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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 30 요시야는 철저하였다 
본문 열왕기하 23:1~14/ 예레미야 7:1~15 
날짜 2019-09-22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30

성경 : 열왕기하 23:1~14/ 예레미야 7:1~15

제목 : 요시야는 철저하였습니다

 

 

이순신이 부임해 가는 부대마다 이순신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이순신은 훈련시간에 대충대충이 없었습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훈련을 실전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군함을 만들고 또 군량미를 위해서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순신같이 지독하게 하는 지휘관은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져 나왔지만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원균이 이끄는 부대는 싸우는 족족 패배해서 병사들이 죽어나가는데 이순신의 부대는 싸우는 족족 승리하고 병사들 죽는 일이 거의 없자 과거에 철저히 했던 것에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철저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만 그 결과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긍휼히 여기셔서 기회를 주실 때에 두 가지 선물을 보내시는데 세트로 보내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요, 하나는 그 뜻을 실행에 옮기는 왕입니다. 사울시대에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사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주신 사명을 감당해냈습니다. 사무엘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로운 파트너 나단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히스기야왕 때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시대도 아하스왕의 우상정책으로 나라는 엉망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고 히스기야 왕을 보내셨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개혁과제를 히스기야는 성실히 이행하여 앞선 시대 저질러 놓은 모든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나라의 멸망시기를 늦출 수 있었습니다. 그 뒤 므낫세가 들어서서 또다시 나라를 망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에 이제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기회를 베푸시는데, 그 때 보내신 사람이 요시야왕과 예레미야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서와 선지서를 따로 떼서 보다보니 요시야만 생각하고 그 당시 목숨을 걸고 외쳤던 예레미야선지자를 연관시켜 생각하지 못합니다만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실은 예레미야선지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선지자가 물매를 맞는 희생을 감당하면서 외치지 않았다면 요시야의 개혁이 과연 그토록 철저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1. 철저히 밑거름이 된 예레미야

 

 

 

오늘 본문이 두 군데였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7장을 한 번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요시야 13년부터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선지자입니다. 1절부터 빠른 속도로 읽어나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2절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1,2)

 

성전 문에 서서 성전에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합니다. 어떤 말씀을 전하느냐? 4절을 봅시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무슨 이런 미치광이가 있나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성질 급한 사람은 ‘안식일날 예배드리는 성전에 와서 행패냐’고 예레미야를 한 대 후려쳤겠지요. 8절부터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외친 이유가 나옵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여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8~10)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속여서 이득을 취하고 사기친다는 말입니다. 밖에서는 이런 온갖 죄를 다 지으면서 안식일만 되면 성전에 와서 하나님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즉 하나님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신앙고백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바알에게 분향하며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도 따릅니다. 넘어가서 18절을 보면 하늘 여신도 섬기며 온갖 다른 신들에게도 제사를 지냅니다. 31절에 가서 보면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는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버젓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찾고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니 예레미야가 피를 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겁니다. 뭐라고 경고하는지 봅시다. 14~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14,15)

 

실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성소로 쓰임받던 곳인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그렇게 행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자, 이것이 요시야 시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듣고 아멘으로 받았겠습니까, 화를 냈겠습니까? 화를 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고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 뭇매를 맞아가면서 외친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가 있었기에 요시야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를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다가 조롱당하고 두들겨 맞는 사람이 있기에 역사는 발전합니다. 진리를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다가 조롱당하는 억울한 사람이 없으면 사람들의 돌덩이 같은 양심이 절대 깨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역할을 해주겠지?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지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불은 피를 흘려가며 너희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그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원한다면 피하지 마시고 진리를 외치고 바른 것을 외치고 정의를 외치고 의를 위해 억울함을 당하는 역할을 감당하십시오. 십자가를 지십시오.

 

 

 

2. 철저히 청산하는 요시야

 

 

 

이 외침에 대단한 실행력으로 화답한 이가 바로 요시야왕입니다. 요시야는 먼저 백성들을 모두 모아놓고 성전수리하다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말씀을 빠짐없이 들려줍니다. 열왕기하 23장 2절입니다.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2)

 

이때 율법책이라 하면 모세오경입니다. 그것을 전부 읽어주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걸렸겠습니까? 몇 시간, 며칠이 걸려도 다 들려줍니다. 말씀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삽니다. 기준이 사라졌으니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우상을 섬기는 것인지,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인지 자기 뜻을 하나님 뜻으로 둔갑시킨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율법책을 빠짐없이 읽어줍니다. 좋은 구절, 은혜 되는 구절만 뽑아서 읽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적으로 취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다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고 받아야합니다. 그래야 균형을 잡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지니까 백성들이 언약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들,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들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4절을 보면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해 만든 모든 그릇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기드론 밭에서 불사랐습니다. 우상 섬기는데 쓰는 것들이 성전 안에 버젓이 들어있었다니 말이 됩니까? 5절 보니 산당에서 우상섬기는 일 하던 제사장들과 바알과 해와 달과 별에게 분향하던 자들을 폐하였습니다. 직함도 빼앗고 다시는 그런 짓거리 못하도록 엄히 경계한 것입니다. 6절 보면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불살랐습니다. 아세라는 남자 신의 부인신입니다. 성전에 아세라를 세운 것은 하나님이 남신이고 아세라가 그 부인이라고 세운 것입니다. 성경이 없으니 하나님을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7절에 보면 정말 어이없는 것이 나옵니다. 7절 함께 읽습니다.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 (7)

