 자신을 가늠한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로 자신을 달아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로 자신을 달아보셨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이 뜻에 맞게 살아왔는가를 냉정하게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지지해 주시는가를 돌아보셨습니다. 오늘은 이것을 살펴보겠는데, 부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며 살아야 하고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할 평가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사람의 평가에 어떠하였는가

 

 

 

먼저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비난하고 비판해도 세례요한 같은 이는 나를 옳다고 한다는 식의 말씀을 하십니다. 33, 34절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3, 34)

 

세례요한은 당대에 선지자로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말로는 ‘개××’에 해당하는 욕인‘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을 정도로 올바른 선생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를 하였고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참된 분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아무리 여러 사람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더라도 세례요한같이 훌륭한 인물이 인정해주고 좋게 평가해주면 거기서 위로를 받고 그걸로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하려 애를 씁니다. “봐라,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이렇다 저렇다 해도 세례요한이 나를 인정해준다, 너희들이 세례요한보다 낫느냐, 그보다 훌륭하냐?”“자 여러분, 보세요.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뭐라 해도 세례요한이 내가 맞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 말을 더 믿으렵니까?”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한다” 즉 ‘나는 나를 비판하는 너희들의 평가에도, 나를 지지해 주는 세례요한의 평가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평가에 묶이는 자가 아니다!’‘쏟아지는 비판과 공격에도 주눅 들지 않고 칭찬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몰라주면 그렇게 서운하고 속상하고 화도 나고 합니다. 반대로 자기를 알아주면 힘이 나고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게 되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부교역자 시절 저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담임목사님 밑에서는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아요. 그러나 저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주는 담임목사님을 만나니까 두배 세배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장수는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꼭 맞아요. 사람이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숙함의 단계는 이런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말이 쏟아지든 좋은 말이 쏟아지든 거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욕을 들을 때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특히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신앙으로 살려고 하다 보면 세속적인 수준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반드시 받습니다. 거기에 크게 흔들려서 밥맛도 없고 시름시름 앓을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뱁새가 황새 못 따라가는 법입니다. 반대로, 내가 한 한 두 가지 잘한 일을 가지고 사람들이 칭찬할 때 쉽게 내가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칭찬을 하더라도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볼 때에 나는 여전히 부족함도 많고 자주 죄된 본성에 이끌려 사는, 성화(聖化)가 덜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닮은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정도 이상으로 서운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또한 나를 알아주고 높여주더라도 정도 이상으로 좋아하지 않고 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입니다. 성숙함이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처음에는 고달프지만 그 열매는 자유입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지 않는 자유가 있습니다.

 

 

 

2. 나의 발자취는 어떠하였는가

 

 

 

그렇다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꽉 틀어막고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사는 것을 자유함이라 해서는 안 되겠지요. 정말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 하려면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엄격한 자기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6)

 

세례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거는 예수님 당신이 행해 오신 일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행해 오신 일들이 당신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말보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살이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이가 좋으면 좋게 말할 것이고 사이가 좋지 않으면 평가도 그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하고 살아온 일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더 정확합니다. 어렸을 적에 먹을 것이 별로 없을 시절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그렇게 맛있는 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행여 아이들이 뱀에 물릴까봐 오디를 따먹으러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디 그게 되나요? 형들 따라 몰래 갔다 옵니다. 그런데 안 들킬 수가 없어요. 오디 먹고 나면 혀와 입 주위에 시뻘겋게 물이 들거든요. 거울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야단맞기 싫어서 오디 안 먹었어라고 하는데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있는데요. 말보다 행한 일이 더 정확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일들이 무엇입니까? 38년 된 병자를 고치셔서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기구한 인생살이로 인해 인생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동네사람들과도 벽을 쌓고 살아가던 여인의 인생을 치유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아무리 비판을 하고 공격을 해도 진리의 길이라면 맞으면서도 걸어가셨습니다. 아무리 조롱받고 억울하게 당하는 길이더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는 길이라면 한방울도 피해가지 않고 다 마셨습니다. 그게 주님이 사신 모습이고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뜻에 맞다는 판단이 섰을 때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비판하고 죽이려 달려들어도 굴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가셨습니다.

