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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12 예후의 개혁과 한계 
본문 열왕기하 10:18~31(구약 579) 
날짜 2019-03-24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12

성경 : 열왕기하 10:18~31(구약 579)

제목 : 예후의 개혁과 한계

 

 

세계적인 산악인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산에 대한 욕심이 많았습니다. 욕심으로 산을 오르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산은 욕심을 버리고 올라야 한다는군요. 평생 산을 오르면서 이것을 터득한 산악인은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선다고 세상을 다 보지는 못한단다. 정상에 오르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더 높이 더 편한 곳을 향해 올라서려고 날마다 수고하며 삽니다. 그러나 한 계단 올라서면 더 높은 계단이 있습니다. 올라서면 설수록 끝도 없는 계단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길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오히려 더 높이 오르려는 마음을 다스려 내는데 길이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개혁 개혁하면서 밖을 봅니다만, 진정한 개혁은 자신을 개혁해 내는 것입니다. 틀에 박힌 내 생각 하나 바꾸기가 세상을 통째로 바꾸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를 바꾸려고 하면 세상의 절반은 이미 개혁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올 한해 자신을 바꾸는 노력과 그 일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취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 이스라엘 개혁을 추진하십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성공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습니다.

 

 

 

1. 예후는 권력장악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태풍이 휘몰아치듯 예후는 칼을 뽑아들고 아합의 집안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르엘에서 아합의 손자 요람과 그의 군대를 물리치고, 철권정치를 휘두르던 아합의 왕후 이세벨을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남아있던 아합 왕가의 사람들과 아합의 신복들을 처단하였습니다. 실패하면 자신을 비롯한 온 집안과 주변사람들이 몰살당하는 일이니 긴장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후는 아합집안을 쓸어버리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보통 이 정도하면 사람이 풀어집니다. 그러나 예후는 여기서 풀어지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일에 착수합니다. 18, 19절을 봅시다.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18,19)

 

권력을 장악한 예후는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자기는 바알을 많이 섬기겠노라 공포를 한 뒤 모든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섬기는 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왕이 직접 나서서 바알에게 성대한 제사 지내는 국가행사를 치른다고 하고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살려두지 않겠다고 하니 누가 안 오겠습니까? 예후가 이렇게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바알종사자들을 다 불러 모은 것을 바알 섬기는 자들을 한꺼번에 척결(剔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후는 그저 권력을 차지하여 왕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멈추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지를 헤아렸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주일학교에서 초코파이만 줘도 아이들이 그것 받아먹으려고 난리였는데, 요즘 주일학교 아이들은 반친목회 한다고 하면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합니다. 어제 초등부의 한 반이 반친목회를 하는데 아이들이 일주일전부터 ‘선생님, 김천에 있는 쿠우쿠우 가요’라고 졸라서 거기에 데려갔다고 합니다. 김천에 새로 생긴 초밥을 주로 하는 뷔페식당으로 가격이 제법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초밥은 손도 안 대고 소시지, 샐러드, 아이스크림, 이런 것만 갖다 먹는 겁니다. 아이들이야 즐겁지요. 그러나 어른이 볼 때에는 아깝지요. 우리가 꼭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때로 직분을 주시고 때로 남들보다 나은 성공을 주실 때 그저 내가 무엇이 되었고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고 어떤 복을 받았니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와 직분과 복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주님, 제게 이런 은혜를 주신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제 노력과 능력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새로운 일이 보이고 새로운 사명이 느껴지면서 냉랭하던 가슴이 다시 뛰는 일이 찾아옵니다.

예후는 권력을 차지하는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권력을 가지고 뭘 하라고 하시는가를 생각하고는 바알신앙을 뿌리 뽑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2. 바알 부역자들의 호사가 극에 달했을 때 처단하셨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바알부역자들이 바알신전에 가득 찼습니다. 그때 예후는 예복을 내다가 신전 안에 있는 바알 섬기는 자들에게 나눠줍니다. 처단할 자를 확실히 표를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사실상 수의(壽衣)입니다. 그리고 혹시 바알 섬기는 자 말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끼여 있으면 색출해내라고 합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오늘이 자기네 제삿날인 줄도 모르고 바알에게 멋 떨어지게 제사를 지냅니다. 이때 예후는 미리 준비시켜 둔 80명의 정예병에게 한 사람이라도 놓치면 대신 죽어야한다면서 모조리 죽이라고 합니다. 24, 25절을 봅시다.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 명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넘겨 주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 하리라 하니라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24,25)

 