 

남창이 뭡니까? 남자가 창녀노릇 하는 것이 남창입니다. 옛날 이 지역 우상들은 전부 남신과 여신으로 부부신들이었습니다. 그 신들에게 가서 비는 것은 전부 복 받게 해 달라, 잘 되게 해 달라, 풍년들게 해 달라 이런 것들입니다. 소를 끌고 가서 소원을 빌고 난 뒤 남자는 신전에 있는 여자창기들과 성관계를 맺고 여자는 남자창기와 성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흥분한 남신과 여신, 신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면 남신이 사정을 합니다. 그 기운을 받아 돌아가서 파종을 하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병도 낫고 자식도 낳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옆에다 아세라 여신상을 세워두었던 것이고, 성전에 남창도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란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판단을 해서 아닌 것에는 움츠러 들어야 정상입니다. 마치 사람이 끔찍한 장면을 보면 본능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다가 남창의 집을 마련해서 그런 행위를 보란 듯이 행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은 심리적인 저지선이 허물어졌다는 것이고 양심이 먹통이 되었단 말입니다. 타락한 양심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신앙은 저절로 기복신앙, 신비체험신앙으로 흐르게 되고 복 받는 비결이 성행하게 되며 그러다보면 별의별 희한한 방법들이 인기를 끕니다. 이것을 성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요시야는 이런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헐어버렸습니다. 10절에 보면 자식 살라 바치던 도벳 사당을 제거하였다 나옵니다. 아니 뭘 얼마나 큰 걸 얻겠다고 자식을 불살라 바친단 말입니까? 얼마나 바라는 것이 많았으면 자식까지 불살라 바칩니까? 제 자식을 불살라 바치는 사람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무슨 정의가 있고 무슨 올바른 인간관계가 있겠습니까? 참 탐욕이라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우상숭배가 다른 게 아닙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입니다. 요시야는 이런 것들을 죄다 깨부수고 거둬냈다는 겁니다. 버려진 땅에 잡초와 엉겅퀴가 가득한 걸 그걸 트랙터로 속시원하게 갈아엎어버렸습니다.

예레미야 7장과 비교해보면 요시야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적하였던 것들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워하면 철저하게 못합니다.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기준이 불분명하면 단호히 할 수 없습니다. 요시야는 기준이 분명하였습니다. 반발이 커지는 것을 겁내면 철저하게 못합니다. 개혁의 대상이 너무 많았으므로 반발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요시야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오로지 하나님만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말입니다. 철저히 하지 않으면 양심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가장 무서워해야할 것이 양심이 먹통이 되는 겁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양심이 먹통이 됩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아는 게 많은데 몸으로 살아내지 않으니 양심이 먹통이 됩니다. 철저히 거둬치워야 살아납니다. 철저히 거둬치우려는 몸부림을 치면 성령께서 심폐소생술을 해주셔서 멈췄던 양심의 박동을 되살려 주십니다.

 

 

 

3. 철저히 두려워 했던 요시야

 

 

 

요시야가 우상을 찍어내는 일만 철저히 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읽어서는 안 보이는 부분입니다. 감정이입을 해 가면서 읽으면 보이는 것이 있는데 바로 두려움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을 말씀을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22장 13절을 봅시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13절)

 

성전수리를 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읽고는 ‘오래된 책에 별 희한한 내용이 다 있네’ 하고 가벼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율법책의 내용대로라면 자기들이 하나님께 받을 진노가 크다는 것을 곧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선포한 대로 이렇게 가다가는 실로에 임한 심판을 우리도 받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곧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할 일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요시야가 철저한 개혁을 행하게 된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일예배 빼먹으면 사고 날 것 같은 얄팍한 두려움의 차원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슨 긍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며 살아온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입사원을 교육시키는데, 외근 나가서 회사법인 카드로 자기 필요한 것도 사고, 슬쩍슬쩍 회사돈 이용하는 것도 가르쳐 주고, 또 회사에서 조심해야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서 사장 욕도 심심치 않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장의 조카였습니다. 모를 때는 용감했는데 알고 나니 얼마나 걱정이 되고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를 때는 용감했는데 알고는 용감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평판이 나빠질까봐 겁을 냅니다. 안정적인 생활이 무너질까봐 겁을 냅니다. 병이 찾아올까봐 겁을 냅니다. 그러나 진짜 겁을 내야할 분을 겁을 내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보다 더 겁나는 분은 없습니다. 그분이 한 번 거룩한 공의를 발동시키시면 그때는 남아나는 게 없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너무 무서운 분으로만 알 때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설교가 유행했었습니다. 또 그때는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해야할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친근하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으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신앙도 사라집니다. 요시야는 정말이지 철저히 철저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두려워한 만큼 바로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맺는 말

 

 

 

바라기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성령께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분별력이 생겨 하나님 앞에서 삶을 가지런히 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긍휼이 내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도록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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