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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 27 히스기야의 이탈 
본문 열왕기하 20:12~21(구약598) 
날짜 2019-09-0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27

성경 : 열왕기하 20:12~21(구약 598)

제목 : 히스기야의 교만

 

 

사람들이 제주도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자연경관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거리가 제주도에는 있습니다.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제주도에는 용암이 식어 된 희한한 모양의 바위들과 작은 분화구들이 식어서 된 오름은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주도에 경치 좋은 곳에 위락시설과 펜션 같은 숙박시설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더니만 이제는 어딜 가든 건물이 가려서 자연경관이 막힘없이 펼쳐진 곳은 만나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나마 제주도는 넓어서 느낌상 조금은 덜합니다만 거제도는 심합니다. 거제도도 자연경관이 좋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해안절벽 같은 곳까지 전부 펜션이나 여타시설을 허가해줘서 경치 좋은 곳에는 예외 없이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제주도나 거제도가 보여 주어야할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자연경관입니다. 그것이 제주도와 거제도의 생명입니다. 당장의 욕심으로 시설을 짓다보니 지금은 건물이 자연을 다 가렸습니다. 본질이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그런 평범한 섬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매력도 사라집니다. 사람은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흉내를 자꾸 내다보면 자신만의 매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각턱이 그렇습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중병에 걸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사각턱을 원수처럼 여겨서 비싼 돈 들여서 사각턱을 깎는 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계란형 턱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카리스마가 사각턱에 있는데, 그것이 싫다고 깎아버립니다. 사각턱만이 가진 매력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진 매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을 우리도 덩달아서 보여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굳이 남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애쓸 필요는 없지만 꼭 보여 줘야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우리만의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고 성공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힘든 모습을 보여줘도 되고 성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줘도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한 모습인가 성공하지 못한 모습인가, 행복한 모습인가 힘들어하는 모습인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여야할 모습은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성공하는 모습이라야 의미가 있고 실패를 하더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이라면 충분히 매력이 있습니다. 행복도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이라야 아름답고 힘들어 하는 모습도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이라면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1. 세상 것으로 충만해지려는 노력보다

말씀으로 충만해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벨론 왕 브로닥 발라단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필편지와 예물을 사신을 통해 보내왔습니다. 12절입니다.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12)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같은 사건을 적고 있는 역대하 32장 31절을 보면 히스기야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러 온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왕 브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선물과 사신을 보내온 것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힘에 눌려 지내는 신세에서 벗어나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되찾고자 무진장 노력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앗수르에 맞서보기도 했습니다만 다 실패하였습니다. 바벨론도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한때는 세계를 지배했던 저력이 있는 나라이지만 앗수르가 워낙 가하다보니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유다나라의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18만 5천이라는 대군을 물리치고 또 죽을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기적까지 일어났다고 하니 신기한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같은 큰 나라도 이기지 못한 앗수르를 저 조그마한 나라가 무슨 수로 이겼단 말인가?’ 일단 그것이 궁금했고, 또 한 가지는 유다와 손을 잡으면 손해 볼 것 없다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큰 나라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내오자 히스기야는 기분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히스기야는 변방의 조그마한 나라 왕에 불과하였는데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한 것이라고는 뜻을 세워서 하나님의 법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고 버틴 것입니다. 물론 군사력을 기르고 방어태세를 견고히 하며 나라의 경제정치제도를 바르게 뜯어고치는 등의 노력들도 다하였습니다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는 국가적 기적과 죽을병에서 고침 받는 개인적인 기적을 모두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실력을 기르는데 정성을 쏟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계획을 수립하면 무계획적인 것보다는 한 두 단계 더 올라갈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한 두 단계 더 올라가도 인생은 더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굳건히 붙들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면 성공한 인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질그릇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이 질그릇에 보배들이 가득가득 담기게 됩니다.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로 충만해지려는 노력보다 진리의 말씀을 더 알고 깨닫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2. 말씀으로 인해 성숙해진 인격이야 말로

진짜 자랑거리입니다

 

 

 

비록 지금은 앗수르의 기세에 눌려있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대국인 바벨론의 왕이 친필서신과 예물을 보내오자 히스기야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바벨론 사신들을 극진히 대하면서 이곳저곳을 구경을 시켜주었습니다.13절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13)

 

재정창고를 열어서 금은 향품 보배로운 기름을 보여주었습니다. 무기창고를 열어서 어떤 무기가 있으며 군방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나라들은 다른 나라의 대통령이 방문하면 의장대사열 정도가 아니라 군사퍼레이드를 준비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나라일수록 그렇게 합니다. 미국같은 나라는 다른 나라 대통령이 왔다고 군사퍼레이드같은 것을 해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미국이 강하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스기야가 재정창고며 무기창고를 열어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이만큼 잘 살고, 우리 군대가 이정도로 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가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당신네들과 동맹을 맺을 충분한 조건이 되니 우리와 동맹을 맺고자 한다면 동등한 입장에서 맺자, 이겁니다.

