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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전서강해5 연약한 양심의 원리 
본문 고린도전서 8:1~13(신약271) 
날짜 2018-05-27 
설교자 전용표 목사 

 

   미국에서는 결혼식 마치고 댄스파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결혼식 풍습입니다. 미국인 성도들은 결혼식 뒤풀이인 댄스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민 간 한국인 성도들은 댄스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고민스럽게 여깁니다. 기독교인이 춤추는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이 영 거북스럽고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고 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민 간 성도들 사이에서는 결혼식 댄스파티에 ‘참석해도 된다, 안 된다’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되는 근거를 말하겠지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안 되는 근거를 제시할 것이고요. 양쪽 다 물러섬 없이 자기들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대개의 경우 어떤 것이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사이에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 문제를 놓고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 된다, 양쪽으로 갈려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싸웠던 모양입니다. 한 번 물꼬를 트면 다음부터는 습관적으로 싸우게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바울에게까지 전해져서 바울이 여기에 목회자로서 답변을 내려주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능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누구보다 밝았던 바울이 누구 손을 들어줬을 것 같습니까?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주장이 맞느냐? 지식적으로 맞는 답을 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런 문제가 있을 때에 맞고 틀리고를 따지면서 싸우는 고린도교인들의 영적 미숙함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지식의 원리가 아닌 사랑의 원리를 말합니다. 지식의 원리란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것인데 바울은 이것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단계라고 봅니다. 반면에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적 지식은 자유함을 줍니다

 

 먼저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우상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의 문제가 어떤 문제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도시에 유통되는 고기는 우상 신전에서 제사지내고 난 다음에 시장으로 유통되는 고기였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도축법이었습니다. 도축을 개인이 임의로 하지 못하고 소나 양을 신전에 가지고 가서 제사의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 도축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신전이 공인된 도축장이었던 셈이고 신전을 통해서 고기의 유통을 통제하는 사회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도축은 신전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했습니다. 자, 이런 사회구조이다보니 시장에서 고기를 사서 먹으면 그 고기가 무슨 고기입니까? 우상에게 제사 지냈던 고기입니다. 그것을 먹어야 합니까, 먹지 말아야 합니까? 여기에 대해 바울은 우선 지식의 원리를 말하는데, 먹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세상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슨 신이다 무슨 신이다 하는 것들은 전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짜 신들입니다. 있지도 않은 신들입니다. 있지도 않은 신에게 제사지냈다 해서 그 고기가 우상고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귀신이 붙어 부정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고기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먹으면 됩니다. 제사음식 그거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거 먹는다고 귀신이 옮겨 붙고 하는 것 아닙니다. 만약 우상제물 먹은 것으로 인해 우리에게 귀신이 달라붙는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보다 귀신이 세단 말입니까? 영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뭐든지 귀신타령을 하면서 마치 하나님보다 귀신이 센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자신들은 남들보다 더 영적인 것처럼 여기나 실은 영적무지에 매여 있는 상태입니다. 영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식이 주는 큰 유익은 바로 자유함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하셨습니다.

 좋은 예가 날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날 잡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사하기에 좋은 날 좋지 않는 날, 평생 고생하며 살게 되는 날, 다복하게 살게 되는 날, 손 있는 날, 손 없는 날, 출산에 좋은 날, 액이 낀 날. 겁이 나서 날 함부로 못 잡습니다. 그래서 용한 사람 찾아가서 돈 주고 날을 잡습니다. 택일 받아서 개업해도 망하는 집 수두룩하고 불행해 지는 가정 수두룩합니다. 다 영적으로 무지하다보니까 자꾸 무슨 날이 있는 줄 아는데 사실 그런 것 없습니다. 이사 갈 때는 비 안 오는 날이 좋고, 운동회 할 때는 구름 살짝 낀 날이 좋은 거지 무슨 재수 있는 날, 재수 없는 날, 손 있는 날, 없는 날,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부질없는 미신노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 날이나 편한 날 잡으면 됩니다. 자유함이 있는 겁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를 저주하면 일단 기분은 나쁘지요. 그렇지만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한다 해서 그 저주가 내게 실제로 임한다든지 귀신이 붙는다든지 그렇지 않습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분의 것인데, 무슨 저주가 임하고 한단 말입니까?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5,6절 보십시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5,6)

 

 이런 영적인 지식이 분명해야 미신노름에 빠지지 않습니다. 교회 다닌다하면서 점집이나 기웃거리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도 이런 영적인 지식이 분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우상제물을 먹습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2. 지식의 원리는 타인을 생각지 않고

자기과시에 빠지는 교만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 중에는 영적 지식이 아직 부족한 신앙이 어린 사람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영적지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 그래도 우상제물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고 귀신에게 바친 음식인데, 그걸 먹으면 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보란 듯이 우상제물 먹는 것을 보고는 시험이 드는 겁니다. 두 가지로 시험이 듭니다. 첫 번째는 지체를 판단하는 시험입니다. ‘저 집사님이, 저 장로님이,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우상제물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막 먹을 수 있어?’ 두 번째는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먹으니까 영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확신도 없이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고 먹는 것입니다. 7절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7절 봅시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

