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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전서강해3 육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 
본문 고린도전서 3:1~23(신약265) 
날짜 2018-05-13 
설교자 전용표 목사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짚신장수고, 둘째 아들은 나막신장수입니다. 날씨가 화창하게 좋으면 나막신 파는 둘째 아들 굶을까 걱정이고, 비가 오면 짚신 파는 첫째 아들 굶을까 걱정입니다. 아들들이야 자기에게 유리한 날씨야 있지만 어머니에게는 유리한 날씨는 없고 걱정스런 날씨만 있습니다. 매일 자식 걱정하는 것을 보고 이웃집 사람이 그럽니다. “아, 생각을 바꿔요! 비가 오면 나막신 파는 둘째네 장사 되는 날이니 좋아하면 되고, 화창한 날씨면 짚신 파는 첫째네 장사 되는 날이니 좋아하면 되고, 그렇게 보면 모든 날이 다 좋은 날인데, 왜 걱정하고 그래요?” 들어보니 맞는 말입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그런데 아무리 머리로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이미 마음은 장사 안 되는 자식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지요.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총론에 해당하는 말씀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하는지 각론에 해당되는 말씀은 따로 없습니다. 각론은 우리나라 옛날 아이들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사자소학’(四子小學)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부모님의 덕을 갚고자 하니, 하늘을 다해도 끝이 없으니”라고 시작하여 자식이 지켜야할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데, 몇 가지만 옮겨보겠습니다. “의복이 비록 나쁘더라도 주시면 반드시 입어야 하며, 비록,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주시면 반드시 먹는다. 부모님께서 옷이 없다면 내 옷은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님이 먹을 것이 없으시면 내 먹을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몸, 머리털과 피부는 훼손 손상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말고 기뻐할 것이며, 부모님이 나무라시면 반성하고 원망하지 않는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지 말라!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깊은 연못에 헤엄치지 말라! 부모님이 근심하신다.”

 마지막 부분은 부모님 마음을 근심케 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효도의 근본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걱정 끼쳐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육신의 부모를 섬기는 이치나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섬기는 이치가 같습니다. 생각이 있는 자녀는 부모가 걱정할까를 항시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성도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항시 생각하면서 말과 행동을 제어합니다. 그렇게 볼 때 고린도교회를 자식으로 친다면 불효자식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이지만 고린도전서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1. 각자에게 주신 역할이 있음을 압니다

 

 1장 10절에서 시작된 고린도교회의 분열문제는 4장까지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십자가의 도를 비롯한 몇 가지 주제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 모두가 분열의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오늘 읽은 3장에서는 바울이 네 개의 파로 갈려서 치열하게 싸우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몇 가지 처방을 내리면서 ‘육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 이야기를 합니다.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1)

 

 고린도교인들은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로 대한다고 합니다.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순전히 육신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을 기도 많이 하고 은사도 있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내다보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바울은 ‘영적이라는 것’을 관계적 측면에서 봅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잘 섬긴다, 신앙 좋다’ 하는데 주변 사람들과는 다투고 엉망이면 신앙 좋은 것 아닙니다. 신앙은 관계의 성숙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서로 시기와 분쟁으로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고린도교인들은 제 아무리 방언이나 예언이나 방언통변 같은 은사가 넘쳤어도 바울은 그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 어린 아이로 부릅니다. 어린 아이들 특징이 ‘이거 아니면 저거’ 흑백논리입니다. 짜장면이 좋으면 짬뽕은 싫어, 짬뽕이 좋으면 짜장면은 싫어!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볼로를 싫다 하고, 아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울 싫다 합니다. 더 나아가서 틀렸다, 잘못됐다 그럽니다. 이것이 영적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자꾸 사람을 높이고 누가 누구보다 더 좋다, 더 뛰어나다, 더 괜찮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줄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면 거기에 편이 생기는 거예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봅니다. 5~7절을 봅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5~7)

 