사심에 치우치지 않고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을 고민한 끝에 내린 길이라면 담대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 이리저리 편법을 쓰는 인생 살지 않고 정도를 걸어왔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편법을 쓰며 이익을 취한 사람들보다 좀 가난한 형편으로 살게 되었다면 그것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초라하다 느끼지도 마십시오. 그 가난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가 따를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하셨습니다(마5:3). 차마 신앙양심으로 불의에 편승할 수 없어서 거절했더니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단체에 충성하지 않는 자라 욕을 듣는다면 거기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진리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1,12).

주님은 열매로 알리라 하셨지요(마7:20). 우리가 사람을 알아볼 때 지금 하는 말이 아닌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보면 가장 확실합니다. 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기 전에 나 스스로가 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것이 깨달아질 때 사람들이 뭐라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반성하고 회개하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다 여겨지면 아무리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흔들어도 당당하게 흔들림 없이 가면 됩니다.

 

 

 

3. 하나님 앞에 서 보았는가

 

 

 

예수님이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증인으로써 또 하나 내세우는 증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37, 38절을 봅시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7, 38)

 

하나님이 내 옳음을 증언해 주신다! 쉬운 말이기도 하고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내 뜻이 하나님 뜻이라고 단정 짓고 남을 향해 틀렸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할 말인데 말이지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내 옳음을 증언해 주시는 증인이다!’ 이 말은 정말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을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하고 계십니다. 뭐 예수님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 할지 모르는데, 진짜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다 당하셨지만 그것을 이기신 것이지, 저절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옳음을 증언해 주신다고 말씀하실 수 있기까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각고의 노력과 시간이 있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간이 언제냐? 하나님 앞에 조용히 홀로 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으로, 저녁 늦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미명에는 어떤 기도를 드리셨을까? 사마리아수가성 여인 사건에서 보면 그날 가야 할 길과 만날 영혼들을 놓고 기도하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면서 조용히 듣는 시간을 가지면 오늘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모임이 무엇인지 감이 옵니다. 또 온갖 마귀의 유혹을 이기도록 기도하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도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습관을 자꾸 길러야 합니다. 특히 그날 아침에 묵상한 말씀을 놓고 기도를 하면 하루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령 아침에 말씀을 보는데 남의 약점을 누설하지 말라는 말씀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놓고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행여 분위기에 끌려 남의 약점을 마치 고급정보인양 말하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날 그런 유혹될 일이 꼭 한 번 이상은 찾아오는데, 아침에 그런 말씀을 묵상하고 또 기도한 것이 있으니 먼저는 이것이 유혹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고 다음으로는 이길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저녁에는 어떤 기도를 드리셨을까?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행하신 일을 돌아보는 기도를 하셨다고 봅니다. 과연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을 한 것이 맞는가? 거기에 내 영광과 내 욕심은 없었는가? 오병이어 사건 이후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풍랑이 일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풍랑이라는 것이 바다에만 인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도 일었던 것입니다. 인기를 뒤로 한 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그 인기를 발판삼아 높은 자리를 차지해 보려는 마음, 그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마음의 풍랑이고 그 마음의 풍랑이 결국 발목을 잡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이 없으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거든요. 사람들의 인기를 이용해 뭘 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셨습니다(요2:23~25).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나를 볼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자 저울입니다. 기도하실 때 달라는 기도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런 기도를 많이 드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 평가해 주십니다. 짚어주실 것 짚어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 위로해 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은 일으켜 주십니다.

최상의 저울은 하나님 저울입니다. 어떤 옷집에는 일부러 날씬하게 보이는 거울을 놔뒀다고 합니다. 옷을 많이 팔려고요. 그런 거울은 기분은 좋겠지요. 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저울은 오차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만이 오차가 없습니다.

 

 

 

맺는 말

 

 

하나님 앞에 많이 서십시오. 거기에 자유가 있고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고 담대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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