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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전서강해7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본문 고린도전서 7:1~16(신약270) 
날짜 2018-06-10 
설교자 전용표 목사 

 

  86세 되신 할아버지가 운동자에 뛰면서 축구를 하시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시합 날이 되니까 할머니, 아들, 며느리, 손녀들이 음식 싸들고 와서 응원을 하고 난리입니다. 평생 축구를 취미로 살아오셨는데 할머니는 싫다 안 하고 적극적으로 좋아합니다. 또 할아버지가 시간 나는 대로 할머니 데려나가 산책이며 운동을 시켜줍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과일주스를 평생 갈아서 마시는데 꼭 할머니 것을 같이 만들어서 둘이서 마십니다. TV에 나온 경기도 의정부에 계시는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보면서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부러웠습니다. 참 보기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은 핵가족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1인 가족 시대가 되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으로 살아갑니다. 집도 원룸, 식당 테이블도 1인 테이블, 1인용 가전제품 등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들이 쏟아집니다. 이혼율만 높은 것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는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결혼을 사랑보다는 계약개념(契約槪念)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격변기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혁명은 가정 제도에서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7장은 부부생활, 이혼문제, 독신문제 등 요즘도 충분한 이슈가 되는 문제 등의 가정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절에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질문을 했던 것 같고 그에 대한 답변을 바울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 혼자 지낼 수 있으면 혼자 지내십시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결혼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주를 위해 살고자 한다면 독신(獨身)으로 살 것을 권면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바울은 넉넉하게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도 아니고, 재미나게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도 아니고, 그저 예수의 도를 전파하며 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데는 딸린 식구 있는 것보다 혼자인 것이 더 편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1절이나 7절이나 8절에서와 같이 자기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신앙 좋은 사람은 모두가 자기처럼 해야 된다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혼자 사는 것도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7절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7)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다는 것은 결혼하는 것이 주어진 은사이면 결혼해서 살고 독신이 주어진 은사이면 싱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결혼비용이 많이 들고, 결혼해서 살다보면 겪는 갖가지 복잡한 일이 싫어서 혼자 사는 쪽을 택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런 자세로 혼자 살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자세입니다. 나에게 싱글의 은사가 있는가를 고민해 보고 그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괜찮은 자세입니다. 고민해보고 독신의 은사가 있다고 여겨지면 혼자 사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싱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싱글이든지 아니면 이혼을 하였거나 배우자가 일찍 떠나보내서 혼자가 되었거나 간에 혼자 사는 것이 편하고 감당이 됩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사는데, 괜히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힘들 때가 간혹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싱글로 사는 사람을 뭔가 부족한 듯이 쳐다볼 때입니다. 우리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을 뭔가 문제가 있는 듯이 쳐다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 남의 인생에 참견이 심한 편입니다. 관심이 아니라 참견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계획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면서도 돌아서면 또 남의 인생에 참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삶의 길이 있습니다. 꼭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다수가 사는 방식대로 살아야 그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그 생각 자체가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는 비성경적 태도입니다. 자, 우리는 몸이 불편한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불편한 곳이 없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됩니까? ‘정상인’요? 아닙니다. ‘비장애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계획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그렇게 가져야 하고 눈길 하나도 그렇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섣부른 내 생각으로 남의 인생을 함부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먼저 보냈거나 이혼 후 싱글의 삶을 선택하셨거나 아니면 아예 싱글로 쭉 살아오셨거나 싱글의 은사를 가지고 사시는 분들은 싱글로 사는 삶을 주를 섬기는 기회로 활용을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2.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부부가 되십시오

 

 바울은 자신처럼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좋다고 한 다음 성적인 욕구를 참아낼 수 없어 음행의 죄를 짓게 될 바에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음행을 피하려는 성적인 목적만 가지고 결혼하라는 말은 당연히 아닙니다. 남녀가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원래 주어진 하나님의 창조명령(창2:24)이기 때문에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부부가 되었으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3,4절을 봅시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3,4절)

 

 여기서 아내에 대한 의무와 남편에 대한 의무는 성적 욕구를 채워 주어야할 의무입니다. 부부라면 상대방의 성적욕구를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 채워주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부부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합니다. 부부지간의 육체적 관계는 중요합니다. 마음이 중요하다 하는데 육체적으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5절에 실제적인 예를 하나 듭니다. 기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부관계를 멀리 할 수는 있지만 정해진 기도기간이 끝나면 다시 합하라고 합니다. 간혹 너무 영적인 사람들 중에는 기도생활 한다면서 배우자를 버려두고 매일같이 교회에 와서 잠을 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너무 영적인 나머지 부부관계조차 죄스럽게 여기면서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을 신앙 좋다거나 영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입니다.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입니다. 신앙을 곡해해서 자꾸 비정상을 신앙 좋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정상이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처럼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여기며 사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마음이 멀어질 대로 멀어져서 같은 집에 산다 뿐이지 사실상 남처럼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오래 묵은 서운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서운함을 잘 풀어내야 합니다. 오래 묵은 뿌리가 되기 전에 풀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뭘, 그런 것 가지고 서운하다고 그래?’라며 받아주지 않게 되면 더 큰 것이 쌓입니다.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아내가 남편이 그 일로 서운했었다면 그 마음을 받아주고 미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풀립니다. 그리고 부부가 정상으로 살려면 꼭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고 쓴뿌리가 있는 사람이나 가정일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극단적(極端的)으로 가기 쉽습니다. 싸움도 극단적으로 하고, 무슨 서운함이 있어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결혼생활 자체가 인내인데 그걸 오래 참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결단을 내버립니다. 30년, 40년 살면 이제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격정도 가라앉고 평온해지는 단계로 들어가야 되는데, 여전히 극단적이고 살얼음판을 걷는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부부생활과 가정을 만들어가려면 꼭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원리는 성생활을 넘어서 모든 경우에 다 해당되는 행복 원칙(幸福 原則)입니다. 내가 내 아내나 내 남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있으면 상대방이 비교적 부드럽게 나를 대합니다. 사람은 본능이 이기적이어서 저 사람이 나에게 더 희생하고 더 해주는 것이 많다고 느끼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반대일 때는 불만이 쌓이고 날카로워집니다. 물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전자동짜증시스템’을 타고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상담을 좀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상대가 최근 들어 짜증을 내고 불만이 있는 것 같으면, 맞대응보다는 맛있는 것 더 해주든지 사주든지 작은 선물을 하나 해 주든지 하십시오. 그러면 정상인 사람하고 살고 있다면 반드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정상적인 부부관계이자 행복의 비결입니다.

