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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8 익숙함과의 결별하기 
본문 요한복음 5:1~16(신약149) 
날짜 2019-12-22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8

성경 : 요한복음 5:1~16(신약 149)

제목 : 익숙함과의 결별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학기가 되면 설렘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더 느낍니다. 반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아이들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바뀝니다. 또 어떤 선생님을 만날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긴장도 많이 됩니다. 학년이 바뀌는 것도 그런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학교가 바뀌는 아이들은 훨씬 더하겠지요. 지금까지 익숙했던 환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환경이 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어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하는 파트너가 바뀌어도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몇 년 같이 일하다 보면 서로 익숙해져서 눈빛만 봐도 알아차리고 일이 척척 되는데, 새로운 파트너는 작은 것부터 새로 맞춰야 하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익숙하게 쓰던 물건이 낡아서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면 좋은 것도 있지만 거기도 불편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그렇고 물건이 바뀌어도 그렇고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에는 언제나 불편함과 얼마간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과 불안함, 두려움은 사실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대가와 같은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싫다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더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파트너와 새롭게 맞춰가는 과정이 불편하다고 포기하면 나의 인간관계의 폭이나 인격의 폭은 항상 제자리 걸음입니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숙함과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렵지요? 불편합니다, 불안과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수업료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베데스다 연못 곁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전설에 인생을 걸고

 

 

오늘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편에 ‘양문’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우리나라 소시장처럼 양을 사고파는 양시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거길 가느라 양을 몰고 들락날락하다보니 붙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문 옆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과 행각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그 행각에는 앞 못 보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각색 병자나 장애인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누워있었습니다. 3~4절을 봅시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3, 4)

 

베데스다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휘 젖는다는 겁니다. 그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아마 어떤 자연현상으로 인해 연못에 물결이 일어나곤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천사가 내려와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런저런 병나은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어느 정도 각색도 되고 해서 ‘천사가 내려와 저어서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하나의 설(說)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놓은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걸 믿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니 전설은 더 힘을 받게 되는 거고.... 그런 식으로 된 겁니다.

가만히 보면 이 베데스다 연못이 꼭 우리 세상 같습니다. 베데스다 주위에 모여 있던 절박한 사람들이 실은 우리들입니다. 그들만 아니라 우리도 실은 절박합니다.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것 자체가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돈이 절박하든지 인간관계가 절박하든지, 건강이 절박하든지, 상황이 절박하든지 항상 인생이라는 것은 절박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제 기억으로 경제가 어렵다는 뉴스가 없던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사람들이나 우리나 다 절박한 겁니다. 거기에 있던 절박한 사람들이 주로 맹인, 저는 자들, 혈기 마른 사람들이었는데 이 또한 우리들입니다. 뭔가 길을 찾아야겠고, 돌파구를 찾아야겠는데,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문제는 잘 보이는데 막상 내 문제가 되면 잘 안 보여요. 맹인 되는 겁니다. 육신의 맹인만 맹인입니까? 길을 찾지 못하면 그것도 맹인인 거지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뻔히 답은 나와 있는데 마음이 허락지 않아서 그렇게 못합니다. 게을러서도 못합니다. 그게 저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 육신이 절어야 저는 겁니까? 걸어가야 할 인생길이 있는데 그 길로 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이 다 저는 것이지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은 아는데 그대로 사는 것이 잘 안 돼요. 하나님 섬기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아는데 아는 대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다 저는 것입니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의욕이 떨어져서 뭘 하고싶은 것이 없어요. 뭘 해도 의미를 모르겠어요. 이게 뭡니까? 혈기 마른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지쳐서 삽니다. 청년들은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가는 새힘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우리나라는 어른이고 청년이고 할 것 없이 다들 활력이 별로 없어요. 혈기가 마른 겁니다. 그러니 우리 사는 이곳이 꼭 베데스다요 우리가 맹인, 저는 자, 혈기마른 자와 다를 바 없다 이겁니다. 이게 우리 이야기입니다.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낫는다고 그래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올라갑니다. 내가 이기면 저쪽은 지는 겁니다. 한쪽에서 만세를 부르면 한쪽에서는 피눈물 흘리는 겁니다. 세상은 줄다리기입니다.

신앙이 뭡니까? 우리 세상이 꼭 베데스다와 같고 우리도 베데스다 행각에 모여 있던 맹인,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이에요. 이걸 아는 것이 왜 중요하냐? 그래야 세상을 열심히 살지만 세상에 깊이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항상 올라서려면 치졸하고 더러운 세상을 거쳐야 됩니다. 차라리 이등이나 삼등하고 신앙 지키는 편이 낫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세상의 본 모습이 뭔지, 인생의 본 모습이 뭔지 그걸 알기에 깊이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칠 때는 그칠 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할 때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신앙입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절박해질수록 남의 말에 귀가 솔깃합니다. 돈이 절박한 사람에게는 이거 하면 돈 된다더라, 이런 말에 귀가 솔깃합니다. 뭔가 인생의 길을 찾는 사람은 ‘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이런 얼토당토 않은 말에도 마음이 끌리고요, 어쨌든 확인되지 않은 처세술, 성공방법, 인생철학, 이상한 신앙, 이런 것에 붙들려서 살아갑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입니다. 5, 6절 봅시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 6)

 

