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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전서강해4 말씀의 범위를 넘어가지 말라 
본문 고린도전서 4:1~21(신약265) 
날짜 2018-05-2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얼마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니 ‘목사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그럽니다. 이러면 참 난처합니다. 모른다 할 수도 없고 말이지요. 그런데 들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전에 우리교회 좀 다녔던 분인데, 주변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분을 자주 만나서 교제하며 어쨌든 신앙을 갖도록 애를 쓰고 했었고, 다른 분들도 노력을 많이 했는데, 더 이상 품기가 힘들 정도로 난폭하게 해서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나오고 싶다는 뜻을 누구를 통해 전해왔지만 제가 받지를 않았습니다. 교회가 그 사람으로 인해 다시 시끄러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솔직히 저도 그분을 다시 품기에는 너무 지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간 대구 나가서 생활하였는데, 오랜만에 마을 들어와서 목사님 생각나서 전화한 거랍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그럽니다. 그러고 전화를 끊었는데 저도 예전 생각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더 품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더 품을 능력이 되지 못한 것이 또 미안하고....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품는다는 것이 때로는 어렵습니다. 갈등이 있었던 관계를 다시 품는 것은 더 어렵고요. 4장은 고린도교회의 분열문제에 대해 바울이 결론적으로 하는 권면입니다. 1~5절에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6~13절에서는 기록된 말씀을 뛰어넘어서 스스로 왕이나 된 것처럼 마음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고린도교인들을 비꼬듯이 책망합니다. 14~21절에서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만 하지 말고 능력을 보이라고 따끔한 경고도 덧붙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영감으로 제시하는 방법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1. 남에 대한 판단 보류하라!

 

 갈등이 커지고 깊어지는 이유는 자꾸 내 입장에서 내 감정대로 해석하고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더 이상 판단하지 말아라, 판단보류(判斷保留)를 명합니다. 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5)

 

 1절부터 보면 이런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는 그저 주님의 종일뿐이고 종에게 요구되는 충성스러움으로 지금껏 일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상대당파를 향해 판단과 비판을 일삼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판단을 보류할 것을 명합니다. 물론 바울은 남에게 판단 받는 것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정도의 연약한 신앙은 아닙니다. 다만 자꾸 판단하고 판단한 것을 말하고 하는 것들이 모여서 교회를 더욱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깨어지게 하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나는 그래도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영적인 것을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을 볼 때 너무 영적이지 않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들은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야! 베드로는 영적체험이 많고 영안이 활짝 열려있는데 바울은 그렇지 못해!’ ‘아볼로는 너무 성경을 지식적으로 풀어! 저기에는 영적생명이 없는 것 같아!’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교만한 말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판단합니까? 예전에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에 걸려서 정차하고 있는데, 저 건너편에 뭣이 낯선 것이 보입니다. 뭐가 해서 자세히 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바로 옆에 어떤 아가씨가 짧은 치마를 입고 서 있다가 저하고 눈이 딱 마주쳤어요. 굉장히 불쾌하게 저를 봅니다. 저는 맹세코 그 아가씨 쳐다본 것이 아니었는데, 그 아가씨는 자기 쪽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니까 자기 짧은 치마 쳐다본 것으로 오해하고는 불쾌하다는 식의 눈빛을 보내 온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정확한 것 같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판단보류 하는 훈련을 하세요. 사람들이 모이면 ‘아, 틀림없이 그 사람이 이래서 그랬을거야!’ 잘 분석하고 또 논리적으로 말하고 하는 사람이 똑똑해 보이는데, 그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 추측성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공동체를 깨뜨려 버립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때로 눈을 반만 뜨고 사십시오. 귀도 반만 열고 사십시오. 다 안다고 행복이 배가 되느냐? 괴로움이 배가 됩니다. 오늘 바울은 더 이상 판단하지 말아라! 너희가 하나님이냐? 그럽니다.

 

 

 

