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요한복음강해5 내가 외면한 내 인생인데 
본문 요한복음 4:1~19(신약147) 
날짜 2019-12-0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5

성경 : 요한복음 4:1~19(신약 146)

제목 : 내가 외면한 내 인생인데

 

 

이삿짐센터나 포장이사라는 것이 없던 시절, 교인 중 누군가 이사를 하게 되면 교회 학생들과 청년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이삿짐을 날라주곤 했습니다. 수고비는 점심 때 자장면 한 그릇이 전부였지만 그때는 계산적이지 않고 그저 서로 돕는 정을 나누던 분위기였습니다. 이삿짐을 나를 때 작은 짐부터 나르면 힘이 두 배로 들고 일에 진척이 없습니다. 일단 장롱이나 냉장고, 피아노가 있으면 피아노 같은 큰 물건부터 날라야 합니다. 큰 짐부터 옮기고 나면 작은 짐은 수월합니다. 한 번은 학교 선배가 결혼을 해서 신혼집으로 짐을 날라주러 갔는데 일꾼이 그 형님과 저 단 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수가 쓰던 피아노를 둘이서 옮겨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설픈 솜씨로 피아노를 분해해서 옮기는데 몸통은 둘이서 옮기기에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억지로 억지로 그 무거운 피아노를 옮기고 나니까 다른 짐은 짐같이 느껴지지도 않더군요. 큰 짐부터 날라야 수월합니다. 큰 짐부터 옮겨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작은 짐 먼저 옮겨놓으면 큰 물건 옮기는데 방해거리만 됩니다. 큰 물건부터 옮겨야 자리가 잡히고 작은 짐들도 제자리를 쉽게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큰일을 마주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다 보면 큰일을 자꾸 뒷전으로 미루고 자잘부레 한 일들만 붙들고 씨름할 때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외면하고 회피했던 일이 발목을 잡게 되고 삶이 엉망으로 꼬여버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1. 내 인생을 향한 주님의 의무감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고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님은 유대 지역에 더 이상 계시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는 수없이 북쪽 갈릴리지역으로 가시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꺼리는 길인 사마리아길로 가셨습니다. 대개 유대인들이 남쪽 유대에서 북쪽 갈릴리로 갈 때 가까운 사마리아 길을 놔두고 요단강을 건너서 멀리 돌아갑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태어나시기 백여 년 전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치열하게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심산에 세워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다가 사람 인골을 뿌려서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렸고 또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유대인 여행객들을 공격해서 죽이는 일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민족은 아예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지역으로 지나가기를 꺼리게 되었고 요단강을 건너서 멀리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이하게도 사마리아길로 들어서신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3, 4절을 봅시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3,4)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했는데 여기에 쓰인 말이 헬라어로는 ‘데이’이고 영어로는 ‘must’인데 강한 의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른 길도 있지만 어떤 강한 의무감을 느끼셔서 의도적으로 이 길을 고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어떤 의무감이냐? 동네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스스로도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던 한 버려진 여인을 꼭 만나야겠다는 의무감입니다. 오래 전 한 번 나눈 적이 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신라시대 때 경주 남천에 신주라는 사람이 하루는 물가에서 수달 한 마리를 잡아서 살을 발라 삶아 먹고는 뼈를 뒤뜰에다 던져놨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뼈가 사라졌습니다. 핏자국이 있어 따라가 보니 뼈가 제 굴로 가서 어린 새끼 다섯 마리를 품에 안고 있더랍니다. 어미는 죽어서도 새끼를 못 잊는 법입니다. 뼈가 되어서도 새끼를 품는 것이 어미의 사랑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누가 지워주지 않아도 스스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의무감을 지는 것이 어미의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심에 있어 우리를 이 땅에 내신 분으로서의 사랑이 있으신 것입니다. 누가 지워주지 않은 의무감을 스스로 지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2. 외로운 존재다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은 마을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가고 예수님은 동구 밖에 있는 우물 곁에 쉬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는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6, 7절을 봅시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6,7)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요한은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온 시간이 여섯 시쯤 되었다고 아주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힌트라고 보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6시부터 시간을 세기 시작하니까 여섯 시면 낮 열두 시입니다. 이 시간에는 해가 뜨거워서 바깥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대개 물 길으러 갈 때는 동네 여인들과 함께 서늘할 때 갑니다만 이 여인은 땡볕에 혼자 물을 길으러 온 겁니다. 그럼 뭐 알만하지 않습니까? 동네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지요. 사람들과 만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는 생활 습관이 생긴 겁니다. 당연히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왠 낯선 남자가 있어요. 그리고 물을 달라 합니다. 그냥 주면 될 건데 톡 쏘는 말로 거절을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물론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여행자가 목이 말라 물 좀 달라 하면 한 바가지 주면 어떻습니까? 까칠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다 ‘방어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에요. 자신의 삶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게이트를 치는 것이지요. 사람마다 이런 것이 다 있습니다. 방어기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외롭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다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사람들과 시끌벅적 섞여 어울려도 역시나 혼자입니다. 아담 이후 죄성(罪性)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표면적인 외로움은 친구 만나서 수다 떨고 맛있는 것 먹고, 취미활동이나 동호회 활동 같은 것 하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외로움, 본질적인 외로움은 그런 것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외롭다는 것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빠져 살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아프거나 큰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그때 뼈져리게 느껴집니다. ‘아, 내가 외로웠었구나! 역시 혼자였구나!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구나! 아무도 내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것이었구나!’이런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한편 고통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큰 은혜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실은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회피본능이 있어서 외로움을 애써 외면합니다. 이 여인이 전형적으로 외로움을 외면하면서 살아온 우리 인간의 표본입니다. 회피하면서 사는 것이 몸에 밴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난데없이 목마르지 않은 물이 있다고 미끼를 던지십니다. ‘네가 이 물을 나에게 주지 않는데, 실은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네가 오히려 나에게 물을 달라고 구했을 것이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10, 13, 14)

