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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강해 1 빛으로 오신 예수 
본문 요한복음 1:9~13(신약142) 
날짜 2019-10-2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요한복음강해 1

성경 : 요한복음 1:9~13(신약 142)

제목 : 빛으로 오신 예수

 

 

진시황제가 중국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상앙이라는 재상인데, 상앙이 재상이 되어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자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법을 지키지 않을 분위기여서 백성으로 하여금 법대로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지혜를 냈습니다. 진나라 서울 남문에 나무기둥을 세우고는 이 나무기둥을 북문까지 옮기는 자에게는 금 200냥을 준다고 방을 써붙였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옮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못 믿겠다는 거지요. 상앙은 다시 방을 써붙였습니다. 금 1000냥을 주겠다. 한 사람이 나무기둥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즉시 1000냥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나라가 진짜 법대로 하는구나하고는 법을 지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의 백성이 되면 지켜야할 법이 있고, 또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특권은 법을 믿고 따를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를 내 삶에 빛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로서 권세를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오늘부터 살펴 볼 요한복음에 관해 간략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많이 비슷합니다만 요한복음은 이 세 복음서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결별을 하던 당시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쓰여 진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초창기 기독교는 유대인들 회당에 같이 모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대교에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나와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배경 속에서 기록이 된 복음서로서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이 약속하고 있는 메시야인데 구약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유대교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오해하고 어떻게 핍박하였는가가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가령 예수님이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하시면 유대인들은 ‘우리더러 자기 살을 뜯어먹으라는 건가’ 이런 식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이 풀어 설명을 하시면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이 정도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다, 빛이다, 생명의 떡이다, 참 목자다, 여러 가지로 빚 대어 표현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빛이라고 하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9)

 

이등병을 달고 자대에 배치를 받았더니 처음 며칠간은 적응 기간이라고 보초에서 면제를 해주었습니다. 적응 기간 끝나니 보초를 내보냅니다. 고참과 함께 뒷산에 있는 대공초소에 보초를 나가는데, 어두워서 손전등을 들고 산길을 겨우겨우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고참은 손전등도 없이 저 앞에 성큼성큼 가는데 대낮처럼 갑니다. 신기했습니다. 그 고참이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손전등 끄고 달빛에 적응하면 더 잘 보인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음날 보초 나갈 때 고참 말대로 손전등 없이 가보았습니다. 달빛에 적응 하니까 손전등 켰을 때보다 더 편하고 잘 보였습니다. 손전등 켜면 불빛 비추는 데만 보이고 나머지는 캄캄해서 손전등 불빛 비춘 데만 보고 걷는데 손전등 끄고 달빛에 적응을 하니까 골고루 다 보입니다. 걷는 게 훨씬 편합니다.

주님이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을 비추셨다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가진 빛은 참 빛이 아닙니다. 손전등에 불과합니다. 그게 밝아 보입니다만 겨우 한 발자국 앞만 비출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 빛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과 담이 쌓여 외톨이 신세가 되었어도 그것을 풀어낼 능력이 자기에게는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사람들과 만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는 정도의 잔꾀만 늘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자 엉망진창으로 꼬인 인생살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피해 살던 사람이 스스로의 발로 동네사람들 찾아가 만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기 급급했던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말하면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찾아가시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자신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꼬여있던 인생이 풀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2. 주님 없는 나는 언제나 어둠

 

 

 

주님이 참 빛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0,1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도는 권세를 주셨으니 (10~12)

 

마을회관이 요즘은 공동생활 장소가 되었습니다. 모였다하면 저녁까지 있다가 집으로 가는데 집이 집인지 마을회관이 집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이 되니 다들 눈이 침침한 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시력에 대해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옵니다. 나는 버스번호도 잘 안 보인다, 나는 성경책 글씨도 이제는 잘 안 보인다, 다들 연세들이 있으니까 눈들이 좋을 리가 있나요? 침침해서 잘 안 보이고 불편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한 사람이 자기는 작은 글씨도 아직 보이고, 버스가 100미터밖에 있어도 버스번호가 또렷이 보인다고 눈 자랑을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불이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정전이 된 겁니다. 정전이 되니까 캄캄합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눈 안 좋다는 사람이나 눈 좋다는 사람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똑같이 안 보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 눈이 아직 밝으니까 세상도 보고 글도 읽고 하는 줄 아는데 실은 빛이 있으니까 보는 겁니다.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이라도 캄캄한 방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 밝은 사람이나 어두운 사람이나 캄캄한 방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어요. 똑같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다 어둠입니다. 뉴스에 나올 만큼 큰 죄를 짓는 사람만 어둠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우리들도 어둠입니다.