 ‘아볼로가 좋다, 아볼로가 더 뛰어나다, 바울이 좋다, 바울이 더 뛰어나다’라고 하는데 바울은 그들은 사역자일 뿐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사역자가 고상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원뜻은 ‘종놈’입니다. 종은 주인이 ‘너 이거해라, 저거해라’하면 그것을 할 뿐입니다. 바울에게는 심으라 해서 바울은 심은 것이고, 아볼로는 물을 주어라 해서 물을 준 것입니다. 바울은 심는 역할, 아볼로는 물주는 역할, 바울은 개척의 역할, 아볼로는 양육해서 성장시키는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역할을 그렇게 주신 겁니다. 그걸 가지고 개척하는 것이 더 뛰어나니, 양육하는 것이 더 뛰어나니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영적 어린아이들은 이런 안목이 없다보니까 자꾸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니 못하니 하는 겁니다. 맡겨주신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센 사람은 센 사람 나름의 역할이 있고 부드러운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 나름의 역할이 있습니다. 항상 삼천포로 잘 빠지는 사람, 뭔가 푯대가 없어 보이지만 그런 사람이 대체로 사람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관계를 잘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막 밀어붙이는 사람이 때로는 주변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도 하지만 그런 사람은 목적을 성취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양하게 봐야 합니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주신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2. 공동체 전체를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영적 어린아이는 교회를 생각하는 면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16,17절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유명한 구절입니다. 너희가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너희’는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교회에 누가 계시느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이것을 항상 의식하고 교회생활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로 갑니다. 초신자들은 교회에 오면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 생각하고 겁을 내고 어려워 할 줄 압니다만 교회 오래 다니고 직분도 생기고 하면 그때부터 오히려 교회를 어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제가 어렸을 적에 마을마다 상여를 보관해 두는 당집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귀신이 산다 해서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해 계시는 곳인데 당집보다 덜 두려워하고 함부로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어른 모시고 살면서 그 앞에서 내키는대로 싸우고 할 수 있나요? 만약 그런 집이 있다면 그 집은 형편없는 집이지요. 교회생활도 큰 어른을 모신 듯 두려워하고 어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나의 말과 행동이 교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항상 염두에 두고 말과 행동을 절제 합니다. 엄마가 일하고 오니까 동생이 입이 툭 튀어 나온 게 기분이 몹시 상해 있습니다. 형이 야단을 쳤다는 겁니다. 엄마는 형이 동생을 괴롭혔나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웃집에서 떡을 했다고 주고 갔는데, 아이들이 배고프니까 엄마 아빠 올 때까지 참을 수 있나요? 못 참지요. 형도 못 참아요. 그래서 먹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엄마아빠 몫을 딱 정해서 그건 따로 담아 두고 자기들 몫만 먹기로 하고 먹었습니다. 하루가 얼마나 깁니까? 더 먹고 싶은 겁니다. “형아, 떡 더 먹고 싶어!” “안 된다! 저건 엄마아빠 꺼다!” 그래도 몇 살 더 많다고 형은 형입니다. 그런데 형이 깜빡 졸던 틈을 타서 참지 못한 동생이 엄마아빠 몫에 손을 대버렸습니다. 화가 난 형이 야단을 친 겁니다. 아직 철이 없는 아이들은 자기만 알지요. 엄마아빠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성숙하면 이제 생각을 할 줄 알아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생각합니다. 내 이 말이, 이 행동이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교회 전체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을까를 생각합니다.

 

 

 

3. 사람 자랑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어린 사람은 칭찬하는 말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21~23절을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1~23)

 

 ‘그런즉’은 앞의 모든 것의 결론이란 말입니다. 결론이 뭡니까?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봤던 1장 31절에서도 ‘사람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하셨고 3장의 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공동체가 깨어지는 이유가 많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을 과다하게 칭찬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자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연약해서 상처받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시기질투 합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높이면 거기에 서운한 사람이 반드시 생기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누구만 높이라? 하나님만 높이라 이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고 교회도 칭찬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 진리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칭찬이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맞지만 칭찬이 정도를 넘어서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칭찬을 지혜롭게 하지 못하면 공동체를 해치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헤아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에 자어(子圉)라는 사람이 공자를 그 나라 정승대감에게 소개를 시켰습니다. 공자가 만나고 나가자 자어가 대감에게 공자에 대한 평가를 물으니 대감이 대답합니다. “내가 공자를 만나보니 자네가 이나 벼룩 같은 소인배로 보이네. 내 오늘 왕에게 공자를 소개시켜야겠네!” 그러자 자어가 정승대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대감, 왕도 공자를 만나보면 대감을 이나 벼룩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정승대감이 공자를 왕에게 소개시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높이면 반드시 서운한 사람이 생기고, 시기질투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공동체가 깨어집니다. 사울이 언제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습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며 자기에게는 천을 돌이고 다윗에게는 만을 돌리는 말을 듣고부터 아닙니까? 칭찬은 누구에게는 칭찬이 되지만 누구에게는 서운함과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에게 ‘내가 너를 제일 좋아한다, 네가 제일 좋다!’ ‘이거는 네가 제일 잘 한다!’ 이렇게 칭찬해 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건 칭찬받는 사람에게도 독이 되고 공동체에도 독이 됩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목회자가 칭찬을 조심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을 했는데 전에 누구는 칭찬했는데 이번에 누구는 칭찬을 하지 않으면 그게 서운함이 됩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사람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칭찬 없다고 서운해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십시오. 모두가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면 된다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어떤 세력도 그 공동체, 그 교회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오래 갑니다.

 

 

 

맺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10~15절을 보면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인데 각자 그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 하면서 나중에 불로 그 공력을 평가할 날이 온다고 하십니다. 그때 올바른 것을 세웠으면 타자 않고 남아 있을 것이고 올바르지 않은 온갖 인간적인 것을 세웠으면 다 타고 남는 것이 없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교회도 생명주기가 있습니다. 우주적 교회, 무형교회는 영원하지만 지상교회와 개별교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시리아안디옥교회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도 지금 없습니다. 세워지고 부흥의 불길이 치솟다가 순수함과 열정이 식어지면 형식의 시대가 찾아오고 그것도 지나가면 탐욕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탐욕의 시대로 접어들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남아있지 않고 그저 이익이 되는가만 따집니다. 그때 행한 것들은 전부 불에 타 사라질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까? 불로 공력을 시험하실 때 타지 않을 것들로 잘 세워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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