 연애 때부터 이 원리로 만나야 합니다. 요즘 데이트 비용을 누가 대느냐 가지고 청춘남녀 간에 논란이 있던데 데이트 비용 누가 대야 합니까? 반반 대든지 좀 넉넉한 쪽이 부담을 더 지면 됩니다. 어떤 아가씨는 남자친구가 데이트 비용을 대지 않았다고 자기를 무시한 처사라며 발끈해서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참 못난 아가씨입니다. 반대로 남자는 항상 머리라야 된다는 식의 유교적 사고방식에 아직도 메여 있는 남자청년들 있다면 그런 것도 빨리 버리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식의 사고를 수용하십시오. 그것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혼수도 이건 꼭 남자가 해야 된다, 여자가 해야 된다, 이런 시대도 이제는 지나갑니다. 형편 따라서 서로 힘을 합쳐서 마련해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계산적이고 저급한 자본주의 물질주의 풍습에 놀아나서는 곤란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원리는 저 사람이 요즘 뭐가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3. 이별의 아픔도 끌어안고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0~16절까지는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몇 가지 경우를 말씀합니다. 먼저는 믿는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는데 믿지 않는 아내가 함께 살기를 원할 때 굳이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서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12). 이런 경우는 상당히 다문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믿는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믿지 않는 남편이 함께 살기 원하면 굳이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서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13). 신앙이 좋은 아내의 입장에서 주일날 은혜롭게 예배드리고 돌아갔는데, 저녁 늦게 안 믿는 남편이 술에 취해서 소리하면서 들어오면 뭐처럼 보입니까? 마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귀처럼 보이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첫 사역 나갔던 교회가 문제가 많은 교회에서 상처받고 나온 교인들이 이룬 교회였습니다. 예전 교회에 한 여자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방언, 통변, 치유, 투시 등 갖가지 은사에 능통했는데, 거기다가 직통계시(直通啓示)까지 받는 아주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분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여기며 그 앞에 벌벌 떱니다. 한 여집사님은 이 교주 같은 사람이 “너는 그 믿지 않는 남편과 같이 살면 안 돼! 네 남편은 마귀야 마귀! 주님이 이혼하라 하셨어! 이혼해!” 그래서 진짜 이혼을 했습니다. 나중에 말씀에 눈을 뜨고 정신 차리고 나서 이 집사님이 얼마나 눈물로 후회를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아무리 믿지 않는 남편이 술에 취해 들어오고 가끔 힘들게 하더라도 그 정도가지고 마귀라고 하면 안 됩니다. 마귀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 짝지어 주신 내 남편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배우자와 신앙문제로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믿지 않는 배우자의 구원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14)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간이 지나면 ‘나도 당신 따라 교회 갈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남자는 나이 들수록 외로워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내 따라 가게 됩니다. 믿지 않는 아내와 사는 남자는 아내의 존경을 받도록 살아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게 되면 그 존경으로 인해 남편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신앙문제로 도저히 같이 못살겠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갈리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15절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15)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는 말은 ‘하나님은 여러분이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달라도 평화롭게 살 수도 있지만 신앙이 다른 것 때문에 허구한 날 부딪히고 다투어서 사는 것이 지옥 같다면, 그리고 신앙이 다른 아내나 남편이 극구 이혼을 해야겠다고 한다면 화평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이혼을 정당화시키는 말씀으로 악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은 죄라고 하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혼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며 정죄의 눈길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령 남편이란 자가 매일 같이 아내를 폭행하면서 친딸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합니다. 도저히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데 아무리 용서하고 달래고 해도 또 불륜을 끊지 못합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거기다 다 씁니다. 자녀들이 충격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못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런 문제 앞에 ‘무조건 안 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뉘지 못 할지니라는 말씀을 철저히 주장하면서도 예외를 인정한단 말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떤 교회에 이혼에 관해 굉장히 강한 어조로 질타하고 정죄하던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교회 직분자를 선출하는데 물망에 오른 한 분에 대해서 “자식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교회 중직을 맡아? 안 돼!”라고 말해서 당사자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 아들이 십 몇 년 같이 살다가 도저히 못 살겠다며 이혼을 하였습니다. 그제야 쓰린 가슴으로 아픈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가정을 올바로 세워나가고 문제가 있더라도 기도하면서 해결해 나가도록 가르치고 선도해야 합니다. 행여 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 따끔하게 질책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미 깨어진 가정, 이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끌어안기도 해야 합니다. ‘제사장적인 사명’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시간이 갈수록 여러분의 가정이 순탄해지고 화목해지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또한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주어진 인생길을 잘 가꾸어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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