내가 똑똑하다, 내가 정확하다,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바르게 살았다, 이런 것이 실은 자신이 어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생각들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가면 예수님이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고쳐서 보게 하신 다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 그럽니다. 자기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남들보다 더 지키면서 사는데, 그런데도 예수님이 남들처럼 똑같이 맹인취급하니까 기분이 나빴던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41)

세상 욕심에만 얽매여 사는 것도 어둠입니다. 그게 다 썩어질 것들인데 그걸 모르고 거기에만 인생을 다 쓰고 사니 어리석음이고 어두움입니다. 내가 어둠인줄 깨닫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접, 주님을 내 삶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3. 어둠을 이기는 권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자체가 가장 큰 특권입니다. 요한복음을 쭉 읽어나가다 보면 이 권세가 무엇인가가 군데군데 나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한 세 가지로 추려집니다.

 

 

1) 평안을 누리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권세 첫 번째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안을 누리는 것이 권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27)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도 그렇고 어떤 종교를 가지듯 비는 것을 봐도 그렇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없어서는 안 될 것이 평안입니다. 평안을 얻으려고 돈도 벌고 좋은 집도 사고 합니다만 누차 드리는 말씀이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편안함이지 평안은 아닙니다. 평안은 사람이 가진 것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일을 앞두고 계셨을 때 제자들은 장차 될 일을 생각하며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젊었을 때 프랑스유학을 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모교를 방문해서 자기를 가르쳐주신 교수님을 찾아뵙습니다. 나이가 많아 계단을 잘 못 올라가십니다. 그래서 이 분이 ‘선생님 제가 업어드릴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노교수님이 화를 내시면서 ‘괜찮아, 나는 시체가 아니야!’라고 했다는 겁니다. 서양인들은 부축은 받아도 업히는 건 수치로 여깁니다. 우리는 다르지요. 우리는 업히는 걸 미안하게는 생각하지만 나를 시체 취급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업히는 것을 좋아하지요.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가 서로 업어주고, 자식이 부모를 업어주고, 친구들끼리 업어주면서 놀기도 합니다. 우리는 업히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 어렸을 적에 다들 업혀서 컸거든요. 그 기억이 너무 좋거든요. 추운 겨울 엄마가 들쳐 업고는 바람맞지 말라고 옷으로 덮고 걸어가시면 발은 살짝 시리면서도 그 포근하고 아늑했던 기억들이 다들 아련히 있습니다. 엄마가 업어주는 것은 남이 업어주는 것과 다릅니다. 남이 업어주면 뭔가 어색하고 편지 않습니다만 엄마가 업어주면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가 쳐도 평안합니다.

업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연약함, 한계, 그 사람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심란하고 평안이 사라졌을 때 죽기살기로 주님을 붙들어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받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평안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붙들면 평안이 회복됩니다.

 

 

2) 기도할 수 있는 권세

 

또 무엇이 하나님 자녀가 누리는 권세일까요? 기도입니다. 16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6:24)

 

14장부터 16장까지는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하시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입니다. 그 설교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시고 또 기도응답의 약속을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까지는 주님이 바로 곁에 계시니까 특별히 기도의 자세를 취하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떠나가십니다. 떠나가시면서 이러시는 겁니다. 내 없더라도 내가 곁에 있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도울 길을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다.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내가 곁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받게 될 것이다. 기도의 효과를 보게 되면 너희가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다.

특권으로 주어진 기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부담과 의무처럼 되었습니다. 기도가 특권입니다. 특권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3) 어둠을 이기는 권세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어둠을 이기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생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싫어했습니다. 자기들의 어둠이 드러나니까. 싫어할 뿐 아니라 핍박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무시무시한 죄를 뒤집어 씌우고 거짓 증인을 동원하였으며 재판관을 압박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은밀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등 불의와 치졸함의 극치를 이루면서 예수님을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만들어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죄를 뒤집어 씌워 예수를 죽였는데,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그 이름이 죄인의 괴수로 남지 않고 세상의 구원자로 남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절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칠흑같은 어둠이라도 작은 빛줄기만 비춰도 어둠이 물러가지 빛이 잡아먹히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빛으로 사는 사람이 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빛이 어둠을 이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다가 억울함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되었다면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승리하셨듯이 우리 또한 승리할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빛으로 모셔들이게 하셨습니다. 그 빛 가운데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평안을 누리시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응답의 기쁨을 누리시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빛이 어둠을 이기는 역사를 체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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