38년 된 병자, 참 오랫동안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적어도 베데스다라는 세상에서는 가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연못에 1등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사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쳐다보십니다.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고쳐주시기 전에 한 가지를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찌 보면 불필요한 질문같습니다. 아니 38년 병으로 고생한 사람이 낫고 싶은 것은 당연할텐데 굳이 물어보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고쳐주시면 되지. 그런데 이유가 있어요. 38년 병으로 고생했기 때문에 그만큼 낫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을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덜 간절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여기에 익숙한 겁니다. 매일 같이 베데스다 연못 옆에 누워있지만 이미 이게 생활이 되어서 여기에 있는 것이지 꼭 나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익숙해진다는 것이 좋고도 무서운 겁니다. 군생활을 할 때 한참 전쟁 난다고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사흘이 멀다고 전투태세 비상이 걸립니다. 부대에 있는 모든 짐을 다 싸서 진리로 이동해서 일주일 있다 들어오고 이주일 있다 들어오곤 했습니다. 진지에서 생활하는 것은 정말 지옥같이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물이 부족해서 수통 하나 가지고 머리 감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버텨야 했고 식판 설거지를 못해서 대충 휴지로 닦고 거기다가 또 밥을 받아먹기를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전쟁상황과 똑같이 지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훈련이 내일 끝나고 부대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좋은 것보다는 불안한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거기에 적응하니까 그 지옥같은 생활에 그냥 머물러 있고 싶은 겁니다. 익숙함이 주는 무서움입니다. 익숙함이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 거기에 익어서 안주하면 발전을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새로운 일에 도전도 해야하고 새로운 환경을 찾아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야 발전을 하거든요. 그러려면 익숙함과 결별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나 우리가 신앙의 진보를 이루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더욱 그렇습니다. 쉽게 나약함과 게으름에 빠지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평생 인생이 제자리 걸음입니다. 뭔가 부담스러운 일이나 책임을 져야 할 상황 앞에서 회피하고 도망치는 습관에 익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에 익숙하면 평생 잠수 타는 인생을 삽니다. 50대 60대 이제 책임을 질 줄 아는 자리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때에도 여전히 책임지는 일을 못 해냅니다. 그러면 그릇이 되기 어렵습니다. 또 실패에 익숙한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집은 뭘 해도 이렇게 되고 말아! 어쩔 수 없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났는가 봐!’ 뭐 이런 식의 운명론에 익숙한 경우입니다. 그런 운명론에 빠져 있으면 평생 패배주의자로 살게 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이미 습관처럼 익숙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신앙생활 해도 신앙이 주는 깊은 샘물과 같은 맛을 보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나는 너를 고칠 능력이 있다만 너는 네가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너는 언제까지 인생을 그렇게만 살거냐? 내가 볼 때 너는 더 나아지고 더 성숙해질 가능성이 있다만 네 스스로가 너를 발목 잡고 있구나! 이제는 더 나이들기 전에 그 익숙함에서 좀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쳐야지 않겠느냐?’ 정곡을 찌르며 물어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시는 갈등제조기이십니다.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눅13:49). 때로 사람을 통해 어떤 경험을 통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음성을 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서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 나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지겹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하는가?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사는 것처럼 열정을 쏟아붓고 살아봐야겠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하고 살아야겠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 의미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 같은 신앙생활 한 번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어오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나를 불편하게 하시는 이 물음이 나를 한 단계 도약하게 하시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피하지 마시고 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경쟁을 초월하는 주님의 은혜

 

 

예수님의 물음에 38년 된 병자는 지극히 베데스다의 가치관에 길들여진 대답을 합니다.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7)

 

‘남들보다 앞서서 1등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누군가가 도와주면 내가 1등 할 수 있는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군요, 당신이 내가 남들보다 더 앞서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지극히 세상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많아요. 남들보다 앞서게 해 달라, 머리는 돼도 꼬리는 되지 말게 해 달라! 그러면 사회에서 꼬리 역할은 누가 합니까? 꼬리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리고 주님 보시기에 머리 꼬리가 과연 있겠습니까? 청소부가 머리라고 자부하는 저 정치인들보다 주님 보시기에는 더 머리가 아닐까요? 어쨌든 세상의 방법은 남보다 앞서야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지금 주님을 향해 그런 도움을 구하면서 응답을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하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8, 9)

 

‘그래, 저 사람보다 더 앞서 갈찌어다!’ 그러지 않으세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십니다. 남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어쨌든 빨리 움직여서 차지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경쟁을 초월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경쟁이 필요 없는 은혜를 주십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빼앗겼어도 그게 진짜 빼앗긴 것인지 지금은 모릅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채우시면 누가 더 차지하고 덜 차지하고 와는 상관없이 채워지는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대들은 모르겠지만 저부터 제 윗세대들은 우리나라에서 축구 제일 잘 하는 사람, 그러면 아마 차범근을 꼽을 겁니다. 차범근은 당시 세계 최고리그인 독일프로축구리그에서 10여년 동안 깨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던 외국인 선수였습니다. 외국인선수 중에는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넣은 골 중에는 페널티킥으로 넣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차범근 정도 되면 내가 페널티킥을 찰게 하면 안 된다 할 사람이 없을 건데도 차범근은 페널티킥을 한 번도 차지 않았습니다. 축구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서로 차려고 합니다. 쉽게 골을 넣고 기록을 쌓을 수 있는 길이니까요. 그런데 차범근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차범근선수를 귀히 보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니까 남에게 페널티킬을 양보하고서도 기록보유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이런 것입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는 식으로 은혜가 아닙니다.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때로는 죄짓기 싫어서 양보하고 빼앗겨줘도, 모든 경쟁을 초월하시는 방법으로 은혜를 주십니다. 채워주십니다.

 

 

맺는 말

 

 

한 해 동안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오신 여러분의 삶을 응원합니다. 때로 익숙함과 결별하는 과감한 도전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거기에 순종하며 걸어가고자 하는 여러분에게 경쟁을 초월하는 은혜로 채워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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