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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7 마르투스

2019.12.23 15:38

배재우전도사 조회 수:69

제목 요한복음강해7 마르투스 
본문 요한복음 4:27~42(신약147) 
날짜 2019-12-1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7

성경 : 요한복음 4:27~42(신약 147)

제목 : 마르투스

 

 

대구 팔공산의 원래 이름은 공산(公山)입니다. 그러던 것이 팔공산(八公山)이 된 데에는 기가 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신라가 망해갈 즈음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되어 영락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왕건이 오른팔처럼 여기는 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에게 자기가 왕의 갑옷을 입고 변장하여 싸울테니 그동안 왕은 피신하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왕건은 하는 수없이 자기 갑옷을 신숭겸에게 주게 되었고 신숭겸이 자신의 갑옷을 대신 입고 싸우는 동안 포위망을 뚫고 나가 살았습니다. 신숭겸은 왕건의 갑옷을 입고 싸우다가 일곱 명의 장수와 함께 장렬히 전사를 합니다. 여덟 명의 장수가 죽은 산이라 해서 그때부터는 팔공산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대개 세상사람들이 영웅이라 부르는 경우는 넓은 땅을 정복한 사람들인데, 달리 보면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숭겸같이 남을 대신해 죽는 보기 드문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순교자(殉敎者)’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신앙인은 영웅이 되기도 어렵지만 굳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순교자가 되는 것도 어렵고 또 요즘은 순교자가 될 기회도 없다시피 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순교자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순교자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순교자라는 말을 영어로는 ‘마터 (Martyr)’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 ‘마르투스’에서 왔습니다. 신약성경에 200번 이상이나 나오는 아주 중요한 핵심단어입니다. 마르투스라는 말은 원래 순교자가 아닙니다.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증인 말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이 어째서 순교자라는 뜻의 말로 바뀌었느냐? 예수의 증인이 되었던 사람들은 거의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옛날에는 제대로 예수의 증인이 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증인이라는 말에 순교라는 의미가 덧붙여지다가 결국에는 증인이란 말이 순교자라는 말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다 순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고요. 그러나 그 어느 시대보다 신앙생활에서 순교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할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시대에 진정으로 예수의 증인으로 살려는 성도, 즉 ‘마르투스 성도’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여인이 예수의 증인, 마르투스가 된 사건이 나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입니다.

 

 

1. 변화된 뭔가가 있어야 한다

 

 

생수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이 자기 인생사를 알아맞히자 이야기 주제를 예배로 돌렸었지요. 예배에 관한 질문도 실은 여인의 숨은 애환이 들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여인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합니다. ‘당신의 말씀이 참 바른 가르침 같습니다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봐야지요. 저는 그 분이 오셔서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를 고대하며 살고 있습니다’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만 그래도 더 확실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싶다는 겁니다. 자기하고 대화하는 분이 그리스도인 줄 모르고 말이지요. 여기서 알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어요. 행실이 형편없다고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는 여인인데 사실은 그 속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진흙속에서 피는 연꽃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여러분, 우리가 남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다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정확히 판단하고 평가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여인에게 그러지요.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네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 메시아다! 그러자 여인은 깜짝 놀라서 물동이고 뭐고 다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갑니다. 28~30절을 봅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28~30)

 

‘동네 사람들, 와 보세요.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다 알아맞힌 분을 만났습니다. 내 인생살이를 다 알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이야 말로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참 놀라운 일입니다. 오랫동안 담을 쌓고 살던 사람들이고 또 그중에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인데 거기에 달려가서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 덮어두고 살던 자기 인생살이까지 본인 스스로 언급하면서 말을 합니다. 사람이 치유가 되지 않으면 아픈 과거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그 시간이 길지 않았어도 이 여인 마음에 많은 치유가 일어난 겁니다. 주님이 알아주시니까, 주님이 품어주시니까 치유가 된 겁니다. 우리가 결국 치유 받아야 할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도움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만 나를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내가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께 치유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속에 주님을 자꾸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보면서 그 앞에 떨며 서 있는 것이 나병환자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병환자 몸에 손을 얹어서 ‘나도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마음에 그리면서 그분이 곧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추상같이 꾸짖으시는 주님이 곧 내 믿음없음을 꾸짖으시는 것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느껴질 때 작은 믿음이 자라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야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 생깁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실을 뽑아냅니다.