히스기야가 재정창고를 열어서 금과 은을 자랑하고 무기창고를 열어서 무기를 자랑할 때 바벨론 사신들이 놀라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겉으로야 대단하다고 놀라는 시늉을 하더라도 속으로는 ‘응, 그래, 제법 갖추고 사는구나! 이 정도면 우리 방패막이는 정도는 해줄 수 있겠어!’ 이러는 겁니다. 바벨론은 대국입니다. 유다가 바벨론 앞에서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은 구멍가게로 돈 좀 번 사람이 대기업 총수 앞에서 돈 자랑하는 격입니다.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물질이나 명예, 권세가 사실은 무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에 너무 목 맬 필요도 없고 물질자랑 너무 할 필요도 없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물질이다. 명예나 권세, 그런 것에 목매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 없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실은 그런 것에 대해 굉장한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학력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해서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학교에서 명예학위 같은 것을 따려고 많은 돈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특히 물질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런 것에 무리해서 돈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여주려고 애써야하는 것은 주님으로 인해 내가 예전에 비해 얼마나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학위를 가졌더라도 인격이 덜 되면 박사학위가 하찮게 보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인격이 형편없으면 그 사람 가진 돈이 천박해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서 우리를 성숙한 인격의 사람으로 재창조해 내십니다. 믿는 사람의 자랑거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본질적인 것을 놓쳐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3. 지금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물창고의 보물을 자랑하고 무기고의 무기를 자랑하였습니다만 히스기야가 진정 자랑해야할 것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이 가지는 비상한 능력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룬 승리와 기적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대단한 신앙의 사람이던 히스기야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가지고 으스대는 용도로 써버렸다는 점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어려운 외부의 문제들을 이겨냈던 히스기야가 결국 이런 문제에서 넘어지는 것을 볼 때에 역시나 가장 힘든 상대가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가 여기 내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자랑했던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16~18절을 봅시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16~18)

 

히스기야는 바벨론 같이 큰 나라의 관심과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인정해 준 사실에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은 결국 독(毒)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좇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실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절대로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왕 브로닥 발라단이 유다의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자고 하는 것은 바벨론이 앗수르를 이겨내는데 유다를 이용하려는 것이지 절대 유다를 위해서 동맹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우리를 위해 주는 나라는 없습니다. 다 자기 나라에 더 큰 이익이 있으니까 위해주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서야 합니다. 옛날에 외교의 근본원리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었습니다. 먼 나라와는 손을 잡고 가까운 나라는 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지금 멀리 있는 유다와 손을 잡고 자기들과 이웃하고 있는 바벨론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앗수르를 이기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반드시 유다가 될 것이 뻔합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입니다. 히스기야는 당장은 기분이 좋았겠지만 거기에 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칭찬이 얼마나 조건적인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상황 따라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를 간파하고는 지금까지와 같이 또다시 하나님을 굳건히 붙들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도 유다가 강대국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길을 열어 주실 것이고 유다는 그 누구의 간섭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는 나라가 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기분에 도취한 나머지 히스기야가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으스대는 도구로 삼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자랑했던 것은 나중에 다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와서 ‘선생님,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을 엘리야 같은 선지자라고 칭송하며 난리들입니다!’라고 들떠서 이야기할 때 미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있은 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다시피 하면서 당신을 왕으로 옹위하려 했을 때에도 반응하지 않고 한적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해서 예수님처럼 하지 못하며 살아온 것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를 보면 천하를 얻은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 옥상에서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영광에 도취해서 으스대는 마음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주신 것을 거둬가셨습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은 권력을 빼앗기고 도망을 가서 짐승처럼 풀을 뜯고 사는 신세로 한동안 살아야했습니다. 나부갓네살이 자신이 누리는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닫자 그때서야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을 다시 높여주셨습니다.

 

 

 

맺는 말

 

 

세상 것으로 충만해지려는 노력보다 말씀으로 충만해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말씀으로 인해 성숙해진 인격이야 말로 진짜 자랑거리임을 알고 사람들에게 성공을 보여주려고 애쓰기 보다는 말씀으로 인해 성숙해진 인격을 보여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결국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을 우리에게 만들어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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