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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 31 요시야는 안타깝게 죽었다 
본문 역대하 35:20~27 
날짜 2019-09-29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31

성경 : 역대하35:20~27(구약 707)

제목 : 요시야는 안타깝게 죽었다

 

제 모교회에서 전설적인 사역자로 기억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전도사 시절 중등부를 맡았는데 150명이 모이는 중등부로 성장을 시켰습니다. 그 다음 고등부를 맡았는데 고등부도 150명으로 성장을 시켰습니다. 청년회를 맡았는데 100명이 모이는 청년회로 성장을 시켰습니다. 그때 교회는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전도사님을 도와서 중등부, 고등부, 청년회의 부흥을 일구었던 핵심 멤버들은 사실 그분 앞에 사역하셨던 전도사님이 길러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이들은 기념비적인 부흥을 일군 전도사님만 기억하지 않고 그 앞에 사역하셨던 전도사님을 같이 기억하고 칭찬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결과나 당장의 것을 가지고 평가하기가 쉽습니다만 어떤 것은 그 원인이 한참 앞에 보이지 않게 뿌려진 씨앗에 있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것은 결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고 한참 뒤에 가서야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 안목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봐야 보이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안타까운 죽음의 의미도 먼 안목과 종합적인 안목으로 봐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들이 더 없이 깊이 은혜와 도전으로 와닿습니다.

 

 

 

1. 요시야의 안타까운 죽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린 후 남북 합쳐서 총 39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 중 최고를 꼽으라면 요시야입니다. 요시야와 견줄만한 왕으로 히스기야를 꼽을 수 있지만 두 번의 기적을 경험한 후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에 비해 요시야는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시야는 우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입장에 선 지도자가 빗나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인데 요시야는 죽을 때까지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나라를 온통 뒤덮은 우상숭배와 죄악을 거둬치우는 개혁에 최선을 다하던 요시야는 애굽과 바벨론, 두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 휘말려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요절(夭折)합니다. 신흥 강국 바벨론이 앗수르를 무너뜨리자 애굽의 바로 느고는 지역의 패권을 놓고 바벨론과 한판 붙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갈그미스라는 곳으로 진군합니다. 이때 바벨론과 친분이 두터웠던 요시야는 바벨론 편에 붙어서 유다의 국경을 침범한 애굽을 몰아내기 위해 애굽과 싸움을 벌입니다. 애굽 왕 느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싸우러 간다며 요시야더러 길을 터달라고 압박합니다. 물론 애굽 왕 느고가 하나님 편은 아닙니다. 단지 이 상황에서 요시야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느고의 입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듣지 않고 싸우다가 결국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슬퍼하였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무나 비통해서 슬픔의 노래를 지었으며 합창단이 장례식 때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대목인지 모릅니다. 므낫세 같이 나라를 말아먹는 왕은 55년간이나 통치를 하는데 요시야 같은 개혁군주는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는단 말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대목을 보면 과연 하나님이 계신 것이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냐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 한탄하며 원망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제 4년 후면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침략을 받고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그 험한 꼴을 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미리 데려가신 것이다, 그러니 요시야의 안타까운 죽음을 안 좋게만 볼 게 아니라 오히려 은혜라고 봐야한다고 합니다. 훌다 여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식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고 ‘심리적 진통제’에 가까운 대답이라 봅니다. 사람은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기 때문에 아픔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심리적진통제를 처방합니다. ‘그래, 험한 꼴 보지 말라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오염되지 말라고 일찍 불러 가신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덜 아프고 좋습니다. 그런데 충분한 위로는 되지 않지요.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덜 아프니까 하는 겁니다.

 

 

 

2. 씨앗으로서의 요시야

 

 

 

열왕기하에서는 요시야의 개혁으로도 유다나라의 멸망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하 23장 25, 26절을 봅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5,26)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특별한 개혁이었지만 나라의 멸망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개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라가 망해버리면 깡그리 사라지는데요. 그렇게 본다면 요시야는 과연 성공한 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요시야의 개혁도 성공한 개혁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요시야나 요시야가 했던 개혁의 진면목을 보려면 좀 멀리 봐야 합니다. 요시야 이후 유다는 급격하게 무너집니다. 요시야가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진실한 신앙을 추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포로민들 사이에서 등장하기를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성경은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는 정작 남은 자가 없었고, 포로로 끌려가서 죽을 고생하며 살던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점이 참 역설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생과 고난이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실한 신앙에 이른 사람들이 많지요. 하나님은 절대 손해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주시면 정금 같은 믿음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남은 자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 다니엘과 에스겔입니다.

다니엘은 청소년 때 포로로 끌려갔지만 바벨론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신앙의 지표이자 정신적 지주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다니엘이 주전 605년 느부갓네살의 1차 침략 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때의 나이가 십대 중반 정도였으니까 요시야왕이 죽을 때 나이는 10살 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어렸을 때 요시야의 불꽃같은 개혁을 경험하면서 자라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궁중에서 자란 귀족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어린 나이에 요시야를 직접 보면서 큰 사람입니다.

