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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6 내가 왜면한 내 인생인데 
본문 요한복음 4:20~29(신약147) 
날짜 2019-12-0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6

성경 : 요한복음 4:20~29(신약 146)

제목 : 우상인가 예배인가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자신의 경쟁자인 유비의 이동생 관우를 상당히 좋아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그 둘이 처음 만났을 때는 조조와 유비와 관우 장비는 이름없는 측에 속하였는데, 유비 옆에 서 있는 관우를 보고 조조는 한 눈에 반하다시피 합니다. 그 때 관우는 일개 마궁수에 지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직책이었는데, 사람의 품채나 됨됨이가 풍겨나오는 것이 비범하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것을 일컬어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합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송곳이라는 뜻으로 주머니에 송곳이 들어있으면 옷을 뚫고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좋은 신앙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신앙이 빛이 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또다른 신앙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이 진정한 예배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성도들이 모두 주님께 낭중지추와 같은 존재들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1. 죄인의 예배이기에 받으신다

 

 

오늘 처음 본 웬 낯선 남자가 내 과거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여인은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겁이 났겠지요. 그래서이지 수가성 여인은 뜬금없이 예배에 관해서 질문을 하면서 화제를 돌립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0)

 

아마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유대인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살이를 속속들이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화제를 돌리느라 엉겁결에 예배에 관해 물은 겁니다. 풀어보면 이런 질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줄곧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그럽디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서 드리는 예배라야 받으시는 겁니까?’엉겁결에 뱉은 말 중에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이 여자의 질문이 그렇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기구한 인생살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오고 있지만 안식일이 되면 꼬박꼬박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성전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자신의 살아온 인생살이를 회개하면서 드리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예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주장이 예루살렘 성전 말고 다른 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드린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 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고 염려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차에 선지자 같은 분을 만나니 그걸 물어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여인은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보다 도덕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살면서 행실이 좋지 못하다며 쉽게 이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 여인이 하나님보시기에는 더 진실한 예배, 더 자신을 회개하며 드리는 예배를 드린 여인일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의로움을 한껏 뽐내면서 자랑하듯 기도했던 바리새인보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만 하다 돌아간 세리를 보고 주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내려갔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의롭게 살다 온 사람이 스스로 떳떳하게 여기면서 예배를 자신의 의로움으로 가득 채워버린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흠 많은 예배가 되고 맙니다. 자신의 의로움에 도취 된 예배는 자신을 예배하는 우상이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반대로 의롭지 못하게 살다 온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죄됨에 아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 없는 예배가 됩니다. 참 신기한 역설입니다. 지금 이 여인이 뜬금없이 예배에 관해 던지는 질문을 주님께서 아주 자상하게 받아주시는 장면을 보십시오. 마치 세리처럼 남몰래 가슴을 쥐어뜯으며 드려왔을 여인의 회개의 예배를 실은 주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내 속사정을 다른 사람이 다 알 리 없습니다.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나오기 부끄러울 정도로 망가진 모습으로 살아서 양심의 찔림을 이기고 겨우겨우 나와서 앉아 있는 건지, 사람은 알지 못해도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아십니다. 연약하여 넘어진 모습으로 나왔을지라도 그 중심에 나의 죄됨을 깊이 아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2. 예배의 본질은 화려함이 아니라 내용이다

 

 

여인이 뜬금없이 내뱉은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을 하시는데 먼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2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1)

 

