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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 24 정중여산(靜重如山) 
본문 열왕기하 18:36~19:7(구약594) 
날짜 2019-08-1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24

성경 : 열왕기하 18:36~19:7(구약 594)

제목 : 정중여산(靜重如山)

 

 

이순신 장군 왜군과 싸울 때 부하들에게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가볍게 굴지 말아라, 경고망동하지 말아라, 침착하게 태산 같이 무겁게 행동하라!’란 뜻입니다. 원래 전쟁이라는 것은 기백도 중요하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냉정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이순신 장군은 항상 수적인 열세에서 싸웠습니다. 명량해전의 경우 왜군의 함선은 수백 척인데 이순신 장군은 겨우 12척의 배였습니다. 적은 숫자로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전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해서 이긴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해전에서는 대형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습니다. 대형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가 있었습니다. 적은 수자로 적의 많은 수를 상대할 때는 학의 날개처럼 쫙 펼쳐서 적을 가두어 공격을 하는 학익진(鶴翼陣)이 대표적인 전법입니다. 그런데 자칫 겁을 먹은 부하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돌격을 하면 대형이 흐트러져 이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경고망동하지 말고 태산처럼 무겁게 행동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히스기야 왕도 앗수르 장군과 협상에 나서는 신하들에게 똑같은 당부를 하였습니다. 가볍게 맞대응하지 말라, 아무 말 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 우리가 지난주부터 살펴보고 있는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고자 했던 몇 안 되는 개혁군주입니다. 다윗과 같다는 최고의 평가를 받은 왕입니다. 나라 안의 온갖 우상을 다 거둬치우고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랬더니 나라가 강해졌습니다. 나라가 강해지자 강대국을 섬기는 정책에서 돌아서서 독자노선을 걷게 되는데, 그것이 앗수르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4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가 10년이 지난 히스기야 왕 14년에 유다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앗수르의 왕은 산헤립이었고 쳐들어온 장군은 랍사게였습니다. 랍사게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는 온갖 말로서 위협하고 조롱하고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애굽을 믿고 너희가 까분다마는 애굽은 상한 갈대다!”(21)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했지 애굽을 의지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여호와가 도와줄 것 같으냐? 히스기야가 산당을 다 제하였는데 여호와가 뭘 도와준단 말이냐?”(22) 랍사게는 산당이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인 줄 알고 산당을 제하였으니 하나님이 노해서 히스기야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랍사게의 말을 듣고는 ‘그래 우리 왕이 산당을 제거한 것은 정말 잘못한 일이야, 하나님이 노할만도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싸울 줄도 모르는 것이 뭘 믿고 까부느냐? 우리 중 제일 못난 자보다 못난 자들이 뭘 믿고 까부느냐?”(24) 완전히 무시하는 말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쳐들어 왔겠느냐?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쳐들어왔지!”(25) 급기야 랍사게는 자기가 쳐들어온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서 하나님까지 갖다 댑니다.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함부로 하나님 갖다 대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이 시켜서 쳐들어왔다’는 말에 동요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겁니다.

앗수르의 랍사게가 던지는 말을 보면 말로 할 수 있는 공격은 다 들어있습니다. 무시하고 자존심 깎아내리는 말도 있고, 사실을 교묘히 왜곡시킨 말도 있고, 완전히 오해하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충분히 맞대응하고 싶은 말들입니다. 그거 아니라고, 잘못 알고 있다고, 오해라고, 틀렸다고 말이지요.

 

 

 

1. 경고망동하지 않고 태산처럼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의 협상대표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협상대표단에게 랍사게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 맞대응하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봅시다.

 

그러나 백성이 잠잠하고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36)

 