여러분, 사람이 먹고사는 활동 이외의 활동은 실은 외로움을 잊기 위한 활동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 취미활동, 동호회 활동, 전부 외로움을 잊기 위한 성격들이 강합니다. 그런데 외로움이라는 문제는 주님께 가야 해소됩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사람? 너무 의지했다가는 실망만 커집니다. 물질, 취미? 생명 없는 것들인데 두 말해서 뭣 하겠습니까? 일시적일 뿐입니다. 주님께로 가야 풀립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께 나아가서 꼭꼭 닫아잠그고 들키지 않으려했던 내 속에 외로움의 보따리를 풀어 젖히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기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3. 불편함이 은혜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는 말에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물을 말씀하시는데 여인은 입으로 마시는 물리적인 물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이렇습니다. 한계상황을 만났을 때라야 영적인 물을 찾지 대부분은 물리적 물을 찾습니다. 그러고 보면 수가성여인만 특별히 문제 많은 여인이라 봐왔던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나 싶습니다. 수가성여인은 실은 우리 인간의 전형입니다.

다시 목마르지 않고 물 길으러 오는 수고를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며 생수를 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둘러댑니다. 15, 16절 읽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5, 16)

 

여인은 인생살이가 평탄치 않았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정식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인생이 되었는지 참 기구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면서 여인의 삶 속으로 파고드십니다. 모른 체하고 생수를 주시면 될 것을 주님은 꼭 남 불편한 것까지 들추어내셔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신의 삶과 처지를 깊이 들여다보는 반성과 그에 따른 아픔을 느낄 때 비로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어제 왜관의 한 골목을 지나가는데 앞에 할머니 한 분이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가는데 다리 한쪽을 절면서 위태위태하게 갑니다. 나는 시간이 급한데 이분은 빨리 가지도 못하고 천천히 가시는데 싣고 가던 박스 몇 개가 흘렀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내려서 흘린 박스들과 고물을 다시 차곡차곡 실어서 끈으로 질끈 묶어드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서 코끝을 찌르는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서 한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꽤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인데 모교회 헌신예배 설교를 하고 와서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모교회보다 더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모교회에 가는 길이니 갈 때는 기분이 좋았지요. 은혜롭게 설교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다들 훌륭한 목사님 되셨다며 칭찬 섞인 인사를 하는데, 한 분이 ‘니, 봉사네 아들 아이가?’그러면서 ‘너네 집이 옛날에 이렇고 이렇지’라며 목사님의 어렸을 적 어두웠던 가정사를 몇 마디 하고는‘번듯하게 컸네!’이러면서 어깨를 툭 치고 가는 겁니다. 목사님은 어렸을 적 부친이 사고로 앞을 못 보게 되신 다음부터 동네 사람들 중에 목사님네를 봉사네라고 낮춰 부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어린 목사님 마음에 좋았을 리가 있나요? 거기다가 아버지가 앞을 못 보시니까 형편이 어려워졌고 어머니는 특별한 기술은 없으시지, 어쩌겠습니까? 동네 고물을 모아다가 팔아서 겨우겨우 자식들을 공부시키며 먹고사셨습니다. 그 덕에 목사님은 잘 자랐고 또 열심히 노력한 것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규모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딜 가든지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봉사네’라는 말을 들은 겁니다. 목사님은 그날 이후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과거 어두웠던 시절의 그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채 마음 밑바닥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게 다 치유되었다면 ‘봉사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요. 목사님은 그것을 깨달은 날 저녁부터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조용히 돌아보면서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그저 묻어두기만 했던 아픈 기억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지금은 규모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어딜 가든 인정받고 대접받는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하며 살고 있지만 내면에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고물을 주우러 다니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던 어릴 적 모습이 연약한 자아가 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편안하게 가져가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날 그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난 뒤부터 목사님은 한결 마음이 편해지셨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일들의 원인이 실은 자신 속에 있던 이 쓴뿌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다음부터 목회에 대한 부담들에서 벗어나서 더 건강한 목회를 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깊이 반추(反芻;되새김질, 깊이 들여다보고 음미하는 일)해 보지 않고 삽니다. 정말 중요한 일들은 덮어놓고 애써 외면하며 사는데 익숙합니다. 수가성여인은 누더기처럼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는 생수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기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의 인생을 대면하게 하셨던 겁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말입니다. 직면하여 풀어내지 않고 무져 놓은 삶의 찌꺼기는 수시로 슬금슬금 기어 나와 내 인생을 괴롭힙니다. 내 속의 얽힌 것이 문제인데 남을 탓하고 환경을 비관하며 살게 만듭니다.