가장 강력한 전도지는 역시나 ‘나의 변화된 삶’입니다.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오는 동네사람들을 보십시오. 뭐 평소에 존경할만한 인물의 말을 듣고 온 것이 아닙니다. 동네에서 따돌림받던 여인의 말을 듣고 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 사람이 바뀌었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되느냐?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뭔가 있구나!’이렇게 생각하도록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으면 예수 잘 믿는 것이고 바르게 믿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려면 이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2. 마르투스 인생이라야 한다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마을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었지요.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시기를 권하자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시며 빵으로만 사는 인생이 아닌 사명으로 사는 인생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명으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이 보내신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을 추수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34~3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4,35)

 

사람을 추수하는 일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36~38절을 보면 사람을 추수하는 일에 어떤 사람은 뿌리는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거두는 역할을 한다고 하십니다. 별로 정성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교회 가자는 말에 누군가가 선뜻 따라 나서는 경우도 있고, 많은 정성을 들여서 기도하고 전도했던 사람이 정작 신앙생활 시작할 때는 다른 교회로 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라면 기분이 좋겠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위해 많은 기도와 정성을 쏟아놓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수고의 열매를 나를 통해 거두게 하시는 것임을 알고 겸손해야겠습니다. 두 번째 경우라면 아쉽고 속도 상하겠지요. 언젠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쉬는 사람을 한 두어달 정도 만나서 가정상담도 하고 문제상담도 하면서 상담치유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목사님, 아무래도 가까운 교회에 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쩌겠습니까? 당신은 내가 이토록 공을 들였으니 우리교회 와야된다 하겠습니까? 그냥 그러라고 했지요. 어디든 하나님 계시니 다시는 방학하지 마시고 가까운 곳에서 신앙생활 잘 하십시오! 그랬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쓰리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역할이 뿌리는 역할이었음을 받아들이고 그 영혼이 주님께로 발걸음을 돌렸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입으로 먹는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만 사는 인생을 성경은 육신, 즉 바사르라고 합니다. ‘고깃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참 적나라합니다. 아무리 잘 나고 성공했어도 하나님 보실 때에는 저 고깃집에 걸려 있는 벌건 고깃덩어리와 다를 바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야 그게 참다운 인생이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인생이라야 합니다. 영혼을 건져내는 사명을 감당하는 ‘마르투스 인생’이라야 합니다.

 

 

 

3.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삶이다

 

 

수가성 여인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그저 신통한 능력이 있는 사람 정도로 인정하였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래도 이런 정도의 믿음이 더 큰 믿음을 가지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몰려와서 예수님을 자기네 동네로 모셔들였습니다. 예수님이 군대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자기네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요구했던 거라사 지방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됩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수가성여인에게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라고 합니다. 41~42절을 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41,42)

 

자기들이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신통한 능력을 행하는 분으로 믿고는 그분 만나러 나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과 이틀 동안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아보니 그분은 신통한 능력을 행하는 분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온 세상의 구주임을 깨달았다 이겁니다. 그리고 믿었다 이겁니다.

신앙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발목의 단계, 무릎의 단계, 허리의 단계, 잠기는 단계를 말씀하고 요한일서 2장에서는 아이의 단계, 청년의 단계, 아비의 단계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단계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대개 신앙이 어렸을 적에는 예수님을 뭘 주시는 분으로만 알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믿어서는 진정한 마르투스, 증인의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본받아 살아야할 분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다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특정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를 삼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를 뭐라고 부르셨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 부르셨습니다. 함께 길을 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겁니다. 그게 제자의 삶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 따르는 목적이 떡이었습니다. 어제 얻어 먹고 오늘 또 떡을 달라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게 무리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떡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자체가 목적입니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존경이 아니라 조롱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 닮은 사람은 적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성자라고 존경받는 인도의 간디가 영국에 유학 가서 공부를 할 때 간디를 아는 지인들이 간디같이 훌륭한 인격자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를 다니면 복음화의 정말 좋은 예가 될 것이라 여겨 어쨌든 간디를 그리스도인 되도록 애를 썼었습니다. 그때 간디가 자기는 그리스도를 정말로 믿고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 성경을 보면 예수 같은 분이 없는데 눈을 씻고 봐도 그리스도인 중에 예수처럼 사는 사람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기독교국가라고 하는 영국은 간디의 조국인 인도를 식민지 삼아서 인도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니 간디로서는 그런 교회를 다닐 하등의 이유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주님께 달라 달라 하던 신앙에서 제가 주님처럼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신앙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우리교회가 사는 길이고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쓰임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맺는 말

 

 

오늘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면서 애타게 찾으시는 사람은 예수의 옷을 대신 입고 장렬히 순교적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명품 옷을 찾을 게 아니라 예수의 옷을 찾아야 합니다. 올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예수로 옷입고 살았는가? 물어오시는 주님의 물음에 답하시는 한 주간 되시길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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