‘잠잠하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말아라! 틀림없이 속을 뒤집어 놓는 독한 말, 비수처럼 내리 꽂히는 말, 자존심을 짓밟는 말을 쏟아낼 것이니, 너희들은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서 자존심 상한다고, 화가 난다고 함부로 말하고 맞대응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생기고 꼬투리 잡힐 터이니 절대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된다! 알았느냐?’ 히스기야는 미리 내다보고는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말 앞에서 무너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말에 내가 한 마디도 못하고 있으면 바보쪼다가 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생각이 나를 속이는 생각이고 결국엔 일을 망쳐놓고야 만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순발력이 느린 사람은 집에 돌아와서야 ‘아까 이렇게 이렇게 말을 했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합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때 받아치지 못한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그때 받아치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가벼이 대응하지 않고 무겁게 반응할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일부로 예수님을 걸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님을 향해 빗발치는 공세를 쏟아 부을 때 가벼이 경고망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을 쓰시면서 태산처럼 무거운 침묵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미 그때 공세를 퍼붓는 자들은 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제가 이런 유의 설교를 여러 차례 했지만 막상 닥치면 태산처럼 무겁게 행동하는 것이 안 되더라고요. 왜 그럴까? 왜 안 될까? 지나고 나서 반성을 해 보니까 결국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신다는 것을 진실로 믿어내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을 봅시다.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4)

 

히스기야가 랍사게의 말을 듣고는 신하들을 이사야에게 보내서 기도를 부탁하는 장면인데 여기에 보면 히스기야의 믿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뭐라고 하는냐면 ‘하나님도 그 폐역한 말을 들으셨을 터이니 틀림없이 그들을 꾸짖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 남아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열 받는 순간에 ‘하나님이 지금 저 말을 다 듣고 계신다’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대개 험한 말을 듣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게 되면 순간 화가 나서는 갚아줄 말을 생각하지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 다 듣고 계신다’는 생각은 못합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한 아이가 옆에 있는 아이를 위협하고 협박하는 말을 하는 것을 선생님이 다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두 아이를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되려 위협하고 협박한 아이가 자기는 잘못이 없고 저 아이가 잘못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무리 뒤집어 씌우더라도 이건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 선생님이 들었으니까요. 선생님이 들었으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것을 못 믿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처합니다. 갚아줄 말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미 무너진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수한 말과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볼 때 신앙의 성숙함이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히 듣게 되는 말을 소화해 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이 생각을 하고 또 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결입니다.

 

 

 

2.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가벼이 경고망동하지 않고 진중히 무겁게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들었던 말이 주는 쓰라림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히스기야도 랍사게가 하는 말을 전해 듣고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기도로 나아갑니다. 사람들을 보내 이사야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3절을 봅시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해산할 때가 되어 해산은 해야겠는데 산모가 힘이 부족하면 어떻게 됩니까? 산모도 위험하고 아이도 위험합니다. 해산할 힘이 저에게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위기를 맞았지만 해결할 힘이 저에게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완전히 들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해산이 끝날 때까지, 즉 일이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 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에 있어서 대부분은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하는지 모를 때보다는 알고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막연하잖아요. 그래도 답은 그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답은 대부분 안다 이 말입니다. 답을 아는데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냔 말입니다. 답은 머리로 아는 것이고 실제로 행동은 가슴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행동은 머리로 아는 대로 되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는 대로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머리에 있던 것이 가슴으로 내려옵니다. 어떤 분이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오래 전 동업하다가 자기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이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고 있는 모습이 어떤 프로그램에 나온 겁니다. ‘자기도 왕년에 사업을 하면서 잘 나가던 사람인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마치 인생 달관한 도사처럼 행세를 하는데 열이 받칩니다. 찾아가서 한바탕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돈 떼먹고 가서 저렇게 망해서 혼자 살아가는구나, 나는 그래도 그때 이후로 열심히 해서 이렇게 살만큼 사는데, 지금 가서 만난들 받을 돈도 없을 건데 그냥 용서하자!’ 그런데 또 잘려고 누우니까 그 사람 때문에 고생했던 것 떠오르면서 또 열이 받칩니다. 잠이 안 와요.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만나서 한판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올라옵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이깁니까? 기도밖에 없습니다. 이분이 그 마음이 괴로워서 생전 안 나가던 새벽기도를 나갑니다. 새벽에 나가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그 마음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 주시겠어요? 주시지요. 기도하는 중에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마음을 훌훌 털어냈습니다.

머리로는 압니다만 아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안다고 버텨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는 대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마음도 해결되고 아는 대로 행할 힘도 생깁니다. 히스기야는 해산할 힘을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또 자신도 전심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6, 7절입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렁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6,7)

 

하나님도 다 들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뿌린대로 처리하겠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맺는 말

 

 

결국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무너집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다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에서 이기면 이기는 것이고 마음에서 무너지면 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랍사게가 퍼붓는 독화살 같은 말들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 냈습니다.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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