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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왕기하강해6 욕심과 요행수의 결과 
본문 열왕기하 5:15~27(구약267) 
날짜 2019-02-1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열왕기하강해 6

성경 : 열왕기하 5:15~27(구약 568)

제목 : 욕심과 요행수의 결과

 

 

신랑감을 파는 백화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백화점에 가면 마음에 드는 신랑감을 골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왔던 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 둘이 신랑감을 구하려고 그 백화점에 갔습니다. 1층에 갔더니 직업이 있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괜찮은데, 1층이 이 정도면 2층도 기대되는데!’ 하면서 2층에 올라갔습니다. 2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얼굴까지 잘 생긴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아가씨들은 기분이 한껏 들떠서 3층에 가보았습니다. 3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잘 생기고 집안일까지 잘 하는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와, 굉장한데! 한층 올라갈 때마다 한 가지씩 더 좋아지는구나, 그럼 4층에도 가볼까?” 4층에 갔더니만 돈 잘 벌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잘 생기고 집안일까지 잘 하고 성격까지 좋은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얏호, 완벽해! 기왕이면 마지막 5층까지 가보자! 얼마나 더 완벽한 남자들이 있을지 너무 기대돼!” 두 아가씨는 마지막 5층까지 올라갔습니다. 5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잘 생기고 잡안일까지 잘 하고 성격까지 좋은 남자는 없고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간판만 하나 걸려있었습니다. ‘내려가는 계단은 오른쪽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2층이나 3층에 만족하고 머물렀어도 됐는데 말이지요. 욕심의 끝은 허무함입니다.

명절에 형제지간 사촌지간 집안사람들 모이면 좋은 것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비교입니다. 이 집 아이들과 저 집 아이들 비교, 이 집 형편과 저 집 형편 비교, 비교 안 할래도 명절이란 것이 저절로 비교하는 분위기가 조성이 됩니다. 비교는 또 괜한 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욕심을 부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만 그로인해 결국 나병에 걸리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대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

 

 

반신반의하며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을 한 나아만의 몸은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았습니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나아만 자신이었습니다. 이때 나아만은 너무나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그분은 진정 살아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병이 나은 나아만이 기쁘고 놀란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달려와 외친 첫마디였습니다. 그런 다음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예물을 받아달라며 바치는데 그 양이 엄청납니다. 은이 십 달란트,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이었습니다. 은 십 달란트면 340킬로그램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금 육천 개가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동전 크기라 해도 육천 개면 많은 양입니다. 의복 열 벌이라 했는데 여기서 의복은 오늘날 자동차 한 대에 해당합니다. 잃었던 인생을 되찾은 나아만으로서는 뭔들 아깝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가 받지 않습니다. 16절을 봅시다.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16)

 

나아만이 계속해서 감사의 표시라고 받아달라고 강권해도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결국 받지 않습니다. 내가 그 앞에서 받을 수 없다라고 하는데 그 앞은 하나님 앞입니다. 이게 마치 이런 겁니다. 학교에서 글짓기 대회가 있었는데 글 솜씨 좋은 친구 녀석이 글을 좀처럼 쓸 줄 모르는 짝지가 안타까워서 시를 하나 써줬습니다. 그런데 그 시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모두들 대단하다고 축하하는데 차마 그 친구 앞에서 내가 썼다며 으스댈 수 없는 것이지요. 엘리사는 자기가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일하신 것인데 내가 뭐라고 그 대가를 바라겠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 좀 이래야 합니다. 내가 주의 몸된 교회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뭘 해서 어떤 보상, 어떤 대가를 얻겠다는 마음이면 시험에 들기 딱 좋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정말 순수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떤 계산과 목적을 가지고 해서는 그 또한 내가 시험에 들고 교회가 시험에 들기 딱 좋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애시 당초 자기를 들어내고 과시하려고 나아만을 고쳤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했던 일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드러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욕심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보면서 과연 이 순간에 나아만이 무엇을 느꼈을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아만이 느낀 것은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심이었을 겁니다. 세상의 그 어떤 물질이나 쾌락 명예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만나면 겁나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사람을 구워삶을 수 없습니다. 어떤 유혹도 통하지 않습니다. 완전 다른 종류의 사람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돈에 죽고 못 살지만 너희는 좀 달랐으면, 우리는 속물근성이 있어서 은근히 즐길 것 즐기지만 너희는 속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욕심을 이겨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무딘 양심을 깨우는 빛의 사명까지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2. 괜한 기대를 버리고 평안의 길로 가십시오

 

 

 

나아만은 하는 수없이 물러나 돌아가는데, 이스라엘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어가고 싶으니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만 제사 지내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않겠노라 다짐을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다짐하고 약속하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시는 왕이 림몬 신당에 들어가 경배할 때에 자기가 부축해 드려야하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봐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고 보냅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라는 말인데 그런 정도를 이해 못하실 하나님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아만은 엘리사를 떠나 얼마간 가는데,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못내 아쉬워하며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였습니다. 2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20)