 

 우상은 가짜고 우상에게 바쳤다 해서 음식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영적 지식과 확신을 가지고 먹으면 괜찮은데, ‘어, 저 장로님 봐라, 저 집사님 봐라, 우상제물을 막 먹네. 저래도 되는가봐!’ 하면서 먹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양심에 거리낌이 가득한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기쁨이 없어집니다. 또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다른 죄에 대해서도 가볍게 생각하는 무딘 양심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믿음이 좋은 사람, 영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쉽게 취하는 방법이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데 가르치고 설득한다 해서 사람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무시하고 자기 믿음의 소신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믿음 없어서 저런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믿음 좋다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의 믿음 없는 것이 문제이고, 영적 지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하겠지만 바울은 오히려 영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나무라지 않고 영적 지식이 많은 사람, 믿음 좋은 사람을 나무랍니다. 9절을 보십시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

 

 내가 영적인 지식이 있어서 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자유를 스스로 제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가령 말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 앞에 두고 대학 다닌 이야기나 자기 지식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말 하는 것도 내 자유이지만, 그 사람은 마음이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 앞에서 지식 자랑 말고, 가난한 사람 앞에서 돈 자랑 말고, 문제 자식 둔 부모 앞에서 자식자랑 말아야 합니다(렘9:10).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지식의 원리를 따라 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나는 좋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의 마음은 다치기 쉽고, 그것은 곧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위가 됩니다.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그에 순복하는 실제적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영적 지식이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해서 이런 저런 실수를 저지르고 하는 사람, 아무리 말해도 잘 바뀌지 않고 고집스러운 사람일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11)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님은 죽으면서까지 그 사람을 구원해 내셨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리 쉽게 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제쳐두려고 하느냐? 어찌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지 않느냐?’

 지식의 원리를 따르면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자기과시이고 곧 교만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3. 사랑의 원리는 강자의 논리를 버리고

약자의 논리를 따름으로써 공동체에 덕을 세웁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사랑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12,13절을 봅시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2,13)

 

 내 행동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정당해도 그것이 형제의 마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면 죄라고까지 말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에게 죄 짓는 것이라 합니다. 왜냐 그리스도께서 저 형제를 위해 죽으셨는데, 내가 실족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허물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못합니다. 정말 감정적으로 행할 때가 입니다.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만약 영적 지식을 가지고 우상제물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이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된다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이 뭐냐? 그저 어려운 사람에게 주는 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강자의 논리를 버리고 약자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을 기준 삼지 않고 믿음 약한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맞더라도 내 맞는 것 주장하는 것으로 인해 저 형제가 상처받고 시험 들면 차라리 내 맞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 자기 기준을 내려놓지 못하면 공동체가 절대 하나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원리가 거기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기름과 물에 비유합니다. 물을 보십시오. 물은 높은 곳으로 흐릅니까, 낮은 곳으로 흐릅니까?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정말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인도하심은 내가 연약한 저 형제에게 맞춰주는 겁니다. 내 기준을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낮은 사람의 양심에, 약한 사람의 양심에 맞춰주는 것,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어느 교회에 오래 전 돌아가신 김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입니다. 이 분이 처음에 예수를 안 믿고 목사님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인이 신앙이 좋은 집사님이었는데, 새벽마다 교회 가지요, 주일마다 교회 가지요,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가지요, 애들도 데리고 가지요, 그것도 모자라 수요일도 가고 새벽도 갑니다. 경상도 말로 부예가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야, 니 목사하고 바람났나?”하고 집에서 한판 하고, 교회로 달라 갔습니다. “야, 목사 나와, 남의 여편네 허구한 날 불러내서 뭐하는 짓이야?” 정말 불같은 성미지요. 목사님이 허허 웃으면서 김선생님, 하면서 달래서 보냈습니다. 그 인품에 반해서 이 분이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자기 기준이 강하고 세상 생활을 쉽게 못 끊습니다. 술 먹고 찾아와서 큰 소리 칩니다. 사람들 모아서 놀러 다니면서 교회에 물의를 일으킵니다. 그래도 목사님이 흔들리지 않고 기다려주십니다. 나중에 서서히 믿음이 드는데, 일등 가는 일군 신앙이 됩니다. 그때 목사님께 그럽니다. “목사님, 그때 제가 목사님 속 많이 썩여드렸지요. 그때 참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 참아주신 덕에 제가 이렇게 신앙이 들었습니다.”

 

 

 

맺는 말

 

 교회에는 성숙한 사람 어린아이 청년 등 여러 신앙단계들이 섞여 있습니다. 숲이 무성해 지려면 어린 나무들이 죽지 않고 잘 자라나야 하듯이 교회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품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이해를 못하고 연약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다려 줘야 합니다. 자라기도 전에 나무를 베면 그 나무가 얼마나 큰 나무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맞는 것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1절을 함께 읽고 마무리 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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