오늘 주님은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네 과거를 직시하라, 네 속을 들여다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에게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실 때도 있고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불편해져야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위험합니다. 느껴야 약을 쓸 수 있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하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맺는 말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나면 마음까지도 울적하고 추워집니다. 이런 계절 더욱 주님으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238 열왕기하강해 24 정중여산(靜重如山) 열왕기하 18:36~19:7(구약594)  2019-08-11  전용표 목사 
237 열왕기하강해 25 하나님의 열심 열왕기하 19:29~37(구약597)  2019-08-18  전용표 목사 
236 열왕기하강해 26 히스기야의 연속된 고난 열왕기하 20:1~11(구약597)  2019-08-25  전용표 목사 
235 열왕기하강해 27 히스기야의 이탈 열왕기하 20:12~21(구약598)  2019-09-01  전용표 목사 
234 열왕기하강해 28 므낫세는 최선을 다하였다 열왕기하 21:1~18(구약599)  2019-09-08  전용표 목사 
233 열왕기하강해 29 요시야는 중심을 잡았다 열왕기하 22:1~20(구약600)  2019-09-15  전용표 목사 
232 열왕기하강해 30 요시야는 철저하였다 열왕기하 23:1~14/ 예레미야 7:1~15  2019-09-22  전용표 목사 
231 열왕기하강해 31 요시야는 안타깝게 죽었다 역대하 35:20~27  2019-09-29  전용표 목사 
230 열왕기하강해 32 여호야김 : 브레이크가 고장나다 열왕기하 23:36~24:7(구약604)  2019-10-06  전용표 목사 
229 열왕기하강해 33 유다 멸망 : 절망이 희망이다 열왕기하 24:18~25:7(구약605)  2019-10-13  전용표 목사 
228 요한복음강해 1 빛으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 1:9~13(신약142)  2019-10-20  전용표 목사 
227 요한복음강해 2 축제는 끝났다 요한복음 2:1~12(신약143)  2019-10-27  전용표 목사 
226 요한복음강해 3 허물어야할 성전, 세워야할 성전 요한복음 2:13~22(신약144)  2019-11-03  전용표 목사 
225 추계성례식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마태복음 26:17~35(신약45)  2019-11-10  전용표 목사 
224 추수감사절 행복한동행 결국 찾아야할 길 요한복음 3:1~17(신약145)  2019-11-17  전용표 목사 
223 요한복음강해4 백만불 카메오 요한복음 3:22~30(신약146)  2019-11-24  전용표 목사 
» 요한복음강해5 내가 외면한 내 인생인데 요한복음 4:1~19(신약147)  2019-12-01  전용표 목사 
221 요한복음강해6 내가 왜면한 내 인생인데 요한복음 4:20~29(신약147)  2019-12-08  전용표 목사 
220 요한복음강해7 마르투스 요한복음 4:27~42(신약147)  2019-12-15  전용표 목사 
219 요한복음강해 8 익숙함과의 결별하기 요한복음 5:1~16(신약149)  2019-12-22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