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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3 허물어야할 성전, 세워야할 성전 
본문 요한복음 2:13~22(신약144) 
날짜 2019-11-03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3

성경 : 요한복음 2:13~22(신약 144)

제목 : 허물어야할 성전, 세워야할 성전

 

 

어떤 마을에 교황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으더니 단상에 올라가서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불에 데 본 사람 있소?” 그러더니 누군가가 건네 준 횃불을 들고는 자신의 팔을 횃불에다 집어넣었습니다. 살타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현란한 말솜씨로 연설을 합니다. “죄를 씻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 활활 타는 지옥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요! 자, 면죄부(免罪符)를 사서 죄를 씻을 사람들 앞으로 나오시오! 그리고 저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오? 지금 당신 아버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 말이요. ‘나는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재산까지 물려주었는데 너는 나를 이 고통당하는 곳에서 구해주지 않는구나! 이 뜨거운 불속에 나를 버려 둘 셈이냐?’ 여러분, 그깟 얼마의 돈을 아까워한단 말이오? 지금 여러분의 동전이 땡그랑하고 헌금함에 떨어지는 즉시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이렇게 외친 사람은 요한 테젤(Johann Tetzel)이란 사람입니다. 150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 가장 많은 면죄부를 판매한 면죄부 판매왕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면해 준다는 종이 문서입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 면죄부를 사면 어떤 죄든지 용서받고 천국 간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면 지옥에 간 사람은 연옥으로, 연옥에 간 사람은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성경에 있지도 않은 이런 희한한 교리를 주장하면서 면죄부를 팔게 된 이유는 건축비 때문이었습니다. 교황이 ‘베드로 성당’이라는 어마어마한 성당을 건축하면서 모자라는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경에 있지도 않은 면죄부라는 것을 만들고 말솜씨 좋은 사람들을 앞장 세워 유럽전역에서 팔았던 것입니다. 면죄부 판매왕 요한 테젤이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 근처에 와서 엄청난 면죄부를 판매하자 거기에 의분을 느껴 95개 반박문을 써서 발표한 것이 루터입니다. 이것이 1517년 10월 31일의 일입니다. 역사는 이 날을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이라 기록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을 기록한 성경말씀을 종교개혁자들이 어떤 신앙으로 받았는가를 공부하는 시간으로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셔서 성전 안에서 짐승을 팔고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4~16)

 

당시 성전 안에는 제사제물로 쓰는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개인장사라기보다는 당시 최고 권력자들인 대제사장들에게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최고 권력자들인 대제사장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은 백성들이 제사 지내러 자기집에서 흠 없는 소나 양을 끌고 오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지 퇴자를 놓고는 성전 안에서 파는 소나 양을 사게 합니다. 아예 노골적입니다. 악랄하지요. 성전 안에서 파는 것 아니면 뭐든지 안 됩니다. 거기다가 굉장히 비싸게 받습니다. 밖에 보다 배나 비싸게 받는데 그래도 어쩝니까, 사는 수밖에요. 마치 예식장 음식 비싸게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엄청나게 남겨먹습니다. 그런데 이건 세발의 피예요. 백성들이 돈을 가져와서 성전 안에서 파는 소나 양을 사려고 하면 이번엔 그 돈은 안 받는다고 합니다. 성전 안에서는 성전 안에서만 사용하는 돈이 따로 있습니다. 그 돈으로 바꿔오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성전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쿠폰을 비싼 돈 주고 구입을 해서 그 쿠폰으로 소나 양을 사도록 해놓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건 뭐 장사로서는 거저먹기예요.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이러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경건보다는 이익이 우선인 분위기지요. 하나님보다는 인간이 주인노릇 하는 분위기입니다. 주님은 이런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관계가 이해관계가 되면 곤란합니다. 돈거래, 사업관계, 이해관계 이런 것들로 성도들이 얽히고설키면 그 교회는 금방 병이 들고 맙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관계는 가급적 순수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듯이 모이기를 힘쓰면서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화려하지 않아도 건강하고 오래 갑니다. 목장모임 때 되도록 말씀을 깨닫고 은혜 받고 도전받은 것,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것, 기도에 응답받은 것, 이런 것을 자꾸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것 나누다보면 관계가 세상적으로 흘러가게 되고 결국 이런 저런 삐걱거림이 자꾸 발생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말씀 들은 것 가지고 나누기를 시작하면 나중에 훨씬 은혜롭고 영적으로 재충전되는 모임으로 발전합니다.

 

 

 

2. 조연의 화려함, 주연의 화려함

 

 

 