에스겔도 비슷합니다. 포로로 끌려가서 그발강가 포로민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살았던 에스겔은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리면서 원망일변도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밟아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틀림없이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에스겔은 다니엘보다 8년 뒤인 주전 597년 느부갓네살의 2차 침략 때 포로로 끌려갔다. 그때 그의 나이가 25살이었다고 에스겔 1장에 나옵니다. 그로부터 계산해 보면 요시야가 죽을 때 에스겔은 열세 살이었습니다. 제사장집안인 에스겔도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적 요시야의 불꽃같은 개혁을 경험하였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 이들은 모두 ‘요시야키즈’였던 셈이다. 요시야의 죽음으로 요시야의 개혁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끝이 났습니다. 미완의 개혁이었습니다. 하지만 흩어진 세상속에서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며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불꽃같이 살아간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장은 화려한 것이 열매로 보일 때가 있고 초라한 것은 실패로 비춰질 때가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애착을 가지고 하던 일의 매듭을 짓지 못하고 끝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만 지금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다 해서 실패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매듭을 나중으로 미뤄놓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때는 더 멋지고 아름다운 매듭을 맺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별 소득이 없는 일에 왜 이렇게 고생하며 매달리게 하시는지 지금은 다 알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 수고와 노력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 가실 게 틀림없습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유다가 망한 후 진실한 신앙을 추구하며 남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선택된 사람으로 보아야 맞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씨앗의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인 것이지요. 열매를 거두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도 중요합니다.

 

 

 

3. 부채의식의 산물, 다니엘과 에스겔, 남은 자

 

 

 

요시야를 보고 자란 세대가 다니엘과 에스겔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다니엘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요시야가 했던 개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과 6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철저히 우상을 멀리 하고 어떤 좋은 조건이나 압력이 들어와도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모습은 요시야의 개혁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실생활에 있어서도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다니엘 6장 4절을 봅시다.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단6:4)

 

요시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이었는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다니엘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보기만 한다고 이토록 닮을 수가 있을까요? 물론 존경심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존경심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부채의식(負債意識)’입니다. 해방 후 유명일간지 편집국장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던 시인 정지용에게 어떤 사람이 낡은 원고뭉치를 들고 와서 신문에 실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시작되는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젊은 나이에 생체실험을 당하는 고문 끝에 감옥에서 죽은 청년시인 윤동주의 시집이었습니다. 지금은 윤동주시인이 유명하지만 해방이후까지도 윤동주는 무명인사였습니다. 당시 정지용은 이미 우리나라 문단에서 알아주는 원로 시인에다 안정된 생활과 사회적 지위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정지용시인의 입장에서는 그냥 흘려 지나쳐도 될 일이었습니다만, 잘 알지도 못하는 윤동주라는 젊은이가 남긴 시와 인생을 읽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시류에 물들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민족을 사랑했던 한 젊은이의 인생이 가슴을 후벼 파는 부끄러움으로 와 닿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뭔가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의무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정지용시인은 일간지에 윤동주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의 시를 연재하였습니다. 윤동주시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연입니다. 정지용시인이 윤동주에게서 느낀 것이 바로 부채의식입니다. ‘이토록 맑게 살려고 애쓰며 살다죽은 청년의 죽음, 그 덕을 지금 내가 보고 살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안락하게 편안함에 취해 살아서 되겠는가? 우리 민족이 죄 되게 살아서 되겠는가?’ 이런 마음 말입니다. 부채의식이란 누군가에게 갚아야할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이 과거의 누군가가 희생한 결과이며 따라서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이 요시야 왕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면서 어린 시절 느꼈던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부채의식으로 남았다고 봅니다. 그분이 다 이루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 모든 백성이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 공평과 정의, 긍휼이 하수와 같이 흘러가는 나라, 비록 지금 나라가 망하였어도 지금 이곳에서 내가 그렇게 살고 내 자식이 그렇게 살고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언젠가 민족이 해방되었을 때 고국에 돌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거룩한 부채의식이 끊임없이 다니엘과 에스겔을 아프게 했고 담금질 했습니다. 부러움보다 무서운 게 미안함입니다. 미안함이 크면 함부로 살 수 없고, 미안한 대상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 약해진 것이 바로 이 부채의식이고 절실히 필요한 것 또한 부채의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을 보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개정개역판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해놨는데, 예전 번역인 개정한글판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좀 더 의미를 잘 살린 번역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 바울이 알지 못할 때에는 예수를 사기꾼이라 비난했습니다만 예수를 알고 난 후, 예수가 자기처럼 스스로 의롭다, 남보다 낫다 생각하면서 교만 떨고 자신은 별로 죄를 짓지 않고 산다고 자만하는 자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서 한없는 미안함이 대못처럼 바울의 가슴팍에 박혔습니다. 그 예수 덕에 자신이 지금 정신을 차리고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지난 날 예수 욕하고 살았던 것이 죽을 만큼 괴롭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내가 예수 죽은 놈이야, 예수가 제 잘 난 멋에 살고, 의인인 체 위선 떨며 사는 나 같은 자를 위해 죽으셨어!’ 이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쉽게 죄를 지을 것이며, 썩어질 유익에 예수 이름을 팔 수 있겠습니까? 위협도 고난도 어려움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니 끝까지 진짜로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에 대한 부채의식은 잊고 그 자리를 공로의식으로 채웠기 때문에 썩은 겁니다. 그 잘못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아파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저와 여러분의 죄가 큽니다. 살아나야겠습니다. 이 부채의식이 살아나야겠습니다. 그러면 내일의 한국교회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거룩한 부채의식으로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사는 인생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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