 

게하시는 아까워 죽는 겁니다. 아니 못할 말로 공짜로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협박해서 뜯어내는 것도 아닌데 왜 돌려보내는지 게하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안 습니다. 병고쳐준 대가로 준다는데, 팔자를 고칠 돈인데, 이 기회 지나가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 없을 건데,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겁니다. 욕심이 발동하면 마음이 자꾸 조급해집니다. 조급해지면 욕심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게하시의 마음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스승에 대한 섭섭함도 있고 뭔가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심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님은 내가 자기 밑에서 이 고생을 하는데 왜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거지? 지금껏 자기 밑에서 머슴처럼 섬기면서 고생했는데, 이런 좋은 기회에 한 몫 챙겨주면 얼마나 좋아?’ 뭐 이런 마음 말입니다. 욕심은 이렇듯 언제나 그럴 듯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괜한 기대도 내 욕심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손위처남이 사업이 잘 돼서 잘 삽니다. 형제들에게 먹고 살 방편들을 하나씩 마련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손위처남이 마련해 주는 먹고 살 방편 정도로 만족이 안 됩니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손위처남에게 사업 밑천 정도를 바라는 겁니다. 손위처남이 그걸 알고는 어느 정도 사업자금까지 다른 형제들 몰래 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까지 해주었는데도 손위처남에게 섭섭함이 많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괜히 나혼자 무익한 기대를 해놓고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원망하고 그럽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런 괜한 기대와 욕심으로 인해 관계가 이상해지고 깨집니다. 집안마다 이런 일들이 꼭 있습니다. 그 괴로움을 고스란히 치르면서 인생을 삽니다. 형제들 간에, 부모자식 간에도 꼭 있습니다. 왜 이렇게 어리석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구태여 남을 의지할 일이 없습니다. 남을 의지하지 않으니 남한테서 바랄 것도 없고 바라는 것이 없으니 섭섭하거나 원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그게 길입니다. 이게 평안의 길입니다.

 

 

 

3. 요행수가 악수입니다. 순리대로 가십시오

 

 

욕심이 생기면 조급해 지고 조급해지면 무리하게 덤벼들게 됩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가져왔던 예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니까 조급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나아만에게 가서 어떻게든 얻어내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좇아가서 나아만을 따라잡아 만납니다. 21, 22절을 봅시다.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1, 22)

 

거짓말을 하지요. 조금 전에 선지 생도 중 두 사람이 엘리사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그들 형편이 너무 가난하고 딱한 것을 보시고는 엘리사 선생님이 그들 주려고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얻어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욕심에 붙들리니까 여호와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도 하고 스승도 팔아먹고 이용해 먹습니다. 욕심은 안 될 일을 억지로 되게 하려고 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얻어내려고 자꾸 무리수를 두게 만듭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맡겨 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 사람은 뭘 자꾸 억지로 하려고 합니다. 뭐든지 고수가 되면 쉽게쉽게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되는 일을 되게 하고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으니까 인생이 쉬운 것입니다. 자기 할 일을 자기 능력만큼 하면서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사람, 신앙이 어린 사람은 언제나 어렵게 삽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어려운 인생을 만나서 어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려니 어렵지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잇는 척하려니 힘들지요. 안 되는 일을 자꾸 억지로 되게끔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무리수를 두고 요행을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리수를 두고 안 될 일을 억지로 되게 하려는데, 일이 안 되는게 아니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라던 것이 됐다고 좋아하는데, 실은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요행수가 아니라 악수(惡手)란 말입니다. 게하시가 거짓말로 둘러댔는데 나아만이 사실여부를 조사도 해보지 않고 게하시가 요구한 것을 넙죽 내어줍니다. 주는데 요구한 것보다 더 줍니다. 은 한 달란트 달라했는데 두 달란트를 줍니다. 게하시로서는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습니까? 팔자를 고칠 수 있는 재물을 얻었는데! 기분 좋게 돌아옵니다만 그 길이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돌아오자 엘리사는 훤히 다 알고 물어봅니다. ‘어디 갔다 왔느냐?’ 이것이 게하시가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게하시는 마지막까지 욕심에 사로잡혀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엘리사의 준엄한 호통이 이어집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26) 결국 나아만에게 있던 나병이 게하시에게 옮겨붙어 게하시는 평생을 나병환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욕심이 나병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맺는 말

 

 

욕심에 이끌려 무리한 수를 둔 일들은 나중에 다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욕심을 부려 원하는 것을 얻었을지라도 결국에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어렵게 가지 마십시오. 순리대로 가십시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나보다 못한 분이 아닌데 왜 그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가 억지로 하려고 드는지..... 여러분, 순리에 맡겨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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