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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4 백만불 카메오 
본문 요한복음 3:22~30(신약146) 
날짜 2019-11-24 
설교자 전용표 목사 

성경 : 요한복음 3:22~30(신약 146)

제목 : 백만불 카메오

 

한 목사님이 열을 내면서 가정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와를 보자마자 놀라운 사랑고백을 합니다. ‘와, 당신이야 말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단 말이요?’ 여러분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러자 성도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를 게 있어야지요.” 세상 천지에 여자라고는 하와 하나뿐인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고를 게 있어야지요.’ 참 사람의 인생이 다양합니다. 양지로 길이 난 인생도 있고 응달로 길이 난 인생도 있고, 삐죽삐죽 돌밭으로 난 인생도 있고 양탄자 같은 잔디밭으로 난 인생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을 보면서 부러울 때도 있고 안스러울 때도 있지요. 그런데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인생도 달리 고를 것이 없고 딱 이것뿐이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면 불공평하다고 반문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누구는 편안하고 순탄한 인생, 나는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인생, 그런데 나에게 주실 인생이 이것밖에 없으셨다니 너무 하신 것 아니야?’ 그렇습니다.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듬고 깎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내가 받아 사는 인생은 내가 천국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깎이고 다듬어지는데 가장 합당한 인생코스라고 여기셔서 주신 것입니다.

영화에서 카메오라는 역할이 있습니다. 유명한 운동선수나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 영화에 깜짝 등장하는 것을 카메오라고 합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지만 특별엑스트라 정도 되겠습니다. 가령 박찬호나 차범근 씨가 어떤 영화에 출연해서 주인공이 버스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 옆에서 군밤을 파는 엑스트라로 깜짝 출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객들 입장에서는 영화가 훨씬 더 재미있어지는 거지요. 카메오 역을 맡는 사람은 영화 주인공 배우만큼이나 유명인사지만 그 영화를 재밌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엑스트라가 되어주는 겁니다. 영화감독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일입니다만 실은 자신을 낮추어서 카메오로 출연을 하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기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카메오라는 말이 ‘원석(原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인생 전체를 통해서 보석으로 가공되는 과정을 겪는 원석들인데, 카메오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어쩌면 가공이 잘 이루어져서 멋진 보석으로 바뀐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1. 나를 보는 성숙함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기분이 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26절을 봅시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선생님, 지난 번 선생님이 우리에게 소개하셨던 그 분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다 그분에게로 몰려갑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볼 때에 세례를 베푸는 일을 먼저 시작한 것은 자기네 스승인데 나중 시작한 저 예수선생에게로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간단 말이지요. 거기다가 예수선생도 자기 스승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네가 원조집이고 저쪽이 분가집인데 그리로 사람이 더 몰리니까 속이 어지간히도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예수선생에게도 사람들이 가도 좋은데 단, 자기네보다는 적게 가기를 바랐겠지요.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되니 기분 나빴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만 그렇겠습니까? 대부분 사람이 이런 상황이라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자기 제자들의 이런 말을 들은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을까요? 27절을 봅시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

 

무슨 말입니까? 이런 말입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않는데 사람이 무슨 수로 받겠느냐, 하늘에서 주셨으니 받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우리에게 안 오고 그쪽으로 몰려가는 것도 다 하늘이 허락하셨으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기분 나빠하기만 하느냐?’ 참 중요한 말입니다. 하늘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어찌 내 기분 나쁜 것만 생각하느냐?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로 청년부를 담당할 때 일입니다. 청년 중에 신앙이 좋고 성격과 성품 성실성 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무척 아끼던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고민이 있다 해서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들어보니 뭔가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쭉 설명을 했습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쪽을 선택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만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니 내가 말한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보고 결정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는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친구가 내가 조언한 대로 결정하지 않고 다른 부서 부목사님이 조언한 대로 결정을 했더라고요.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은근히 기분 나쁘더라고요. 내가 담당 교역자이고, 또 그토록 아껴주고 했는데 다른 부서 목사님 조언을 따랐다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배신감도 조금 느껴지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청년이 꼭 내 조언대로 결정해야 할 무슨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나요? 결국 뭐냐? 내 속에 있는 지배욕구(支配欲求)가 문제입니다. 내 말대로 따라주지 않았을 때 은근히 기분이 상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내 속에 지배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 속에는 다 이런 주도적이려고 하는 지배욕구가 하나씩 있습니다. 이 지배욕구가 좌절되면 묘한 패배감 같은 것이 들면서 기분이 상당히 나쁩니다. 대화의 주도권에 민감한 사람은 누군가 대화를 주도하고 자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묘한 패배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의사결정에 민감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견대로 결정이 되지 않았을 때 마음이 많이 불편하고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낍니다. 통제의 욕구가 강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내 조언보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더 귀담아들을 때 마음이 불편하고 패배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지요.