이렇게 하는데도 감히 최고 권력층이 하는 일이어서 아무도 항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 나사렛 촌동네에서 온 시골뜨기 예수란 자가 나타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휘두르면서 짐승들을 내쫓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의 상을 엎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는 의분(義憤)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의분은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항거할 줄 아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은 참 묘한 분입니다. 온유함과 의분을 동시에 가지고 계셨어요. 유대인들이 또 그럽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세상은 바르게 하려는 사람을 응원하기보다는 ‘너만 잘 났냐? 모나게 굴지 마라!’ 항상 이런 식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지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못 믿겠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20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짓고 있는 건데 네가 무슨 수로 삼 일만에 다시 세운단 말이냐?’ 이거지요. 당시 성전은 이두매라고 하는 이방 사람으로서 갖은 수단방법으로 왕 자리를 오른 헤롯이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은 것입니다. 최대한 크고 웅장하게 짓고, 그 안을 금으로 칠하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솔로몬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와 화려함이 압도적이었다고 합니다. 성전 가로 담벼락이 500미터에 육박하고 세로 담벼락이 300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헤롯이 지어준 것이지만 유대인의 성전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헐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크고 웅장하고 화려해도 주님은 그런 것을 참 성전이라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이 노력했던 부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배당을 정도 이상으로 크게 짓거나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품없게 짓지도 않습니다. 멋스럽게 짓습니다만 중세 가톨릭이 성당에 하던 온갖 화려한 치장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성당에 들어가면 눈 갈 곳이 많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예배당을 수수하게 해서 사람의 눈 갈 곳이 되도록 적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오로지 하나님께 마음이 가도록, 주님께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옷도 화려하지 않게 했습니다. 가톨릭처럼 화려한 가운을 입는 것을 지양 하고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양복을 입는 것이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박사가운을 입기도 하는데 사실상 개신교 정신에는 맞지 않습니다. 또 최근에는 목회자들도 신부들이 입는 ‘로만칼라’ 옷을 입는 경우가 있는데 로만칼라는 독신으로 살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모르고는 입어도 알고는 입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이 돋보이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목회자들의 복장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되도록 화려하지 않도록, 수수하게 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츄리닝에 슬리퍼 끌고 와서는 곤란하겠지요. 세상 풍조를 좇아 명품을 두르고 올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다는 아니지만 도시교회들 중에는 교회에도 명품 바람이 불어서 예배에 갈 때 명품을 들고 가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는 교회들도 있다고 합니다. 가끔 일이 있어서 도시의 화려한 교회에 가보면 일단 놀라는 것이 여성분들 중에 연예인 닮은 분들이 제법 많다는 겁니다. 연예인들처럼 코도 오뚝하게 세우고 눈도 앞트임을 하고 애교 살도 튀어나오게 하고, 심한 경우는 턱을 다 깎은 분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안내를 하면서 ‘어서 오세요, 목사님!’하고 반겨주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부답감이 듭니다. 나중에 천국 들어갈 때 원판 대조하느라 시간 꽤나 걸릴 것 같습니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이 없으니 교회가 세상풍조를 너무 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과거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던 것 중에 하나가 수수하고 검소함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있어도 있는 표시 내지 않고 되도록 수수하고 검소하게 다니는 것을 신앙의 한 부분으로 여겼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예배에서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수수하게 가라앉힌 격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아직 옛 성도들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의 주연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다 조연들입니다. 조연이 너무 화려해서 주연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든 것이지요. 주연인 예수님만 화려하고 돋보이는 교회로 나아가야 교회가 바르고 건강해 집니다.

 

 

 

3. 내가 예수요!

 

 

 

그 크고 웅장하며 온갖 보석으로 정성스럽게 치장한 성전을 예수님은 성전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참 성전이라 보신 것은 무엇입니까? 19절과 건너뛰어서 21, 22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9,21,22)

 

사람이 지어놓은 성전은 참 성전이 올 때까지만 역할 하는 그림자일 뿐이며, 참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그 의미를 몰랐다가 나중에 예수님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처음에 제자들도 헤롯 성전의 화려함에 도취되어서 예수님께 ‘저것 보십시오, 굉장합니다’(막13:1,2)라고 자랑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성령을 통해 깨닫고는 ‘사람이 지어놓은 저런 건물은 성전이 아니다.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 참 성전은 오직 예수님이다. 지금 우리 속에 거하시는 주님이야말로 참 성전이다, 그리고 그 주님이 거하시는 내가 참 성전이고 우리가 참 성전이다. 그러므로 내가 참 성전이 되고 우리가 참 성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주장을 하다가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사태가 발생했지만(행7:48)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가 친히 성전이 되시고 예수님을 모신 내가 참 성전으로 지어져가야 된다는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엡2:22).

우리도 이 신앙을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임재 해 계시는 내가 곧 성전입니다. 그리고 참 성전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예수를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사를 예수님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매를 맞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도 고난당하셨는데....’,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피해가기보다는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려 들고, 가난해서 초라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래도 나는 머리 둘 집은 있지 않은가’ 하면서 자신의 가난함을 탓하지 않고 남의 부요함을 부러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잘되고 부요해지면 하늘 영광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곳에 오시어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신 복을 나누려고 애쓰며 ‘줄 수 있는 사람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중 천국에 가면 주님이 제일 잘 알아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들입니다. 평생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며 산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가 터키의 갑바도기아에 있는 괴뢰메지역입니다. 화산재가 쌓인 지형이 바람에 깎이어 버섯보양의 신비로운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곳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기독교 성지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예루살렘에 성지순례 왔던 자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중에 이곳 갑바도기아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예수를 믿는데, 그로 인해 핍박을 받아 사람 사는 마을을 버리고 이곳으로 숨어들어서 땅속에 동굴을 뚫고 살았습니다. 그 초라하고 빈약한 곳에서 나중에 삼위일체교리라든지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중요한 신학들을 세우는 걸출한 영적스승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을 갑바도기아 교부들(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쫓겨난 고독과 고난의 땅에서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 세상을 밝히는 등불을 내놓은 자들입니다. 진실한 신앙, 참된 성전으로 살려면 검소해야 합니다. 수수해야 합니다. 가끔은 초라하고 고독한 삶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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