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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 28 므낫세는 최선을 다하였다 
본문 열왕기하 21:1~18(구약599) 
날짜 2019-09-0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28

성경 : 열왕기하 21:1~18(구약 599)

제목 : 므낫세는 최선을 다하였다

 

 

인도에 다시라트 만지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들에서 일을 하는데 잠을 갖다주러 오던 아내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습니다. 병원에 가야하는데 산이 가로막혀 가지 못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한이 맺힌 만지히는 그때부터 자기 아내처럼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사람이 다시는 없어야겠다고 다짐 하고는 가로막혀 있던 산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정과 망치를 가지고 바위산을 깎아나가는데 누가보더라도 정신 나간 짓이어서 사람들이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만지히는 매일 망치질을 하면서 깎아지른 바위산을 깼습니다. 그렇게 22년을 망치질을 한 끝에 1982년에 바위산을 깨고 폭 9m 길이 100m의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바위절벽 산으로 인해 70km를 돌아다니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쉽게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도정부에서는 그 공로를 높이사 상금과 함께 상을 수여하려 했지만 만지히는 ‘돈과 명예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면서 극구 사양하였습니다. 만지히는 마을 사람들이 다시는 자기와 같은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 하나로 길을 뚫은 것입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그동안 없던 길을 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국종교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편하고 보장된 곳을 마다하고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자기자신을 돌보지 않고 던져서 응급외상센터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낸 인물입니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없던 길을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길을 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광야는 죄로 물든 황량한 사람들의 심령이고 악한 관행과 만연한 구조적 모순으로 병든 세상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광야로 달라나가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흡입력이 있어 광야처럼 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온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길이 됩니다. 내 자식이 내가 걸은 길을 따라 걷게 되고, 또 누군가가 그 길을 따라 걷게 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길을 만드는 사람들인데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어떤 길인가입니다. 바른 길인가 굽은 길인가? 바라기는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놓은 오솔길이 주님이 걸어오시는 오솔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므낫세는 최고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아들로 왕이 되어 최악의 왕이 된 인물입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털어 가장 긴 55년간이나 통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최장수 통치는 유다를 건실한 나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회생불능상태의 죄악도가니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므낫세의 죄로 인해 남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므낫세는 기폭장치의 스위치를 누른 최악의 인물입니다.

 

 

 

1. 여지를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1절에 나오듯이 므낫세는 비교적 어린 나이인 12살에 왕이 되어 55년간이나 통치하면서 실로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좋지 못한 길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3~7하반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3~7b)

 

아버지 히스기야가 제거했던 우상들을 다시 다 세우고 아버지가 역사상 처음으로 제거했던 산당도 다시 세웠습니다. 더 나아가 성전에다가 우상을 버젓이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정책을 따르지 않고 할아버지 아하스의 정책으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과거로 되돌아 간 이유가 있습니다. 앗수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므낫세가 앗수르왕의 충성스런 견마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나옵니다. 앗수르 왕이 대규모 건설공사를 하면 건축비를 가지고 와서 바쳤고(앗수르 왕 엘살핫돈의 기록), 앗수르 왕이 애굽과 전쟁을 하면 많은 군대를 참전시켜서 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의 기록). 개혁정책을 쓰면서 자주독립국의 길을 걸어갔던 히스기야왕 때는 힘을 쓰지 못하던 친앗수르파들이 나이 어린 왕이 들어서자 권력을 잡고서 히스기야 때의 개혁정책을 버리고 아하스 때의 친앗수르 정책을 쓴 겁니다. 불행히도 어린 므낫세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친앗수르 정책을 쓰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앗수르인들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지요.

정신 차리지 않으면 역사는 언제나 거꾸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히스기야가 개혁을 하면서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이 친앗수르파 사람들을 남겨두었다는 점입니다. 여지를 남겨두면 안 됩니다. 여지를 남겨두면 이것이 마치 잡초와 같아서 반드시 되살아납니다. 친앗수르파라는 여지를 남겨두니까 그렇게 애를 써서 이룬 개혁인데 순식간에 아하스 시대로 돌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겠구나, 정말이지 주님을 대충 설렁설렁 믿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믿고 섬겨야겠구나! 이런 마음을 부어주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옛사람의 여지를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잡초를 뿌리째 뽑듯이 옛사람의 습관이나 관계를 남겨두지 말고 뽑아버려야 합니다.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친구가 있다면 아무리 오래 된 친구라도 끊을 때는 끊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습관이 있더라도 끊어야할 때는 끊어야 합니다. 죄 짓던 것 일시적으로 치워놓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의지가 약해졌을 때 또 슬쩍 꺼내게 됩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확실히 치우고 버려야 합니다. 복구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가 처음에야 어려서 대신들이 이끄는 대로 했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서 한 것은 누구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할 때에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말을 듣거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형편을 만들어낸 것도 결국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을 때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절대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나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하고 자신을 엄중히 꾸짖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므낫세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체 잘못 들어선 길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나라를 멸망의 늪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면서 므낫세에게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2. 개혁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므낫세가 아버지의 개혁정책을 버리고 친앗수르 정책으로 돌아서서 앗수르가 원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나라를 온통 우상의 도가니로 만들어갈 때 백성의 반대가 있으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백성들의 동참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점을 성경은 분명히 짚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9)