성숙함이 뭐냐? 내 마음을 살필 줄 아는 것입니다. 원인이 밖에서 제공됩니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네모 난 컵에 담으면 네모 난 물이 되고, 둥근 컵에 담으면 둥근 물이 됩니다. 똑같은 일이라도 내 마음이 그것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보십시오. 살아가면서 내가 항상 주도권을 쥘 수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이 꼭 맞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도권을 쥘 수 있으며 내 의사대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며, 꼭 저 사람에 대해 내 영향력이 커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내 속의 왜곡된 지배욕구가 자꾸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지, 저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내가 느낀 패배감은 사실 스스로 느낀 것이지 저 사람에게 져서 느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속에 있는 왜곡된 지배욕구입니다. 이것을 자꾸 생각하며 깨달아야 합니다. 저 사람에게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반응하는 나를 자꾸 돌아봐야 합니다. 내 속에 어떤 것이 바쳐서 지금 기분이 나쁜가? 나는 왜 그런 것에 편히 넘어가지 못하고 바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좀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 본성을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러면서 조금씩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일이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 기분이 몹시 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기분이 나빠야 할 사람인 세례요한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꼭 나라야 한다, 내가 중심이라야 하고,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내 결정이라야 하고,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저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고 그렇게 되는 것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2. 백만불 카메오로 사십시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로 오지 않고 예수선생께로 가자 기분이 몹시 상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세례요한이 말을 이어갑니다. 28~30절까지 읽습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27~3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시도록 미리 길을 쓸라고 보냄 받은 마당쇠다. 결혼식으로 친다면 나는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들러리 친구다. 그래서 신랑이 주목받고 박수받으면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덩달아 기분이 좋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화룡점정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는 점점 더 인기가 올라가야 하겠고 나는 쇠퇴해 가야 한다. 그래서 아무도 내게 주목하지 않고 오로지 그분만 주목하고 아무도 내게 오지 않고 모두가 그분에게로 몰려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경쟁자였던 다윗을 향해 네가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요나단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을까요? ‘목사님, 상대가 예수님인데 예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가 아니면서도 그리스도 행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도 내가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지 조연이 되면 기분 나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내가 그리스도, 주인공이 아니라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은 카메오 역할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카메오 역할에 충실할 때, 나를 통해 그리스도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2019년 한 해가 제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해로 남을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한 해였고 가장 깨어지고 초라함을 느낀 한 해였습니다. 올 해 교회적으로 겪은 일이 시시비비를 떠나서 저에게는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선물이라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올 해 같은 일을 겪기 전에는 주변에서 목회가 힘들다, 교회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 마음고생이 심하다, 뭐 이런 말을 들으면 솔직한 고백입니다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목회 실력이 부족하니 그렇지, 자기가 지혜롭게 못해서 그렇지!’ 그 밑바닥에는 ‘내가 목회 잘 한다, 내가 지혜 있게 행한다, 목회센스가 있고, 설교 DNA가 있구나!’ 이런 생각이 깔려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목회에 힘든 일이 찾아오고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보니 지금까지 잘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베풀어주셨던 긍휼의 선물이었지 내가 잘 나서 얻은 성과가 아니었습니다. 나보다 목회 못하는 사람이 없어보였습니다. 내가 제일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뭡니까? ‘용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야, 주인공 행세 이제 그만해! 너는 카메오일 뿐이야! 카메오 역할에 눈을 떠! 너는 그래야하는 존재야! 내가 하는 거야!’ 이 음성이었습니다. 이걸 이제야 들은 겁니다. 이 음성을 들으니 전에 내가 잘 났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전부 배설물로 느껴지더군요. 그 전까지는 겉으로만 겸손한 체 한 거였습니다. 진짜 겸손을 이제 조금 배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 해 겪은 일이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여러분,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공입니다. 내가 높고 화려해서 주님이 가려져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카메오입니다. 내가 초라해서 주님이 드러날 수 있다면 초라해지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맺는 말

 

 

그러니 여러분 세상에서 너무 주인공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카메오가 되어야 나를 통해 그리스도 주님이 드러나시지 내가 다 주인공 해버리면 절대 나를 통해 그리스도 주님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차범근씨가 어떤 영화에 군밤장수로 출연한다면 그야말로 백만불짜리 카메오가 아니겠습니까? 또 그 덕에 그 영화가 얼마나 유명세를 타겠습니까? 기왕 카메오 역을 맡았으면 백만불짜리 카메오가 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쓸어놓은 길로 주님이 여러분 삶의 자리에 충만히 임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시면서 가슴 벅찬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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