2.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우리가 깨어진 관계를 하나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습관을 좇아, 아니면 세상에서 흔히 하는 방법대로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예 의식 속에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 바울이 판단을 보류하라고 한 다음 또 뭐라고 하는가를 봅시다. 6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6)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말씀에 얽매여라!’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더 복잡하고 더 극단적인 대적과 대립으로 몰고 갔던 이유가 뭡니까? 성경을 찾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을 덮어놓은 체 ‘기도해 보니 이런 마음 들더라!’ 라든지, 아니면 그저 자기 생각대로 하든지 하니까 더 힘들어 집니다.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더 복잡하고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된 데에는 바로 이러한 따로국밥 신앙이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누군가가 죄를 짓는 것을 보거나 발견했을 때 흔히 어떻게 합니까? “이봐 이봐 너 그거 알아? 누가 그렇게 했다던데?” “지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어디 두고 봐!” 이런 식으로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 보면 주님께서 공동체에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떤 순서로 처리해야하는지를 이미 말씀해 주신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하셨나하면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순서를 따라 해결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까요?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만약 직접 만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이런 해석 저런 해석 이런 말 저런 말 듣다보면 확대해석이 일어납니다.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이지요. 나중에 직접 만나서 터놓고 이야기해 보면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오해가 커진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둘이 만나서 이야기하라고 하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말이 번져 나가면 공동체 안에서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평가와 판단이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공동체 차원에서 정죄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형제를 살리는 방법이 아니라 형제가 고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전에 형제를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나중에 뉘우치더라도 그 공동체에 남아있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은밀히 단 둘이 만나서 솔직히 말하라. 이것이 먼저 둘이 만나서 이야기하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듣지 않거든 그때는 증인 될 만한 사람 한 둘을 데리고 가서 또 은밀히 말하라. 그래도 그 사람이 뉘우치지 않고 듣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는 교회의 장로에게 알려 장로와 함께 가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최종 단계로는 교회 전체에 알려서 그 사람과의 교제를 단절토록 하라고 하십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방법인데, 막상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방법을 너무 쉽게 내팽개칩니다. 영적이라는 사람들은 ‘기도 해보니 어떻다’라는데, 기도 이전에 성경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서는 거역하고 범죄 하는 자들을 훈계할 때에 ‘온유함으로’ 하라고 그 자세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적이 죄 지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고린도교인들이 갈등 초기에 주님의 방법대로 하였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덮어놓고 자기들 방법대로 다 해버렸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왕 노릇 했다’라고 비꼬듯이 지적합니다. 여러분, 기록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면 성경을 뒤적여 가며 길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말씀보다 지혜롭지 않습니다. 말씀을 벗어난 기도 응답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근거와 기반이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풀 수 있고 다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3. 능력을 보이라!

 

 바울은 이렇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이유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의 영적부모라는 말이지요.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데 가만 보고만 있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따끔하게 야단도 치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바울은 내가 너희의 영적부모니까 이런 말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도 합니다. 야단쳐 주는 스승이 있는 것이 복입니다. 야단쳐주는 스승이 없는 것이 불행입니다. 이제 머리도 굵었고 세상에서 나름 지위도 있고, 또 성공도 하면 누가 나를 야단칩니까? 누가 따끔하게 말해줍니까? 내가 힘이 생길수록 내게 비위맞추는 사람은 많지만 내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분열의 문제를 마무리 지으면서 최종적으로 뭐라고 하느냐하면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보이라’고 합니다. 19, 20절을 봅시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19,20)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로 가면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똑똑하게 말을 하느냐, 얼마나 다른 사람을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뛰어난가를 보지 않고 그들이 능력이 있는가를 보겠다고 합니다. 무슨 능력일까요? 너희가 이 사람 보고는 누구는 무엇이 어떻다하고 저 사람 보고는 또 무엇이 어떻다 하는데, 너희는 남 판단할 때 갖다 대는 기준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이 정말 갖기를 바라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 되는 능력’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은사가 부족한 교회가 아닙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나 이런 것이 없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많아서 탈이었습니다. 겸손이 없고 하나 되는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 것 가지고 오히려 자기를 주장하고 남을 낮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고요. 정말 큰 능력은 하나 되는 능력입니다. 제 지론이 이렇습니다. ‘안 싸우는 부부도 대단하지만 싸우고 잘 푸는 부부가 더 대단하다!’ 싸우지 않는 부부를 보면 타고난 성품 때문일 때가 많아요. 싸우고 푸는 부부는 후천적인 노력일 때가 많아요. 노력해서 된 것이니까 그게 더 대단하다 이 말이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푸는 능력입니다. 푸는 능력이 없으니까 잘라냅니다. 그저 정죄하고 잘라냅니다. 푸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푸는 능력이 없는 교회는 자연소멸 모드로 전환됩니다. 푸는 능력은 나를 깨뜨리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생겨납니다. 제가 청년 때 한 형제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세상에서 놀던 친구인데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그 친구만 나타나면 청년들이 하하 호호 합니다. 그게 싫었습니다. 신앙도 없는 저런 친구가 우리 청년회를 휘어잡는 것이 싫었고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속으로 미움이 커져만 갔습니다. 정해진 저녁 기도시간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는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저를 압도하셨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드렸었는데, 맨바닥에 무릎을 꿇으라는 강한 압박이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의자에서 내려앉아 얼음처럼 차가운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안 되는 겁니다. 맨바닥에 납작 엎드리라는 강한 압박이 또 밀려왔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데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누구누구를 찾아가라! 가서 말하라!” 그 친구를 찾아가서 말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제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거절하였습니다. “주님, 갈 수 없습니다. 제 체면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압박은 중단이 없었습니다. “너는 가서 말하라!” 몇 번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미워하던 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가서 ‘이러이러해서 내가 너를 미워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앞으로는 청년회의 분위기를 흐리는 행동은 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가 내면을 돌아보는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나는 낮추시고 우리는 하나 되게 하십니다.

 

 

 

맺는 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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