이 산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성전도,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어떤 장소에서 드리면 하나님이 더 잘 받으시고 어떤 장소에서 드리면 덜 받으시는 것 없다! 예배는 장소가 결정하는 것 아니다, 이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서 이방신앙과 혼합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보고 유대인들은 짝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의 예루살렘성전은 순결했느냐? 장사하고 돈 바꾸는 상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온갖 탐욕이 가득했고 권력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졌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세웠다면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세웠을 뿐, 본질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저 장소보다는 이 장소에서 예배드려야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에 여행을 가면 주로 중세시대에 세워진 웅장한 대성당들을 둘러봅니다. 보면 압도당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장소가 주는 뭔가모를 감동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성당들이 대부분 권력자들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서 건축된 것들이며, 또 그 성당이 갖고 있는 권세와 재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피흘리는 권력투쟁이 이루어졌으며 독신으로 살기로 서약한 주교들과 추기경들이 몰래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일이 되면 거기에서 최고 수준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화려한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예배가 차라리 우상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그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라는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배를 자꾸 인간적인 것으로 채우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보다는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로, 내 삶을 드리기보다는 화려한 영상과 문화와 볼거리로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보다는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듭니다. 화려함과 예배의 영성은 반대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 세미나 참석 차 서울의 유수한 교회들을 가보았습니다. 일단 찬양이 좋습니다. 큰 교회들은 기타연주자 드럼연주자 앞에서 노래 부르는 싱어들 모두를 유급으로 씁니다. 최고수준의 음향시설을 가지고 그런 전문가들이 연주를 하면서 찬양을 인도하는데 은혜가 안 될 수 있습니까? 항상 부르던 찬양도 거기서 부르니까 더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요. 우리가 흔히 은혜가 된다고 하는데, 실은 은혜가 아니라 감정적인 감동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그러나 그런 집회가 끝나고 돌아가서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느냐, 바뀌었으면 은혜입니다. 거기서 실컷 감동은 받았으나 돌아가서 매나 마찬가지이면 그건 감정적인 감동이지 은혜는 아닌 것이지요. 오래전 성도들과 의성에 있는 한 시골교회를 위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는 아직 주일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여전도사님이 시골 어르신들 한 스무 분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피아노 반주도 없이 그저 목소리와 박수만으로 부르는 찬송이었고 예배였습니다만 위로하러 갔던 우리들이 죄다 위로받고 왔습니다.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은 대부분이 교회를 다 다닙니다. 그리고 형제처럼들 지냅니다. 그들의 신앙은 교회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신앙이었습니다. 예배가 곧 생활이요 생활이 곧 예배였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입니다. 여러분 겉모습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장소도 화려하고 세련된 요소도 아닙니다. 내용입니다.

 

 

3.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삶이다

 

 

23, 24절에서 주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23, 24절 읽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3, 24)

 

아버지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지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은 ‘프뉴마’로서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는 ‘알레데이아’로서 거짓이 없는 참된 삶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산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음행이나 더러운 것 우상숭배,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고 분열하는 것,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같은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것이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알레데이아, 참되다, 진실되다, 거짓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속여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손해 보더라도 진실한 것입니다. 정직한 땀의 열매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참되고 정의로운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직장생활하고 사회생활 하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오거나 비록 이렇게 온전히 살지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살려고 애쓰다가 와서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몸으로 드리는 영적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한결같은 가르침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고 하셨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으로 보혜사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14:17).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대로 살도록 도와주시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삶이라야 합니다.

가끔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 예배를 받으시느냐 안 받으시느냐는 일주일 간 어떻게 살았느냐에서 대부분 판가름 납니다. 한국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도 없습니다만 문제는 주일예배를 주일 낮에 드리는 1시간짜리 예배로만 생각하고 그 예배에만 목숨 걸면 만사형통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점입니다. 이런 것을 ‘예배지상주의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타락한 인간은 거룩한 것을 우상으로 만드는 특출한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벌받지 않기 위해 드리는 것도 아니고 지은 죄에 대한 값싼 면죄부를 받기 위해 드리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살든 상관없는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이고 돌아오는 일주일을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어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카터를 아실 겁니다. 정치인 중에 기독교인이 많지만 이름만 기독교인이 많은데 이 분은 진짜 기독교인입니다. 대통령 선거유세 기간에도 자기가 주일학교교사로 섬기는 시골이 조그마한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일을 중단한 적이 없고, 은퇴 후 가난한 사람들 집 지어주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을 하면서도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고향교회 주일학교에 가서 교사로 봉사를 합니다. 이 분이 흔히 대통령재임기간에는 실패한 대통령, 퇴임 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재임기간에는 경제도 못 한다, 국제정치 못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재임기간 형편없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를 진짜 신앙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경제? 가난하고 약자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펴니까 성장률이 떨어질 수밖에요. 국제정치? 말 안 듣는 나라 폭격하고 본떼를 보여주던 시절인데 전쟁하지 않습니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94년도 우리나라 전쟁 나기 직전에도 이 분이 중재에 나서서 북한에 김일성 만나고 해서 전쟁을 막았잖아요? 그러니 전쟁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버는 미국의 군수회사들이 좋아할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 경제 못 한다, 국제정치 못한다, 미국을 약한 나라로 만들었다, 온갖 비판을 쏟아낸 겁니다. 그러나 이 분이야말로 타협하지 않고 성경말씀대로 정치를 한 분입니다. 그 시대가 이런 신앙의 인물을 담아내기에 역부족했던 것입니다. 온갖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가면서 성경의 가치대로 정치를 해 낸 그분의 재임기간이 실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예배였습니다. 우리도 내가 처한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예배를 주님이 받으시고는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생명의 풍성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 뱉었던 여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토록 깊은 예배의 진리를 설파해 주셨습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양약으로 받아 소화를 잘 시켜서 여러분의 심령을 윤택케 하고 여러분의 삶을 주님의 생명으로 풍성케 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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