 

이것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므낫세가 친앗수르 정책을 쓰면서 앗수르의 우상들이나 여타 이방의 우상들을 죄다 가지고 와서 여기저기 세우고 심지어 성전 안에까지 세워서 섬기자고 할 때 백성들이 반발하지 않고 따라갔다는 겁니다.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했던 것이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아하스 왕 때 앗수르를 섬겨서 얻은 것이 없었다, 그리나 히스기야 왕 때는 하나님만 붙들고 섬겼더니 앗수르를 이기기도 했다, 하나님만 붙들고 그 법도대로 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을 봤는데 뭣 하러 앗수르를 섬기며 그들의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면서 모두가 힘을 합쳐 반대를 했어야지요? 그러나 저항하지 않고 므낫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개혁을 추진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자고 외친 히스기야 왕을 경험했으면서도 속은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원했던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다면 히스기야도 따랐다가 므낫세도 따랐다가 합니다. 무슨 기준이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우상을 찍어버리는 개혁을 한 것은 잘 한 것입니다만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되고 철저히 말씀을 가르쳐서 백성들의 마음속에 말씀이 자리 잡히도록 했어야 합니다. 말씀이 자리 잡지 못하면 언젠가는 되돌아 갑니다. ‘더 잘 살게 해 준다, 더 복 받는다’라는 말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므낫세처럼 잘 살게 해 주겠다식의 감언이설로 백성을 꼬시면 안 되고 백성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정말 제대로 된 왕은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강한 나라는 결국 백성이 똑똑할 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후 한글로 된 법률책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왜 백성들에게 법률책을 나눠주느냐고 불만을 토해냈습니다. 세종이 이런 말을 합니다. ‘백성은 벌을 받으면서도 내가 왜 벌을 받는지 모르고 받고, 정당한 벌인지 가혹한 벌인지도 모르고 받는다.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냐?’라고 했습니다.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어야 잘못된 재판도 없어지고 벼슬아치들도 못된 짓을 함부로 못하게 된다는 것을 세종은 잘 알았던 것입니다.

영적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정신없이 돌리면서 사람을 자꾸 교회 안에 붙잡아 두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순종을 강조하면서 목회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처럼 하면서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제대로 알게 되면 분별력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고 어떤 것이 왜곡된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 하나님 뜻에 부합한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 뜻을 빙자한 인간의 뜻인지 분별을 해 냅니다.

결국 개혁은 왕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은 깨어난 백성이 하는 것입니다. 교회개혁도 목사가 하는 것 아닙니다. 말씀으로 깨어난 성도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을 바로 알고 배워서 똑똑해지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분별하면서 잘못된 것을 나부터 거둬치우고 아무리 내게 유익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으면 타협하지 않고 찍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도자가 이리가자 해도 그것이 성경에 맞지 않을 때에는 과감히 ‘NO!’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굳건히 선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비로소 교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한 사람이 버티고 서면 천 사람이 지나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 ‘장석지(張釋之)’라는 법관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황제의 아버지 묘에서 물건을 훔치다 잡혔습니다. 장석지는 법률에 따라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감히 황제인 내 아버지 묘의 물건을 훔친 놈인데 어째서 삼족을 멸하지 않았는가? 황제의 아버지 묘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해서 그 죄가 몇 배로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률은 황제나 일반백성에게나 공정해야 합니다. 장석지는 매사가 이러했습니다. 장석지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황제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그 시대는 역대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올바른 사람,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 의를 위해 희생을 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라면 추호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 그 한 사람이 버티고 있으면 세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나라가 변할 수 있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법칙을 발견하고는 나에게 커다란 지렛대를 주면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죄된 세상을 들어서 치우실 수 있도록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마시고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십시오.

개혁이라는 말을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입버릇처럼 사용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으로 깨어나서 세상 보는 눈이 바뀌고 교회를 보는 눈이 바뀌고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고 환경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는 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맺는 말

 

 

 

므낫세는 주어진 55년의 시간동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나라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에 다한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부여받았으나 가장 악한 왕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저마다 주어진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시간을 세상에 길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임하실 길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주님이 사용하시는 지렛대 인생이 되시길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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