이들의 죽음은 결코 불쌍한 죽음이 아닙니다. 이들은 아합과 이세벨 치하에서 백성들을 우상숭배에 빠뜨리는 대가로 최고의 호사를 누리던 자들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자들입니다. 이들 역시 아합의 집안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호사가 계속 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순식간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끝까지 가도록 내버려두셨다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분량이 차면 그때 몰아서 정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홍수를 보십시오. 사람들이 마음대로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다 죄가 땅을 가득 덮으니까 그때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바벨탑사건도 보십시오. 그들이 극도로 교만을 떨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다 교만이 극에 달하자 그때 허물어버리셨습니다. 뭐든지 극도로 차오르면 기울게 하시고 허물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죄도 그러하지만 영화(榮華)도 그러합니다. 솔로몬의 영화도 보십시오. 천년만년 가지 않습니다. 영화가 극에 달했을 때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도 극도로 누리면 안 되는 법입니다. 정도껏 누리고, 정도껏 놀고 해야지 다 누리려고 하고 끝까지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공을 거두었어도 너무 교만하면 부러질 일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죄나 영화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고난도 그렇습니다. 고난도 극에 달하면 끝이 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에 가서 살 때 거기서도 아말렉에게 노략을 당해 부하들에게 돌에 맞아죽게 되는 형편까지 되니까 끝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앞에서 너무 좌절할 것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반전(反轉)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극에 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반전을 시키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너무 멀리 갑니다. 뭐든지 너무 깊이 빠지고 극단적으로 빠집니다. 한 가지에 빠지면 그것밖에 없고 그것만 맞고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으로 여깁니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오기 힘든 법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정도 가다가 돌아옵니다. 너무 깊이 빠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가다가 돌아옵니다. ‘어, 이거 이러다가 큰일 나겠구나!’하고는 돌아선단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 그 세력과 호사가 극으로 치닫던 바알 부역자들을 끊어내셨습니다.

 

 

 

3. 말씀에 뿌리박을 때 진정한 자기개혁을 이룹니다

 

 

 

예후는 아합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어마어마하게 지어놓은 바알신전을 허물고 변소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선지자도 이루지 못한 일이고 엘리사도 이루지 못한 일을 예후가 이뤄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후가 이렇게 바알을 철저히 부수면서도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28, 29절을 봅시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8,29)

 

그 누구도 허물지 못한 바알의 세력을 단칼에 쳐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고 딴 길로 새버렸습니다(김서택목사님 책에서 인용). 하나님께서 바알만큼이나 싫어하시는 금송아지 신앙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아니 바알도 우상이고 금송아지도 우상인데 바알을 우상이라고 없앴으면 금송아지도 없애야 되는데 금송아지는 섬겼단 말이지요.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31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31)

 

말씀에서 출발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후는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을 퍼트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죽기 살기로 바알을 찍어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섬기는 것은 그만큼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째서 이럴 수 있느냐? 자기 기준으로 생각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이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예후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가치관과 열심의 바탕을 말씀에 두었더라면 바알을 찍어내는 열심으로 금송아지도 찍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후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그 집안의 왕위가 사대만 이어지지 않고 더 길게 이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취할 때에도 전부를 취해야지, 내 좋은 것만 취하고, 내게 유리한 것만 취하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치우치게 됩니다. 우상에 대해서는 펄쩍 뛰면서 교회세습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다 죄인데 말입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펄쩍 뛰면서 독재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관대합니다. 성경에는 동성애를 지적하는 구절보다 경제적 불평등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수십 배 많이 나오는데도 말입니다. 술에 대해서는 펄쩍 뛰면서 난폭운전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모두가 나를 헤치든지 남을 헤치든 헤치는 일인데 말입니다. 마약이나 도박 중독에 대해서는 죄악시하면서 게임중독에 대해서는 시간 떼우기라고 가볍게 여깁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 균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분이 예수를 믿고 첫 은혜를 받고 첫 열심이 생겼는데, 시간만 있으면 교회에 와서 청소도 하고 전도도 하고 교회 모임이란 모임은 다 참석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 아내는 불만이 많습니다. 시간 있으면 집에 청소도 좀 하고 자기 일도 좀 도와주지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을 조금 표를 내면 남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당신은 은혜가 뭔지 몰라서 그래!’ 이럽니다. 남편 은혜 받은 것이 아내에게는 오히려 시험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분이 에베소서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는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아, 이거 내가 너무 내 기분에 취해서 신앙생활을 하였구나! 먼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구나!’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아내의 부탁을 무시하지 않고 먼저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바탕을 둘 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습니다. 말씀에 기반을 두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낱낱이 들추어내십니다. 내 속에 숨은 의도, 감추고 있었던 부끄러움, 합리화시켰던 것들, 이것 정도는 괜찮겠지 했던 것들, 전부 들추어내십니다. 날마다 나를 허물어뜨리십니다. 허물어뜨리기만 하시지 않고 깨닫게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고 바르고 균형 있게 다시 세워도 가십니다. 그것이 개혁입니다.

 

 

 

맺는 말

 

 

이런 은혜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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